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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12월 수출의 날에 은탑산업훈장을 수여하며 김지태 회장과 악수하는 박정희(위). 김지태 회장이 군사반란의 주역들에게 몸값으로 지급해야 했던 부산일보사의 1960년대 사옥 전경(가운데). 1960년 3·15 의거 직후 부산문화방송 전응덕 보도과장이 김주열군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와 인터뷰하고 있다(아래).
<김지태 전기-문항라 저고리는 비에 젖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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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⑤ 박정희의 언론장악 (1) 부일장학회 강탈
일제와 이승만 독재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언론은 나름대로 지사적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 천관우의 표현처럼 연탄가스에 취하여 비명 한번 못 질러본 채 박정희에게 장악되었다. 박정희는 이승만에 비해 훨씬 더 과감하면서도 교묘하게 언론을 장악했다. 그 출발은 바로 부일장학회 강탈사건이었다. 박정희는 한국문화방송 주식 100%, 부산문화방송 주식 65.5%, 부산일보 주식 100%를 사실상 보유하고 있던 김지태 회장의 부일장학회를 강탈하여 이를 토대로 5·16장학회를 수립하는 형식으로 세 언론사를 빼앗았다.
1962년 3월27일 중앙정보부 부산지부는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부산일보 전무인 윤우동, 한국생사 상무 이상학, 조선견직 전무 배정기 등 임직원 10여명을 구속했다. 김지태는 이때 일본 출장 중이어서 체포되지 않았다. 김지태가 일본에서 귀국하지 않자 중앙정보부는 그의 재혼한 젊은 아내 송혜영을 관세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송혜영은 젖먹이를 떼어놓고 남편 대신 구속되었는데, 중정 부산지부가 발표한 혐의는 1960년 남편과 서독 여행 후 귀국할 때 미화 6200달러(당시 한화 1000만환) 상당의 7캐럿짜리 다이아반지와 사진기를 밀수했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관세법으로는 세관을 통과할 때 반지를 손에 끼고 들어오면 구두신고를 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송혜영에게 밀수죄를 적용한 것은 부당한 것이었다. 부인과 회사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되자 김지태도 어쩔 수 없이 4월11일께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중앙정보부는 당일로 그를 부산으로 압송했다. 법률상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보장과 관련된 범죄에 대해서만 수사권을 갖도록 되어 있었기에 외환관리법이나 관세법 위반 사건은 중정의 수사권 범위에 해당하는 범죄가 아니었지만, 법 위에 군림하는 초법적 존재 중정은 그런 법조항에 구애받지 않았다. 송혜영은 김지태의 귀국 사흘 뒤 풀려났는데, 중정이 송혜영에게 압수했던 반지를 돌려준 것만 보아도 그에게 들씌운 혐의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MBC, 부산MBC, 부산일보, 토지 10만평…
중앙정보부는 김지태에게 부정축재처리법, 외국환관리법, 농지개혁법 위반 등 9개 혐의를 적용하여 구속하였는데 군검찰은 5월10일 관세법(밀수입)·국내재산도피방지법·형법(허위공문서 작성 및 동 행사죄) 위반에 예비적으로 농지개혁법 위반 등 4개 혐의만 적용해 경남지구 고등군법재판소에 기소했다. 형법 및 농지개혁법 위반은 김지태가 실제 영농자가 아니면서 농지를 구입하고 관계 서류를 위·변조하여 등기했다는 것이고, 국내재산도피방지법 위반은 김지태 소유 조선견직이 일본에 수출한 보증금 수수료를 일본에 예치했다는 것이다. 군검찰은 5월24일 결심공판에서 김지태에게 징역 7년을 구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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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태 회장이 부산일보 소유 주식 등을 5·16장학회에 내놓기로 한 기부승낙서. 한홍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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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나 땅이 탐나서
그를 다시 잡아들인 건 아니다
박정희가 탐낸 건 언론사였다 “음수사원(飮水思源):
물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하라”
박정희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5·16장학회에 이 휘호를 남겼을까 지금의 방송파업은 ‘5·16반란과의 싸움’ 박정희는 김지태의 팔을 비틀어 언론사를 빼앗았지만 이를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부기관지로는 서울신문이 이미 있는데다, 생사람을 잡아다가 신문사를 강탈해서 국가의 소유로 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 한국문화방송의 주식은 김지태와 그 주변인들의 명의로 되어 있었지만, 실소유주인 김지태가 부일장학회의 몫으로 떼어놓은 것이었다. 박정희 일파는 그 형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부일장학회 대신 5·16장학회를 만들었다. 부일장학회는 박정희에게 강탈당할 때까지 법인으로 정식 등록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규모나 내용 면에서 볼 때 단연 전국 최고의 장학회였다. 1958년 11월 설립된 부일장학회는 1962년 6월 사라질 때까지 4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중·고·대학생 1만2464명에게 전부 17억7032만4450환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연간 3000여명에게 1인당 약 14만환의 장학금을 지급한 것이다. 당시 문교당국에 등록된 육영법인 37곳 중 가장 규모가 큰 상이군경장학회가 연간 300명의 학생에게 5만환씩 총 1500만환을 지급하였으니 부일장학회가 전후의 곤궁한 시절에 얼마나 큰 기여를 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정수장학회 쪽은 정수장학회가 한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장학회로 지난 50년간 3만8000여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고 주장하지만, 부일장학회에 비할 바 아니다. 김지태 회장은 사재를 털어서 막대한 장학금을 지급했지 누구처럼 1년에 2억 안팎의 거금을 받아 가지도 않았다. 5·16장학회의 임원이나 5·16장학회 소유가 된 문화방송의 임원으로는 고원증처럼 부일장학회의 강탈에 한몫을 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구사범 출신과 박정희의 친인척이나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요컨대 박정희의 동창이나 친인척의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는 기구 노릇을 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죽은 뒤 박정희의 양아들 격이었던 전두환은 5·16장학회의 보유 주식에서 한국문화방송 주식의 70%를 빼앗아 한국방송공사(KBS)에 주어버리는 대신, 나머지 자산은 박정희의 유족들이 관리하도록 했다. 케이비에스가 보유하고 있던 엠비시 주식 70%는 1988년 방송문화진흥회로 넘어갔다. 장물이 여러 번 손을 탄 것이다. 국정원 과거사위가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자 2005년 박근혜는 10년 넘게 맡아오던 이사장직을 내놓았다. 후임 이사장 최필립은 유신 시절 청와대 의전비서관으로 박정희가 최태민 목사에게 휘둘리는 어린 딸 근혜를 보호하기 위해 후견인 격으로 붙여 둔 자였다. 5·16장학회는 1982년 박정희에서 정, 육영수에서 수를 따서 명칭을 정수장학회로 변경했다. 정수장학회는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내걸었지만, 박정희나 육영수의 개인 재산은 한 푼도 출연되지 않았다. 옛말에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쓰라는 말이 있다지만, 납치범이 몸값을 뜯어내 그 돈으로 장학금을 준다는 것은 그 돈을 받는 학생들을 모욕하는 일이다. 박정희는 5·16장학회에 ‘음수사원’(飮水思源)이란 휘호를 남겼다. 물을 마실 때 그 근원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박정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휘호를 남긴 것일까. 지금 이 순간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 와이티엔(YTN) 등 3개 방송사와 연합뉴스, 부산일보, 국민일보가 언론의 공정성 회복을 위해 파업을 하고 있다. 박정희가 만들어놓은 언론 장악 체제가 민주정권 10년 동안 잠시 숨죽였다가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언론인들의 눈물겨운 파업은 유신체제를 타파하기 위한, 아니 그보다 10년은 더 거슬러 올라가 정보장교들이 일으킨 5·16 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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