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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4.20 20:01 수정 : 2012.04.20 21:39

간첩사건과 대출금 회수 등 박정희 정권의 압박으로 경향신문 사장 이준구는 경영권을 내놓고 만다. 그가 병중에 재판을 받는 모습(가운데). 민주화운동 아카이브즈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⑥ 박정희의 언론장악 (2-하)경향신문 강제매각

1965년 4월6일 경향신문 편집국에는 중앙정보부 직원 10여명이 들이닥쳐 3시간에 걸쳐 모든 캐비닛과 기자들의 책상 서랍까지 샅샅이 뒤지는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이틀 후인 4월8일 중앙정보부는 경향신문 체육부장 이형백(발표 당시에는 이남백이란 가명을 씀) 등 3명을 언론기관의 배후조종을 꾀한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이형백은 북에서 남파된 동생 이문백의 지령으로 이준구 사장을 포섭하여 “신문의 논조와 편집방향을 서서히 북괴 주장에 영합하도록 하기위해 사회의 어려운 면을 파헤치면서 주로 선동적인 기사를 게재케 하는 데 주력”하여 “농촌의 비참상을 과장 보도케 해왔다”는 것이다. 정보부가 제기한 혐의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정보부는 경향신문 동경지사장이던 윤우현이 일본 경찰이 다른 간첩사건을 수사하면서 수사망을 좁혀오자 1964년 12월25일 가족과 함께 북괴로 도피했다고 발표했다. 박정희는 이 두 가지 사건을 갖고 경향신문을 빼앗으려 들었다.

“백태하 가지곤 안되겠다, 김형욱이 나서라”
이문백은 1958년 5월 처음 남파되었다가 한 달 만에 북으로 복귀한 뒤, 1960년 8월 다시 남파되어 4년 동안 활동하고 1964년 9월 북으로 돌아갔다. 이형백은 동생을 신고하지 않고 숨겨주었을 뿐인데, 정보부는 이 사건으로 경향신문 사장 이준구를 압박하기 위해 마치 이형백이 간첩단의 주범이고 그의 사명이 이준구의 포섭에 있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이문백은 처남 유익재와 매부 송택봉을 포섭했는데, 유익재가 세탁소에 옷을 맡길 때 주머니에서 암호문을 빼놓지 않은 것을 종업원이 당국에 신고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는 이들을 감시하다가 이들이 무전을 보내는 현장을 덮쳤다고 한다.

동경지사장 윤우현도 단순히 사업이 부도나서 빚에 쫓기다가 북송선을 탄 것인데 중앙정보부는 마치 간첩으로 암약하던 윤우현이 일본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도주한 것처럼 조작했다. 5·16 핵심세력과 상당한 교분이 있던 윤우현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 사업을 벌였고, 워커힐 공사를 할 때는 자재를 납품하기도 했다. 이준구는 윤우현을 동경지사장으로 임명할 때 정보당국에 신원조회를 의뢰하여 용공혐의 없고 반공사상 강하다는 회신을 받은 바 있다.

이문백 사건과 윤우현 사건은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지만, 박정희 정권은 두 사건을 한데 묶어 발표하여 이준구를 간첩들에 포섭된 인물로 낙인찍었다. 1965년 3월22일 이형백이 체포되자 이준구는 경향신문 간부들에게 당분간 자중하면서 부드러운 방향으로 편집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이준구는 사건 발표 전날인 4월7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4월9일부터는 십이지장 궤양과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병상에서 계속 조사를 받았다. 중앙정보부가 덮어씌운 혐의는 언론기관 배후조종을 위해 남파된 간첩들에게 포섭되어 활동했고, 전 경향신문 동경지사장 윤우현이 간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국에 알리지 않고 월북 편의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준구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에서 4월14일치 경향신문 1면에 ‘근고’라는 이름의 상자기사를 통해 “폐사는 저 공산북괴 간첩에 포사된 자가 폐사 내에 은신해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공할 일이며, 진노할 일이었는가를 생각하고 통탄하는 동시에 이를 미연에 뿌리뽑지 못한 책임의 일단이 폐사에도 있었다는 점에 대하여 국민 여러분의 질책을 감수”하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은 4월22일치부터 발행편집 겸 인쇄인을 이준구에서 그의 장인인 홍용택으로 변경했다.

박정희는 중앙정보부 서울분실장 백태하를 불러 이준구로 하여금 신문사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라고 지시했다. 백태하는 이른바 5·16 주체세력의 일원으로 박정희가 육군포병학교 교장을 지낼 때 그 밑에서 과장으로 일해 개인적인 신임도 두터운 사이였다. 백태하는 이준구에게 ‘신사적’으로 박정희의 요구이니 신문사를 내놓으라고 다그쳤다고 한다. 한 달여에 걸친 압박에도 이준구가 굴하지 않자, 박정희는 선수를 교체했다. 김형욱에 따르면 박정희는 백태하가 있는 자리에 자신을 불러 “백태하 가지곤 안 되겠는데 부장이 좀 나서서 경향신문에서 이준구가 손을 떼게 해보시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김형욱은 먼저 병원에 입원한 상태로 조사를 받던 이준구를 구속시켰다(5월8일).

이형백 사건이나 윤우현 사건이 이준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은 김형욱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김형욱은 이준구를 옥죌 새로운 혐의를 찾기 위해 ‘K공작’을 시작했다. 이준구가 조총련으로부터 4천만~5천만원을 수수했다는 첩보를 접한 김형욱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준구가 갇혀 있는 감방에 공작원을 죄수로 위장하여 투입했지만 별 소득을 거두진 못했다. 사건이 장기화되고 이준구가 계속 버티자 초조해진 중앙정보부는 이준구에 대한 새로운 압력수단으로 그가 한국전쟁 직후 금전출납 군인을 살해하고 거액을 탈취하였으며 부역행위를 했다는 첩보에 의거하여 여죄를 추궁하기까지 했다.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은 이승만 시절에 비해 한층 교활해졌다. 당시의 한 언론인은 이준구는 경향신문을 정론지로 만들어 상업적으로도 성공했지만, 그 직선적인 정론성 때문에 파국적인 결과를 맞았다고 풀이했다. 이준구의 최대 실수는 그가 상대한 박정희 정권의 성격을 잘못 파악한 데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과거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것처럼 직접적인 탄압을 가한다면 몇 년 뒤 신문을 다시 복간할 수 있겠지만, 박정희 정권은 교묘하게도 신문 자체를 죽이기보다는 이준구의 경영권을 박탈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64년 6월4일 집에서 강제연행되는 이준구 사장(왼쪽)과 그의 부인 홍연수(오른쪽). 홍연수는 ‘몰래 녹음’으로 중앙정보부 수사부 부국장을 함정에 빠뜨려 해임시킨다.

박정희는 이준구 간첩몰이로
신문사와 바꾸자고 협박했지만
부인 홍연수는 이를 폭로하고
기자들 월급까지 올려줬다

그러자 은행빚 독촉이 시작됐고
갚겠다는 돈은 계속 뿌리쳤다
신문사는 결국 경매를 거쳐
장물보관소 5·16장학회로 갔다

느닷없는 3개 은행의 대출금 회수
박정희 정권은 19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때처럼 광고주들에게도 압력을 가했지만, 경향신문을 가장 압박했던 것은 느닷없는 대출금 회수였다. 경향신문이 한일은행, 서울은행, 제일은행에 진 부채는 약 4627만원인데, 신문사 쪽이 담보로 은행에 제공한 부동산의 평가액은 약 4억원이었다. 당시 연체 이자도 없었고, 상환 기한도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3개 은행이 똑같은 문구로 된 ‘채무일시상환 내용증명’을 1965년 7월3일자로 보냈다는 것이다. 주요 신문사들이 이 무렵 1억~1억3천만원 정도의 은행채무를 지고 있었던 것에 비하면 경향신문의 재정 상황은 극히 양호한 것이었다. 제일은행장 이보형은 이준구가 자신의 신원진술서에 ‘우인’이라고 써넣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는데, 담보 충분하고 상환기일도 한참 남아 있는 대출금을 환수하겠다고 나선 것을 보면 정보부에서 어떤 압력을 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준구를 구속송치한 6월14일 밤 김형욱은 이준구의 부인 홍연수를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원래 김형욱은 이준구 부부와도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는지라 홍연수는 김형욱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줄 알고 갔는데, 김형욱은 홍연수에게 남편이 빨갱이인 것을 몰랐느냐며 이준구 같은 빨갱이는 사형 아니면 종신형이라고 협박했다. 홍연수 역시 악에 받쳐 당신네들이 한강을 건너올 때 국민의 재산을 빼앗아도 좋다는 혁명공약이 있는지 다시 보겠다며 소리쳤다고 한다. 홍연수는 이준구에게 면회 가서 사태가 장기화될 터이니 마음 굳게 먹고 책이나 보고 있으라고 당부한 뒤, 개인재산을 정리해서 오히려 기자들 월급을 올려주었다고 한다.

이때 중앙정보부에서 홍연수를 담당한 자는 검사로 중앙정보부에 파견 나와 수사부 부국장을 맡고 있던 길기수와 감찰실장으로 악명을 떨치던 방준모였다. 정보부는 홍연수에게 검은 지프차 두 대를 붙여 미행을 시작했고, 경향신문은 경향신문대로 사회부 기자들이 신문사 차로 중앙정보부 지프차 뒤를 쫓아다니곤 했다. 김형욱이 자신의 회고록에서 “어지간한 남자 뺨치고 휘두를 만한 배짱을 가진 여자”라고 평가한 30대 중반의 젊은 홍연수는 가끔 미행하는 정보부원에게 힘들게 따라다니지 말고 그냥 내 차 타고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언론사를 내놓으라는 협박에 완강히 버티던 부산일보의 김지태는 징역 7년을 구형받자 포기각서에 도장을 찍었다. 김형욱은 홍연수에게 자주 김지태 얘기를 하면서 신문사를 포기할 것을 종용했지만, 이준구 부부는 이준구가 간첩 혐의로 7년 구형을 받아도 꿈쩍하지 않았다. 김형욱은 사태가 장기화되자 매우 초조해졌고, 그에 따라 길기수나 방준모의 협박도 악랄해졌다.

야당은 11월의 국정감사에서 경향신문 사태를 집중적으로 물고늘어졌다. 11월4일 국회 내무위원회의 중앙정보부 감사, 6일 공보부 감사, 8일 재무부 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경향신문의 대출금 상환 압력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야당이 국회에서 떠들어대자 한동안 잠잠했던 중앙정보부의 탄압은 해가 바뀌자 다시 노골화되었다. 길기수는 연일 홍연수에게 신문사를 매각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홍연수는 신문사를 포기하겠다며 길기수를 경향신문 사장실로 불렀다. 그것은 홍연수가 파놓은 함정이었다. 홍연수는 길기수가 말끝마다 박정희 대통령의 뜻이라며 압박을 가하자 이를 녹음해두려고 준비를 갖춘 뒤 길기수를 불러들인 것이다.

마침내 홍연수가 신문사를 포기하는 줄 알고 의기양양하게 경향신문 사장실에 들어선 길기수는 홍연수가 딴소리를 하며 화를 돋우자 할 말, 못할 말을 다 쏟아내었다. 홍연수가 “그러니까 신문사를 손에다 넣어야만 이 사장을 내놓겠다 이것이지요?” “신문사 매매계약서하고 바꾸자는 것이에요? 쉽게 말하면 그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자 길기수는 “쉽게 말해도 그렇고 어렵게 말해도 그렇다”고 답했다. 홍연수가 만약 우리가 중앙정보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길기수는 “두 가지 다 잃겠지요. 징역 가고 신문사도 운영 못하고…”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문사는 경매로 넘어갈 것이고 중앙정보부가 지정한 사람 이외에 다른 사람은 절대로 입찰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시골 출신 가정부까지 인형으로 겁을 주어…
홍연수는 이 모든 내용을 녹음해두었다가 야당의 김상현 의원에게 제공했고 김상현은 국회에 테이프와 녹취록을 들고 나가 흔들어댔다. 천하의 중앙정보부가 악에 받친 젊은 여성에게 농락당한 것이다. 자신의 발언 내용이 국회에서 그대로 폭로되었다는 소식에 길기수는 졸도했다고 한다. 망신살이 뻗친 그는 중앙정보부 부국장에서 해임되어 검찰로 불명예스럽게 복귀했다.

길기수가 낙마한 뒤 방준모는 더 고약하게 홍연수를 압박했다. 홍연수 주변의 사람들을 떼어 놓기 위해 조카는 정보부에 몇 번 잡아다가 혼을 내고, 가정교사는 부모를 협박하고, 시골 출신의 겁 많은 가정부는 짚으로 만든 인형에 섬뜩한 조작을 하여 문에 걸어두거나 마당에 던져 놓는 식으로 겁을 주어 쫓아버렸다. 1946년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에서 스태프로 일한 적이 있던 방준모는 자신이 이렇게 소품을 쓰는 것에 능했다고 필자에게 자랑했다.

홍연수는 돈이 마련되는 대로 은행에 갚으러 갔지만 은행은 돈을 상환하겠다고 해도 받아주지 않았다. 경향신문은 결국 경매에 넘어갔다. 홍연수는 하는 수 없이 자신도 경매에 입찰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은행이 예치한 돈을 내주지 않았다. 정보부에서 조총련 자금이 들어온 혐의가 있다고 홍연수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하고 계좌를 동결한 것이다. 결국 경향신문은 1966년 1월25일 최저가로 혼자 입찰한 기아산업의 김철호에게 넘어갔다. 홍연수는 경매 이후에도 주식 양도를 거부하며 버텼지만, 이준구가 옥중에서 마음고생 몸고생으로 체중이 42㎏으로 줄어드는 등 건강이 악화되자 만 1년 만에 결국 경향신문을 박정희에게 넘기고 말았다. 이준구는 주식을 양도한 직후 풀려났다.

이준구 부부는 김철호가 입찰한 경향신문 매각 대금 이외에 미화 100만달러, 그리고 나중에 미국대사관 뒤의 기마경찰대 부지를 특별 불하받아 그곳에 이마빌딩을 지었다. 홍연수는 신문사를 다시 찾고 싶지 않으냐는 물음에 그때 본의 아니게 신문사를 빼앗겼지만, 받을 만큼 받았다며 마음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신문사에 원도 한도 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박정희가 빼앗은 또다른 장물 경향신문은 박정희의 장물보관소 5·16장학회로 넘어갔고, 경향신문은 한동안 김지태에게서 빼앗은 장물과 합쳐져 ‘주식회사 문화방송·경향신문’이 되었다가 박정희가 죽은 뒤 분리되었다. 현재의 경향신문 사옥은 원래 문화방송 건물로 지어진 것인데 건물은 현재 경향신문 소유이지만, 부지는 정수장학회 소유로 경향신문이 임차료를 물어야 하는 처지이다. 이 기구한 건물 11층에 정수장학회가 자리잡고 있고, 14층에는 민주노총이 있다. 500여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정수장학회 사회 환수와 독립정론 부산일보 쟁취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늘 민주노총 회의실에서 모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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