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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8.10 20:04 수정 : 2012.08.11 13:59

1974년 4월26일 <조선일보>가 보도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의 민청학련 사건 수사 결과 발표. ‘노농정권’이라는 말이 엄청난 느낌으로 다가온다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⑫ 긴급조치와 민청학련 사건

1972년 10월 박정희의 헌정유린 친위쿠데타 이후 숨죽이고 있던 학생운동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거치고 나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에서는 유신 이후 처음으로 학생들이 시위에 나섰다. 학생들은 선언문에서 사회에 만연된 무기력과 좌절감, 패배주의, 투항주의, 무사안일주의와 모든 굴종의 자기기만을 단호히 걷어치우자면서, ‘역사적인 민주투쟁의 첫 봉화’를 올리고자 했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의 첫 도전을 강력히 짓밟으려 했다. 시위 학생 500여명 중 180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20명이 구속, 56명이 구류 29일 처분을 받았다. 정권의 압박으로 학교는 구속 학생 전원을 포함한 23명을 제명하고 구류 처분을 받은 학생들에게 무기정학을 내렸고 시위에 적극 가담한 학생 18명은 ‘자퇴’처리 했다. 당국의 신속 과감한 조치도 학생들의 반유신 데모를 막지는 못했다. 시위는 10월4일 서울법대, 10월5일 서울상대에 이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유신정권은 언론이 학생들의 시위를 보도하지 못하게 했지만, 주요 언론사의 젊은 기자들은 자유언론수호선언을 하며 반유신데모를 보도했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유신반대운동은 젊은 세대에 국한되지 않았다. 12월13일 윤보선 전 대통령, 백낙준 전 연세대 총장, 유진오 전 고려대 총장, 김홍일 전 신민당수, 이희승 전 서울대 문리대학장, 김수환 추기경, 이병린 전 대한변협 회장, 한경직 목사, 김재준 목사 등 우리 사회에 손꼽히는 원로 15인이 시국 간담회를 열고 민주주의의 회복과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다. 12월24일에는 이들 원로 15인에 장준하, 백기완, 김지하, 계훈제 등 재야인사들을 포함한 30명의 발기로 ‘현행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조직하고 ‘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박정희의 비난에도 개헌청원서명운동은 너무나 순조롭게 진행되어 10여일 만에 30만명이 참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원로들은 12월31일에 다시 시국 간담회를 하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건의서>를 보냈다. 유신정권 타도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주장에 비하면 개헌청원이나 건의란 형식은 온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박정희는 이를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해가 바뀌어 1974년 1월8일 박정희는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긴급조치 1호의 주요내용은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와 유신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긴급조치로 금지한 행위를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 역시 금지되었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박정희의 집권 18년 중 절반 이상인 120개월가량이 계엄령, 위수령, 비상사태 또는 긴급조치였다. 유신시대는 1973년에 몇 달과 1974년 육영수 여사 서거 후 이듬해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될 때까지의 몇 달 만을 제하곤 쭉 긴급조치의 억압과 공포가 지속된 시기였다. 긴급조치 1호가 발동되던 그때 김지하는 <1974년 1월>이라는 시를 썼다. “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 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 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 겁먹은 얼굴”로 그는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고 했다.

학생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서울대의 경우 이제까지 학생운동이 별로 활발하지 못했던 의대와 공대에서도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나섰고, 이화여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등 여자대학에까지 시위가 확산되고 있었다. 학생운동 핵심그룹은 내심 제2의 4·19를 꿈꾸고 있었다. 특히 학생운동 내에는 1969년 3선개헌 반대 운동 당시 강제징집 되었던 학생들이 복학한 데 이어 1971년 교련반대 데모 당시 강제징집 되었던 학생들도 속속 복학하기 시작했다. 전국 각 대학에서 강제징집 된 학생들은 강제징집 되었을 때 같은 시기, 같은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아 자연스럽게 서로 교분을 쌓게 되었다.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강제징집이 학생운동의 전국적 조직화와 연대에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이다.

3선개헌 반대 운동 당시, 강제징집 된 후 복학한 선배그룹과 70, 71학번 등이 주축이 된 후배그룹은 1974년 봄 큰일을 한번 꾸며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학생운동의 인적자원이 풍부했던 서울대가 중심이 되어 전체투쟁 총괄, 서울대 각 단과대 담당, 서울 시내 각 대학 담당, 지방 소재 대학 및 여자대학 담당, 기독교계 학생단체 담당, 사회인 및 재야 담당, 인쇄 담당 등 나름대로 역할분담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거창한 조직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의 여러 공안사건에 대한 학습 효과로 이철, 유인태, 서중석, 황인성, 정문화, 나병식 등 당시 학생운동 핵심들은 강령이나 규약은커녕 조직의 명칭조차 붙이는 것을 꺼릴 정도였다. 마지막 단계에서 선언문 말미에 아무런 이름도 없이 나가긴 밋밋하다 하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이란 명칭을 유인물에 달았을 뿐이었다. 학생들은 “전국 각 대학의 운동세력을 조직하여 일제히 봉기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은 4월3일로 잡았는데, 제주 4·3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3월21일 경북대에서 시범적으로 데모를 벌였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4월3일 당일에는 서울대·성대·이대·고려대·서울여대·감신대·명지대 등에서 시위가 발생했으나 예상보다 규모가 훨씬 작았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민청학련의 배후로 몰렸던 일본인 기자 다치카와 마사키씨. 2010년 1월 서울중앙지법에서 무죄선고를 받은 뒤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
74년 4월 ‘학생들의 거사’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으나
박정희는 긴급조치 4호를 선포
내란음모 사건으로 몰고
인혁당 등을 배후로 지목했다

또 이들을 인터뷰했던
두 일본인은 졸지에 간첩으로
취재 사례비 7500원은
거사 지원금으로 둔갑했다

시위 주동자들 현상금, 간첩의 10배
박정희는 4월3일의 데모가 산발적으로 끝났음에도 긴급조치 4호를 선포했다. 긴급조치 4호의 내용은 1호는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4호의 주요 내용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과 이에 관련되는 제 단체를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연락 그 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물건·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고 이 조치를 위반하거나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것이다. 유신정권은 4월3일 밤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면서 “민청학련이 북한공산집단의 이른바 인민혁명을 수행키 위한 통일전선의 초기단계적인 지하조직으로 이 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우리 정부를 전복하려는 국가변란의 음모를 꾸며 학원의 일각에 침투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수사도 하기 전에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인민혁명을 수행하려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후의 수사는 당연히 이 결론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국정원 과거사위가 발굴한 민청학련 사건 관련 문건 중에 ‘민청학련 3·30조치 수사상황보고’라는 자료가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정보부가 사전에 사건을 인지·수사하여 3월30일부터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큰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곽성문 등 일부 학생회 간부들이 정보부에서 자기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찾아가 학생운동 내부의 동향을 고해바쳤다고 하는데, 중정은 자체 수집한 정보와 이들 프락치들이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는 준비를 한 것이다.

민청학련의 주역들에게는 거액의 현상금이 나붙었다. 간첩의 현상금이 30만원이던 시절 이철, 유인태, 강구철 등 3인에 대해서는 처음 50만원이던 현상금이 곧 200만원으로 뛰었고 고등학생 복장을 하고 도망 다니던 이철이 잡힌 4월24일에는 무려 300만원이 되었다. 이철이 잡혀 들어가 보니 중앙정보부는 이미 민청학련의 배후로 한편으로는 1964년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들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유인태를 인터뷰했던 일본인 기자 다치카와 마사키와 통역 하야카와 요시하루 등을 통해 일본공산당과 조총련 등 국외 공산계열을 설정해놓고 있었다고 한다.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1974년 4월25일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조총련계와 일본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으며 일본의 <주간 현대> 자유기고가인 다치카와 마사키는 조총련 ‘비밀 조직원’ 곽동의의 조종을 받은 자이고, 다치카와가 이철, 유인태 등과 인터뷰할 때 통역을 한 하야카와는 일본공산당원으로 이철 등에게 폭력혁명을 교사하고 자금을 지원했다고 밝혔다. 다치카와가 제공했다는 거사자금은 겨우 7500원인데 이것은 거사자금이 아니라 인터뷰에 대한 사례비였다.

중정에 포섭된 조직휘의 뒤틀린 삶
당시의 수사상황보고에 첨부된 <민청학련 사건 관련 일본인에 대한 수사지침>이라는 문건을 보면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잘 드러난다. 이 문건은 “초기 수사단계에서 조서에 올린 사항으로서 범죄요건에 배치되거나 일본인의 관여사실을 부정하게 될 자료로 쓰일 수 있는 부분, 전후 모순되는 부분은 삭제”하고 “조서를 정리할 때 경력, 모의과정, 목표 배후, 자금, 활동, 조직 등 상황은 지난번 부장님의 수사상황발표문을 참조하여 거기에 맞도록 체제를 갖추어 정비”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즉 사실대로 진술한 부분은 빼버리고 신직수가 발표한 대로 짜맞추라는 것이다. 이 문건은 또 다치카와가 유인태에게 준 취재비에 대해서는 “취재에 대한 사례비조로 7500원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진실에 반하는 것이니, 폭력혁명을 위하여 애쓰고 있는데 자금이 없어 라면으로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고 교통비도 없다는 사정을 말했더니 나도 같은 사상이라면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되어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되기를 희망한다. 적은 돈이지만 폭력혁명을 수행하는 자금에 보태어 쓰라고 하면서” 준 것으로 기재하라고 지시했다.

다치카와는 한국에 오기 전 김대중 납치사건을 취재하면서 김대중 구출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던 곽동의를 만난 적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재일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바 있던 곽동의는 조총련과 무관한 민단 내의 민주파였고, 다치카와는 “조총련계와 표면상 연계된 혐의 발견된 바 없”는 사람이었지만 중앙정보부는 다치카와가 곽동의의 지령을 받고 한국의 폭력 데모를 격려하기 위해 잠입한 것으로 몰고 갔다. 4월9일 전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수사상황보고’에서는 두 일본인에 대해 “한·일 양국 관계를 고려하여 추방조치함이 가하겠음”이라는 입장을 보였지만, 민청학련의 그림을 크게 그리면서 국외 공산계열을 배후로 끌어들이기로 마음을 바꿔 먹은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주일대사관 일등서기관 김동운의 지문 문제로 일본 정부로부터 곤욕을 치르고 있었던 한국 정부로서는 열세에 몰린 한·일 관계에서 두 일본인 카드를 만들어보려는 유혹도 크게 느꼈을 것이다.

두 일본인을 엮어 넣는 데는 이철의 경기중학 후배로 어머니가 일본인인 조직휘의 거짓자백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았던 조직휘는 가정 사정으로 경기중학을 중퇴하고 고미술품 가게 점원으로 있으면서 두 일본인을 이철, 유인태에게 연결해 주고 그들의 인터뷰에 보조통역으로 참여했다. 중앙정보부는 “빈한한 가정에서 출생하여 고령에 노환으로 와병중인 부모와 같이 생계를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자”였던 조직휘를 포섭했다. 중앙정보부는 조직휘를 정보부 인근의 라이온스 호텔에 묵게 하면서 “참고인 진술조서를 완벽하게 작성하여 증거보전 신청을 하여 조서의 증거능력을 굳히기로” 하였다. 중앙정보부는 “조직휘의 진술조서에 반드시 나타나야 할 점”으로 “두 일본인이 이철, 유인태에게 잡지 기자로서 인터뷰한 것이 아니고 폭력혁명을 선동, 사주, 방조하였다는 점”, 두 일본인은 물론이고 “이철, 유인태가 공산주의였다는 점”, 두 일본인이 “정부 전복을 위한 내란음모를 하였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보전을 확보”할 것 등을 꼽았다. 조직휘는 이 공로로 중앙정보부에 특별 채용되어 꽤 오랫동안 재직하다가 퇴사한 후 뒤틀린 삶을 자살로 마감했다.


[알립니다]

<한겨레>는 지난 5월19일치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에서 “윤필용 사건에 연루되어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군복을 벗은 권익현(육사 11기, 민정당 대표 역임)은 출옥 후 전두환, 노태우 등 동기생들과 송추유원지에 놀러갔다가 강창성을 우연히 만났는데 권익현이 가서 그대로 박치기로 들이박고 두들겨 팼다고 한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강창성 전 사령관의 유족들은 “사정을 잘 알 만한 관련자들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고, 실제로 있지 않았다’고 부인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충남 지역에 근무했던 강씨는 규정상 영외인 송추유원지에 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겨레>는 권익현씨에게 사실을 확인한 결과 “그런 일이 없었다”는 답을 얻었습니다. 문제의 내용은, 한홍구 교수가 1970년대 초중반 전두환씨와 군 생활을 함께 했던 인사의 증언을 직접 듣고 참고한 것입니다. 한홍구 교수와 <한겨레>는 유족들의 반론을 받아들여 강창성 전 사령관이 폭행당했다는 증언을 사실로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하고, 인터넷판에서 해당 문장을 삭제했음을 알립니다.

또한 “강창성은 겉으로는 윤필용을 돕는 척하면서 도청장치를 한 음식점으로 윤필용을 불러내 유도심문을 하고 그 내용을 보안사에서 적절하게 가공해 박정희에게 보고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강씨의 유족들은 “당시 관계자들에게 문의한 결과 박정희 대통령이 윤필용 사령관에 대한 수사를 전격적으로 지시하자마자 강 장군은 이 사실을 처음으로 듣고 윤필용 사령관을 보안사령관실로 불러서 수사를 통보하고 그 다음날로 수사를 시작했기에 시간적으로 도청을 하고 정보를 가공할 물리적 시간이 없었다”고 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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