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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1.02 19:57 수정 : 2012.11.02 21:17

1970년대 평화시장의 여공들. 이들은 하루 열댓 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맨 밑바닥에서 산업화를 이룬 역군들이었다. <세 이방인의 서울 回想 : 딜큐샤에서 청계천까지>

[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17>여공애사(상)

20세기 후반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수구진영 일각에서는 ‘산업화 세력’이란 말로 자신들을 포장하면서 민주화도 산업화가 됐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을 펴기도 한다. 또 일부에서는 박정희를 산업화의 아버지,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로 떠받들기도 한다. 과연 이 땅의 민주화와 산업화는 누가 이룬 것일까. 민주화와 산업화 두 과제에서 정말 핵심적인 구실을 수행했으면서도 주역으로 대접을 못 받는 사람들은 노동자, 특히 ‘공순이’란 이름으로 차별과 멸시를 당하던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맨 밑바닥에서 산업화를 이룬 역군들이며, 그 강고하던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민주화의 선봉들이다.

조국 근대화라는 미명은
여성들을 죄다 서울로 이끌었다
돈 벌어 동생 공부시키고
좋은 데 시집갈 야무진 꿈을 안고
신순애와 이총각, 장남수씨는
봉제공장 ‘공순이’가 되었다

저임금과 차별과 멸시 속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던 그들은
70년대 노동운동 주역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근로기준법을
어기는 자들을 단속한 게 아니라
지키라고 하는 자들을 잡아갔다

1931년 5월29일, 임금을 깎지 말라는 49명 파업단의 대표로 축대 위의 누각 을밀대에 오른 여성 노동자 강주룡. 누각 뒤편은 12미터 낭떠러지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강주룡의 을밀대, 김진숙의 크레인
자본주의화를 겪은 모든 나라에는 저마다의 슬프디슬픈 여공애사(女工哀史)가 전해진다. 유교적 가부장제의 유산에 식민지 지배와 전쟁과 압축적 근대화를 겪은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슬프기로 한다면야 다른 어느 나라의 자매들보다 더 슬픈 이야기가 많지만, 다른 나라 여공애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빛나는 순간들을 갖고 있다. 1970년대에 노동운동의 주역은 여성 노동자였다. 장기간에 걸친 군사독재에서 1970년대처럼 노동운동 내에서의 성비가 여성 쪽으로 기울었던 시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많은 연구자들은 왜 여성들이 그토록 열심히 투쟁했는가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했고 상당한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이 자리에서 그 연구 성과를 검토하고 평가할 여유는 없지만, 나는 중요한 질문 하나가 빠져 있는 점이 늘 아쉬웠다. 모순이 존재할 때 사람들이 투쟁에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70년대는 왜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는가를 묻기보다는 왜 그때 남성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지 않았는가를 규명해야 한다.

여성 노동자들은 1970년대 내내 노동운동을 책임졌고, 대학생들조차 변변히 데모를 하지 못했던 유신의 마지막 순간 와이에이치(YH) 사건을 통해 철옹성 같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는 단초를 열었다. 너무나 단단했기에 작은 충격도 흡수할 여지가 없어 깨져 버린 박정희 정권과는 반대로, 그 시절의 여성 노동자들은 한없이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무한히 강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못 배우고 불쌍한 시다에 머물지 않고 서로 보듬고 일깨워주며 당당한 인간으로, 떳떳한 노동자로 거듭났다. 아주 드물게 영웅화되긴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당하게 저평가되거나 의도적으로 외면되어온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유신시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도, 비정규직들이 기죽지 않고 오늘을 살기 위해서도 반드시 제대로 기억되어야 한다. 요즘 경제민주화 구호가 요란하지만, 노동이 빠진 경제민주화가 왜 사기일 수밖에 없는가를 분명히 하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유신시대의 여성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살펴보도록 한다.

대공황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던 1931년 5월29일 강주룡이라는 여성 노동자가 광목 한 필에 몸을 의지한 채 평양 을밀대에 올랐다. 누각 뒤편은 12미터 낭떠러지지만 앞쪽은 농성을 구경하는 중학생의 머리가 사진에 찍힐 정도의 그저 2층 높이였다. 강주룡은 임금을 올려달라는 것이 아니라 깎지 말아달라고 단식투쟁을 시작한 49명 파업단의 대표였다. 나 하나 임금 깎이는 것, 49명 파업단원들의 임금 깎이는 것 막아보려고 망루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나의 임금 삭감은 평양의 고무공장 노동자 2300명의 임금 삭감으로 이어질 것이고 결국에는 조선 8도 전체 노동자의 임금 삭감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강주룡은 죽기를 각오하고 망루에 올랐다. 강주룡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농성 시작 여덟 시간 만에 뒤쪽에서 몰래 접근한 경찰은 강주룡을 밀어버렸고, 아래에 쳐 놓은 그물에 떨어져 기절한 강주룡을 잡아갔다. 겨우 2층 높이에서 단지 여덟 시간 버텼지만, 조선 8도가 뒤집어졌다. 어떻게 여성의 몸으로 저 높은 곳에 올라 다른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있느냐며 사람들이 힘을 보태 임금 인하를 막아냈다.

강주룡이 행한 최초의 고공농성은 지금부터 80여년 전의 일이다. 한국 경제가 비교가 안 되게 발전한 사이, 강주룡의 손녀들은 그 시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높이 더 멀리 올라 더 오랫동안 버텨야 한다. 김진숙은 아득한 40미터 위 85호 크레인에 올라 300일을 버텨야 했다. 지율 스님의 100일 단식 이후, 한 20일 굶은 정도로는 그 수많은 인터넷 신문에도 기사 한 줄 실리기 어렵다. 처음 원산총파업을 공부하던 대학원 시절, ‘어떻게 한 달 동안 파업을 계속할 수 있지’라며 다들 신기해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코오롱 구미공장은 8년, 콜트 콜텍과 재능교육은 6년을 넘기며 싸우고 있다. 요즘 1년 정도 싸우고는 장기투쟁 사업장이라고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에 기어오르던 시절 식민지 조선의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 임금의 절반을 받았다. 남성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 남성 노동자 임금의 절반으로 일본인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과 대개 비슷했다. 소년 노동자들은 성인 노동자 임금의 또 절반이었다. 나이 어린 조선인 여공들은 일본인 성인 여공의 4분의 1의 임금을 받았다. 2차대전의 패전으로 한반도에서 물러간 일본이 20여년 후 박정희의 인도로 되돌아와 마산수출자유지역에 공장을 차렸을 때, 우리네 어린 여공이 받은 임금은 일본 성인 여성노동자 임금의 6분의 1에 불과했다. 이 여공들의 막내아들·딸보다도 어린 88만원 세대는 5년 전 처음 이름 붙여질 당시의 88만원보다 훨씬 못한 임금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그들에게 해방은 무엇이고 조국 근대화는 또 무엇이고 민주화는 또 무엇이었단 말인가.

동일방직 여공과 평화시장 여공 사이
1969년 패티 김이 발표한 ‘서울의 찬가’는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를 힘차게 노래했다. 물이 좋았던 덕인지 땡볕에서 농사일 안 한 덕인지 명절날 서울에서 선물을 한아름 안고 내려온 동네 언니나 친구의 얼굴은 몰라보게 하얘져 있었다. 너나없이 떠나고 싶었다. 종이 울리고 꽃이 피고 새들은 노래하고 사람들은 웃어주는 곳, 서울. 결말을 뻔히 아는 언론은 ‘무작정 상경’이라 불렀지만 서울을 동경한 꿈 많은 시골 처녀들은 3~4년만 열심히 일해 동생 공부시키고 돈 모아 좋은 데 시집갈 야무진 계획을 마음속에 다 세워 놓고 있었다. 꼭 찢어지게 가난한 집 딸들만은 아니었다. ‘조국 근대화’란 괴물은 시골 처녀와 아직 처녀라 부르기 어려운 어린 소녀들조차 더는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농촌에서 결혼 전의 젊은 여성들을 뽑아갔다.

청계시장 여공의 체험을 석사논문 <열세살 여공의 삶>에 담은 나의 누님 같은 제자 신순애는 똑같아 보이는 여공들의 삶도 집안의 경제력 차이에 따라 출발선이 달랐다고 증언한다. 동일방직은 “똥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처절한 외침으로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 곳에 들어가려면 최소한 고등학교 문턱은 밟아봐야 했고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씩 관리자들 집에서 공짜로 식모살이를 해줘야 했다. 나중에 동일방직 노조위원장이 된 이총각은 먼저 입사한 언니 덕에 오래 기다리진 않았지만, 관리자에게 그 맛 좋은 연평도 조기 한 짝을 주어야 했다. 학력도 변변치 못하고 조기 한 짝 ‘와이로’ 쓸 형편도 못 되고, 몇 달씩 공짜 식모살이 해주기에는 당장 부모님 약값이나 동생 학비를 대야 했던 사람들은 소규모 업체나 봉제공장 문을 두들겼다. 신순애는 이총각처럼 조기 한 짝 바칠 형편이 안 돼 평화시장에 갔지만, 그래도 식구가 같이 서울로 와 잠잘 곳은 있었다. 신순애는 먼지 자욱한 평화시장 골방에서 일하다 영양실조에 결핵까지 걸렸지만, 혼자 상경해 월수 ○○○○원에 침식제공이라는 광고에 팔려 술집으로 흘러간 복순이는 그런 신순애를 부러워했다.

사모님과 여대생들에게는 어땠는지 몰라도 시골에서 갓 올라온 10대 여공들에게 서울은 결코 종이 울리고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그들의 헛된 기대가 깨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골에서 생활 형편이 그래도 괜찮았던 집 딸들은 서울 생활을 더 힘들어했다. 꼭 여유 있는 딸들만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시골에는 아무리 가난해도 뒷간 없는 집은 없고, 아무리 초라해도 집에 마루도 마당도 있었다. 서울의 화장실은 깨끗한 물이 졸졸 나온다고 들었으나, 달동네나 천변의 판잣집에는 화장실도 변변히 없었다. 셋집에 어쩌다 화장실이 있어도 주인집 식구들이 우선권이 있어 아픈 배를 부여잡아야 했다.

당시 어린 여공들이 경험한 근로조건은 나같이 서울의 유복한 집에서 자란 사람이 묘사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다. 오죽했으면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놓았을까. 그 시절도 근로기준법은 있었고,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제정하라”가 아니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소리쳤다. 안 지켜서, 아니 처음부터 지킬 생각 없이 만들어서 그렇지 근로기준법은 꽤 좋았다.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근로기준법 등 노동3법은 한국전쟁 중인 1953년 초에 그야말로 후닥닥 만들어졌다. 유엔 참전국들은 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한국에 파병을 했는데, 각 나라의 야당이나 노동운동계에서는 노동3법도 없는 한국에 지켜야 할 민주주의가 어디 있느냐면서 철군을 주장하거나 원조를 삭감하라고 아우성을 쳤다. 급하게 법을 만드느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일본의 노동법을 베꼈다. 미군 최고사령부는 일본에서 군국주의의 부활을 막으려면 노동운동이 제구실을 해야 한다고 보고, 자국에서도 자본가의 압력 때문에 반영하지 않은 조항들을 노동법에 많이 담았던 것이다. 법은 꽤 좋았지만, 정권은 법을 안 지키는 자들을 단속한 것이 아니라 법을 지키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빨갱이라고 잡아갔다. 1973년 노동청을 만들면서 청장에 연이어 치안국장 출신(최두열, 최석원)을 임명한 것만 봐도 유신정권이 노동문제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다.

공장 식당은 왜 국과 물을 주지 않았나
흔히 1970년대를 대표하는 투쟁이 벌어진 동일방직이나 원풍모방이 노동조건이 열악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사정은 정반대였다. 이런 곳에서 민주노조가 결성되고 투쟁이 벌어진 것은 노동환경이 열악해서가 아니라 근로조건이 좋았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했던 것이라고 당시의 투사들은 입을 모은다. 나의 또 다른 누님 같은 제자 장남수의 노동 수기 <빼앗긴 일터>에는 그가 잡혀가 구치소에 갇힌 얘기가 나온다. 당시 장남수는 근로조건이 가장 좋다고 소문난 원풍모방 기숙사에 살고 있었는데, 구치소에서 주는 밥이 기숙사 식당에서 주는 밥보다 훨씬 좋았다고 한다. 신순애도 교도소에 가서 난생처음으로 우엉이나 연근 같은 반찬을 먹었다고 한다. 신순애는 가족들에겐 좀 미안했지만 교도소에서는 실컷 잠잘 수 있었고 때 되면 밥도 줘 여러 가지로 편했다고 한다. 게다가 구치소는 국도 주고 물도 주었다. 국민교육헌장의 가르침대로 능률을 지독히도 숭상하던 시절, 공장 식당에서는 노동자들이 화장실 왔다 갔다 하면 능률 떨어진다고 국이나 물을 잘 주지 않아 노동자들은 꾸역꾸역 밥을 먹어야 했다. 하루 열댓 시간 죽도록 일해도 죄수보다 못한 생활을 해야 하는 노동자의 처지는 참 서글펐다. 박정희는 노동자들의 가난이 열심히 일하지 않은 탓이라며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강조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아침 첫차를 타고 일 나가는 사람들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다.

국가는 수출의 날 같은 때 노동자들을 가끔 산업전사니 산업역군이니 하고 추어올렸지만, 국가도 자본도 사회도 식이 끝나고 나면 노동자들을 ‘공돌이·공순이’로 대했다. 많은 노동자들은 가난도, 차별도 다 팔자 탓이려니 하고 넘어갔으나, 일부는 이 차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노동운동에 나선 이들은 열악한 근로조건과 저임금도 힘들었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부분은 차별과 비인간적인 대우였다고 입을 모은다. 똑같이 데모하다 잡혀가도 대학생과 무식한 공순이들은 차별을 받았다. 학생들은 조금 전에 갔다 왔어도 화장실 또 간다고 하면 순순히 보내주었는데, 노동자들에게는 “야 이 쌍년아 참아”라는 쌍욕만 돌아왔다. 공순이에 대한, 약자에 대한 차별은 노동자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사회는 부모님이 주는 돈으로 버스 타는 학생들에게는 회수권을 만들어 반값만 받았지만, 저임금에서 버스비 내야 하는 같은 또래 공돌이·공순이에게는 회수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피차 교복을 입지 못한 억울한 처지였지만, 안내양들은 일요일에도 노동자들이 회수권을 내면 귀신같이 학생증을 보자고 했다. 자본은 늘 재단사가 미싱사를, 미싱사가 미싱 보조를, 미싱 보조가 시다를 갈구게 하여 생산목표를 달성했다. 그래도 군대와 달랐던 것은 담임은 반장을 야단치고, 반장은 조장을 야단치고, 조장은 또 어린 여공을 야단치다가 서로 붙잡고 막 울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소박한 자매애, 형제애가 노동운동의 기초였다.

신순애는 ‘중등수업 무료’라는 유인물 보고 찾아간 노동교실에서, 어느 날 사장이 “깡패가 죽어서 가마니로 덮어 놨으니 구름다리 밑에 가지 마라”고 했던 말의 주인공이 전태일임을 처음 알았다. 장시간 고된 노동을 마치고 공부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여기서만큼은 그를 ‘7번 시다’가 아닌 신순애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7번 시다 신순애는 2년 반 동안 같이 일한 7번 미싱 언니의 이름을 모른다. 늘 3번 시다, 5번 미싱 언니 하는 식으로 불렀으니 이름을 알 길이 없었다. 또래의 청소년들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를 책으로 배웠지만, 이제 비정규직의 어머니가 된 그 시절의 여공들은 그 시를 노동조합이나 야학에서 체험으로 직접 썼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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