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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의 초가 사무실 모습. 열악한 노동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해보려는 노동자들이 손을 내밀 곳은 교회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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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6>도시산업선교회 마녀사냥
한국전쟁 이후 노동운동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뒤늦게 1970년대에 민주노조의 깃발이 오를 수 있었던 데는 개신교의 산업선교회와 천주교의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JOC)와 같은 산업선교 또는 노동사목 조직의 역할이 매우 컸다. 너무나 열악했던 한국의 노동 현실에서 전태일의 죽음이 땅에 묻히지 않고, 그 불씨가 민중들의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다 민주노조라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대까지는 사회적인 개혁이나 구원을 의미하는 산업선교란 말보다 개인의 복음화를 강조하는 산업전도란 말이 많이 쓰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자본가들은 산업전도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특히 사장이 신자일 경우는 전 종업원을 의무적으로 예배에 참가시키기까지 하는 일도 있었다. 산업선교회에서는 감리교의 조승혁, 조화순 목사 등이 활약한 인천산선과 예수교장로회 측의 조지송, 인명진 목사가 활약한 영등포산선이 특히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조화순 목사의 경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여성 목사였는데 1966년 말 동일방직에 들어가 6개월간 실제 노동을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그리고 산업선교회에서 일하면서 조화순은 노동 자체도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노동자로서 받는 천시와 모욕이 견디기 힘들었다.
1970년대 민주노조의 행렬뒤엔 산업선교회가 있었다
“도산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말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했고
인명진·조화순 목사가 구속됐다 “종교를 빙자한 불순세력”이라며
박정희가 조사를 지시하자
한달 뒤 이런 보고가 돌아왔다
“그들은 불순세력이 아니며
근로기준법대로 해달라캅니다”
박정희는 화를 냈다
“유신때 법 고치라니까 뭐 했노?” 드라이버 살인사건, 노총 규탄을 촉발하다 노동 현장에서 산선이 처음부터 정부와 대립했던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산선과 정면으로 부닥친 것은 한국노총 산하의 기성 노동조합이었다. 노총과 산선의 대립이 첨예하게 촉발된 것은 1971년 봄 발생한 한영섬유공업 노조원 김진수의 피살사건 때였다. 김진수는 회사의 노조파괴공작 와중에 사측의 노동자에 의해 드라이버로 머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다가 두 달여 만인 5월16일 사망했다. 이때 섬유노조는 이를 단순히 노동자들이 개인적으로 싸우다가 그런 것으로 발표했다. 분노한 노동자들, 특히 전태일의 친구들은 노총으로 쳐들어가 사무실을 때려 부쉈고, 산선의 목사들은 노총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산업선교회는 노동자들을 대변하지 않는 기성 노조를 어용노조로 규정하고 그 지도부를 교체하여 민주노조로 개편하는 작업을 시도하거나, 새로운 노조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다. 앞서 살펴본 1972년 동일방직 주길자 지도부의 출현이나 1974년 반도상사 노조의 결성은 인천산선의 민주노조 건설 작업이 거둔 대표적인 성과였다. 노총과 기성 노조에서는 산업선교회의 활동을 극도로 경계했다. 반유신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던 무렵인 1974년 12월9일 한국노총은 국가안보 강화 촉구 및 북괴남침터널 구축 규탄 궐기대회를 열었다. 이 궐기대회는 ‘북괴’뿐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환상’에 사로잡힌 일부 인사와 “노동조합조직에 개입하여 분열과 파쟁을 조성하는 등 자기 직분을 망각한 행위를 자행”하는 “도시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 한 일부 종교인들”을 격렬한 어조로 규탄했다. 서구에서는 교회가 초기 노동운동의 강력한 반대세력 구실을 한 경우가 많지만, 한국은 그 반대였다. 너무도 열악한 노동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해보려는 노동자들이 손을 내밀 곳이라곤 교회밖에 없었다. 분신 1년여 전 전태일은 “저희들의 아버님”인 ‘국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식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 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 주십시오”라며 탄원서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반도상사 노동자들이 호소문을 전하려 노동청에 찾아가자 노동청 간부들은 “일도 안 하고 유인물이나 뿌리고 다니는 나쁜 아이들”에게 이런 불순한 짓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범죄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 당시 노동운동의 지원에서 종교계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나 빨갱이로 몰릴 가능성이 적었고,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고 있어 권력이 쉽게 탄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들어 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동일방직, 반도상사,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등에 연이어 민주노조가 들어선 것은 5·16 군사반란 후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직된 노총과 산별연맹이라는 공식적인 체계에 균열이 발생한 것을 의미했다. 유신정권은 이 균열의 진원지로 두 단체를 지목했다. 특히 1974년 2월 반도상사의 농성으로 분출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어용노조 결성을 통해 체제 내로 흡수하려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중앙정보부는 적극적으로 산업선교회와 노동자들을 분리하려고 했다. 중앙정보부는 1974년 3월 한순임 등 반도상사 노동자들을 연행하였을 때 산업선교회 실무자 최영희가 간첩인 것처럼 겁을 주었는데, 최영희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되어 도피하자 자연 산업선교회와 반도상사 노동자들의 연계는 단절되었다. 중앙정보부는 또 5월에는 조화순 목사마저 구속했다. 표면적으로는 노동자들과 함께 간 야외예배 설교를 문제 삼은 것이지만, 사실은 반도상사 노조 결성의 배후로 지목한 것이다. 전두환이 광주학살로 집권한 뒤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노동조합법을 개악할 때 악명 높은 ‘3자개입 금지’ 조항을 넣은 것은 바로 산선의 활동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산업선교회 내부에도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교회 내에서도 보수세력은 산선이 복음 전파보다는 노동 현장에서의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런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산업선교회가 여유 있게 문제를 풀어가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사실 기성 노조를 모두 싸잡아 어용노조라고 보는 것은 조금 지나친 일이었고, 섬유노조와 같은 상급노조 내부에도 좋은 사람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서도 개선의 여지는 있는 법이지만, 한순임에 따르면 산선 조화순 목사는 “타협해서 다섯 개 얻는 것보다 투쟁해서 두 개를 얻는 게 낫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투쟁을 통해 단결되고 의식이 고양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급진적인 여성 노동자들을 산선으로부터 떼어놓으려는 중앙정보부의 고도의 공작 덕분에 한순임이 이끄는 반도상사 노조는 산선이 강조한 투쟁의 방식을 취하지 않고도 회사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성과가 노동계 일반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3년 임기를 마친 한순임은 지부장 재선을 원했지만, 산업선교회는 산선과 거리를 두고 섬유노조와 가까워진 한순임의 재선을 바라지 않았다. 한순임은 산선의 물밑작업과 악선전으로 선거를 며칠 앞두고 “3년간의 돌덩이 같은 조직이 깨졌다”며 산선을 비난했다. 한순임이 쓴 글은 뒤에 정보기관과 보수 기독교세력이 산업선교회를 비난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한순임을 배제하는 데 산선이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산선의 작동으로 돌덩이 같던 조직이 순식간에 깨졌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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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산업선교회의 노조침투 실태를 조사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보도한 1979년 8월17일치 <조선일보>. 특별조사반의 조사 결과는 박정희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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