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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건설과 분양은 강남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사진은 그해 4월, 한창 건설중인 현대아파트 앞에서 농부가 소를 몰며 밭을 갈고 있는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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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9>영동 구획정리사업
제3한강교, 남산1호터널, 8학군…박정희의 강남 몰아주기는
돈 가진 자들을 죄다 이끌었다
정부는 막을 이유가 없었다
땅주인에게 공공용지를 받아
개발비용과 정치자금을 만들었다 “거기 땅 한평 안 사고 뭘했느냐”
자식들은 성실히 일만 하는
부모가 원망스러웠고
부모는 강남 부자가 부러웠다
투기공화국이 된 대한민국은
곧 박근혜정부 출범을 맞이한다 대한민국은 강남공화국이다. 어느샌가 그렇게 되어버렸다. 밤이고 낮이고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강남의 역사는 유신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박정희가 제멋대로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며 유신이란 친위쿠데타를 단행하던 바로 그 무렵만 해도 강남은 한갓진 농촌 마을이었다. 1970년대에 사람들은 그곳을 강남보다는 ‘영동’이라고 더 많이 불렀지만, 이제 영동이라는 말은 차츰 사라져 가고 있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라 붙여진 이름인데 ‘부티’ 나는 강남사람들로서는 ‘싼티’ 나는 영등포에서 유래한 이름을 달고 살기 싫었던 모양이다. 예로부터 몇몇 임금들이나 실력자들은 왕조의 중흥을 위해 수도를 옮기는 ‘천도’ 정치를 시도했다. 백제가 웅진으로, 사비로 계속 천도한 것은 꼭 고구려의 남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묘청이 서경 천도를 꾀하다가 좌절한 것은 수도 개경에 기반을 둔 기득권층의 반발 때문이었다. 이성계가 새 왕조를 세우고 한양 천도를 단행한 것도 고려의 권문세족의 영향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에서였다. 그로부터 600년, 서울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가벼이 여기고 ‘감히’ 신행정수도 건설을 추진한 노무현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성계의 한양 천도 같은 물리적 조치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박정희가 강남 개발을 시작한 지 불과 40년 만에 강남은 대한민국의 중심지가 되었고, 오리와 기러기가 노닐던 모래땅에 세워진 현대아파트는 대한민국 신분 상승의 종착역이 되었다. 오늘날의 강남불패는 ‘박정희 스타일’ 신행정수도 건설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기득권층을 대변하여 헌법재판소는 관습헌법이라는 희한한 억지논리를 내세워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어야 한다는 엄청난 역사적 규범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안다. 거기서 서울은 강남이라는 것을! 껍데기는 가라! 600년 관습헌법을 들먹였지만 서울의 껍데기는 한양이다. 한양이라는 말 자체가 한강 이북을 뜻하는 것이니, 한양은 강남을 껴안을 수 없다. 박정희가 선택한 땅으로 유신과 함께 성장한 강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듯했던 유신을 오늘에 되살려 놓았다. 박정희가 자행한 ‘공포의 정치’는 역사발전 속에 어쩔 수 없이 힘을 잃었지만, 박정희가 깔아놓은 ‘욕망의 정치’는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끌어올렸다. 1963년 1월1일을 기하여 서울은 인근 지역을 흡수하여 그 면적이 2배 이상 늘어났다. 오늘날의 강남 지역은 이때 서울로 편입되었는데, 1963년 말 상주인구조사에서 현재의 강남구에 해당하는 지역의 인구수는 1만4867명, 오늘날의 서초구에 해당하는 지역의 인구수는 1만2069명에 불과했다. 서울시는 1966년 초 제3한강교(한남대교)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강남 지역의 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데도 제3한강교 건설에 착수한 것은 도시개발이나 경제적 이유보다는 군사적 필요에서였다. 한국전쟁의 총성이 멈춘 지 아직 15년이 되지 않았던 시절, 전쟁 발발 3일 만에 이승만 정부는 한강다리를 끊고 도망했고, 서울시민들은 꼼짝없이 석 달간 인민군 통치 하에 남겨진 기억은 너무나 선명했다. 서울의 인구는 1950년에 비해 2.5배 늘었지만 한강의 다리라고는 한강인도교와 광진교 외에 1965년에 완공된 제2한강교(현재의 양화대교) 하나만 더 늘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제2한강교는 전쟁 발발 시 군 작전용으로만 쓰이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사시 서울시민들이 어떻게 강을 건널 것이냐 하는 문제는 정부 당국의 큰 걱정거리였다.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박정희는 당시 대한민국의 주요기능이 서울(그때는 당연히 강북이었다)에 집중되는 것을 크게 우려했다. 군 출신인 박정희는 강북에 국가의 주요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만약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전쟁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이후 남북의 긴장이 급속히 고조되더니, 1968년 1월21일 이북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 사건이 일어났고, 1월23일에는 미국의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이북에 끌려가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강남 개발이 시작된 데는 교통난, 주택난 같은 현실적인 요인뿐 아니라 안보 불안감도 크게 작용했다. 특히 1975년 4월과 5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3국이 차례로 공산화된 것은 정부와 서울 시민의 안보 불안을 부추겼고, 서울 상류층의 강남 이주를 촉진했다.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라는 인사말도 급속히 퍼져 나갔다.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가 본격화되기 직전인 1966년, 말죽거리 즉 지금의 양재동에서는 꽤 괜찮은 땅 한 평의 값이 300원에 불과했다. 그때의 짜장면 값은 30원. 지금까지 짜장면 값이 한 150배 정도 오르는 동안, 말죽거리 땅값은 평당 3000만원 이상으로 10만배가 넘게 올랐다. 자고 일어나면 수십배씩 땅값이 오르던 시절, 말죽거리에 땅을 사놓은 사람들에게 한국현대사는 그야말로 ‘말죽거리 신화’였다. 그러나 거기 땅 한 뼘 갖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무섭게 땅값이 치솟아 오르는 한국현대사는 ‘말죽거리 잔혹사’였다. 이 기막힌 일은 불과 한 세대 사이에 벌어졌다. 정부에 부동산 폭등을 막지 못한 책임만을 묻는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순진한 일인지도 모른다. 1970년대의 중앙정부나 서울시는 때로는 부동산 투기의 주역이었고, 대부분의 경우 공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청와대와 서울시의 대선자금 마련 작전 정부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나 강남 개발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업을 특별한 개발 비용을 들이지 않고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체비지 장사를 통해서였다. 예컨대 내가 강남에 땅이 1000평 있을 때 내 땅 500평을 도로용지로 내놓는다면 재산의 50퍼센트가 감소한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도로가 난 뒤 땅값이 두 배 뛰었다면 땅값을 기준으로 볼 때 절반을 내놓고도 나는 손해 본 것이 없게 된다. 만약 땅값이 10배 올랐다면 나는 땅 절반을 내놓고도 큰 이익을 보게 된다. 정부나 시가 도로를 내는 데 내가 내놓은 땅 500평을 다 사용하지 않고 250평만 사용했다면 나머지 250평이 체비지인데, 개발사업의 시행자는 이 체비지를 팔아 개발비용을 충당한다. 강남 개발의 다른 이름인 ‘영동 구획정리사업’은 체비지 매각대금을 재원으로 하는 특별회계로 추진된 사업이었다. 이런 방식은 정부로 하여금 공공투자를 하지 않고도 도시기반시설을 만들 수 있게 해주지만, 체비지가 팔리지 않는다면 사업 자체가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되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니 체비지를 팔아 개발비용을 마련해야 했던 정부로서는 땅값 상승을 원할 수밖에 없었고, 서울시 간부들 중에서는 체비지를 잘 파는 사람이 유능한 간부로 평가받았다. 서울시가 발 벗고 땅장사를 하는 상황에서 부동산 투기는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사실상 조장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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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의 건설과 분양은 강남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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