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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2.03 20:52 수정 : 2012.02.15 15:46

북한을 방문하면 누구라도 국가보안법을 어기지나 않을까 갈등할 수 밖에 없다. 2001년 9월 평양시민들에게 환영받는 평양축전 참관 방북단. <한겨레> 자료사진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②임수경·문규현 사건과 방북 (상)

평양 고려호텔 방에서 육십대 중반의 목사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김 변호사, 여기 다시 오고 싶은데 아무래도 어렵겠지? 내가 자기들 계속 헐뜯고 뭐라 하는 걸 이 방에 숨겨놓은 감시카메라로 다 보았을 테니 말이야.” 2004년 종교인들이 평양에 갔을 때 일이다. 그는 순안비행장에 내리자마자 이랬다. “나라의 얼굴인 공항이 남쪽 시골 기차역만도 못하냐.” 크기나 시설 면에서 대충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전쟁으로 200만명이 죽고 50여년 동안 왕래가 완전히 끊겼던 세월을 생각하면, ‘적의 땅’인 순안비행장에 처음 내리는 순간에는 누구나 만감이 교차하기 마련일 터. 그래도 그는 마치 나무와 돌처럼 꿋꿋했다.

절해도 용서받는 곳, 절하면 큰일나는 곳

그보다 15년 전, 1989년 6월30일 오후 임수경도 그곳에 내렸다. 그때의 감회를 이렇게 적었다. “나는 한쪽 구석으로 가서 푸르기만 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행기 안까지 사람들이 몰려들어 신발 한 짝까지 잃어버리며 겨우 디뎌선 북녘 땅에서 그는 왜 푸르기만 한 하늘을 바라본 걸까. 그리고 종내는 너무나 아파오는 마음을 주체할 길이 없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국가보안법적 상상력은 이 감격과 설움의 순간을 ‘지령을 받고 적국으로 탈출했다’고 멋지게 묘사했다.

나도 2001년 그곳에 처음 내렸을 때 그랬다. 허허벌판에 2층짜리 건물 하나가 단출하고 활주로 멀리로 까만 콜타르 칠한 60년대식 키 작은 전봇대들이 삐뚤빼뚤. 키 작고 이리저리 휘어진 조선 소나무들이 여기저기 듬성듬성 서 있었다. ‘북한’이란 표현은 전혀 어울리지 않고 ‘조선’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풍광이었다. 무언지 가늠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 저 깊은 데서부터 솟구쳐 올라왔다.

2004년 그 목사는 평양 초입에 있는 만수대에서 노골적으로 싫은 마음을 드러냈다. 평양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만수대 김일성 주석 동상에 꽃을 바치고 참배를 하도록 일정이 짜여 있다. 거대한 김 주석 동상 앞에 서자 처음에는 나도 일순 당황하고 별생각이 다 들었다. ‘이거 이러다가 남으로 돌아가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되는 거 아니야?’ 오랫동안 보안법 재판을 해온 나로서도 마음이 흔들렸다. 이게 바로 보안법의 핵심 문제로구나. 살다보면 상대방의 주장에 다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더불어 살기 위해, 아니면 그저 의전이나 예의상으로라도 상대가 존경하는 사람에게 절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걸 보안법이라는 안경을 쓰고 바라보면 적을 찬양하고 고무·동조했다고 몰 수도 있으니 그렇다. 아마도 북을 방문했던 수많은 남쪽 사람들이 순안비행장에서 평양시내로 들어가다가 만수대 동상 앞에서 절하면서 나처럼 갈등했을 것이다.

남에서는 김일성 주석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금수산기념궁전이나 혁명열사릉을 참배하면 이적행위고, 애국열사릉에 갔다 온 사람이 문제없이 넘어가기도 하는 등 누가 정했는지도 알 수 없는 기준이 있었다.

법은 객관적이고 명료해서 애매모호한 구석이 없어야 억울한 사람이 안 생긴다. 그런데 보안법은 그 근본이 우리 편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데 있으니, 이걸 무슨 수로 명료하게 가른다는 건가. 49% 우리 편? 51% 적? 우리하고 무엇이 몇 퍼센트 비슷하면 우리 편인지, 또는 아닌지. 그러다보니 ‘멋진 상상력’은 보안법 운용의 필수조건이다.


혁명열사릉에는 김정일 위원장의 어머니 김정숙과 최용건, 김책, 최현, 오진우 등 김 주석과 항일무장투쟁을 같이 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는 데 공이 있는 사람들이 묻혀 있다. 반면에 애국열사릉은 나라가 세워진 뒤 공적을 인정받은 사람들의 묘지다. 소설 <임꺽정>의 저자인 홍명희, 무용가 최승희,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을 많이 변론했던 허헌 변호사 같은 이들이 거기에 있다. 이 두 곳은 남의 국립묘지인 셈인데 보안법상의 ‘이적성’ 측면에서 보면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보안법적 상상력’은 죽은 사람들 묘지까지도 이리저리 잘도 분류해 놓았었다.

2005년 8·15 민족대축전 행사 때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인 김기남과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등 북 대표단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그들은 ‘조국 광복을 위해 애쓴 순국선열들을 보러 간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곳에 가서는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께 묵념” 하는 구호에 따라 ‘호국영령’, 곧 6·25 참전 전사자들 위패와 무명용사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현충탑에 참배했다. 그들로 보아서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죽이고 죽었던 적 앞에 머리를 숙인 것이었다. 그때 일부에서는 현충원 참배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막아섰다. 전쟁에 대해서 사과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현충원이냐는 논리였지만, 적이었던 망자들에게 머리를 숙인 것은 북의 입장에서는 화해를 위해 통 크게 양보를 한 셈이었다.

만수대에서 적대감 드러낸 뒤
호텔 도청을 의식한 목사 왈
“그래도 다시 올 수 없을까?”

문규현 신부가 체포된 다음날
황인철 변호사가 전화했다
안기부에 함께 접견을 가자고

“당신들은 불법남하했다, 북으로 돌아가라”

임수경은 1989년 8월12일 평양 대성산 기슭에 있는 혁명열사릉에 갔다. 항일 열사들의 묘라는 말에 가게 된 것인데 거기 묻힌 이들에게 고개 숙여 명복을 빈 일도 ‘공산혁명을 찬양하고 대남적화활동을 고무·동조한 것’이라고 처벌받았다.

2004년 그 목사는 버스에 탄 뒤 자신이 동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았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그는 고려호텔에 짐을 풀고 방이며 욕실 벽과 천장에 혹시 감시장치가 숨어 있는 건 아닌지 유심히 살폈다. 하루는 일정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서는 욕실 천장 네모난 패널 일부가 위로 젖혀져 있는 걸 보여주며 이리로 감시원이 침입했던 거라 단정했다. 나중에 같은 방을 썼던 이로부터 자신이 목사님 몰래 욕실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환기가 잘 안되어서 천장 일부를 젖힌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50~60년 세월 상대를 원수 취급하며 살아온 현실을 생각하면 목사의 행동도 그럴 법한 일이다. 그러던 그가 1주일 뒤 남으로 가려고 짐을 싸고 있는 순간에 ‘여기 한번 더 오고 싶다’며 감시원들에게 찍혀서 아마 초청받지 못할 거라고 아쉬워하는 거였다.

그에게 이렇게 농담을 던졌다. “목사님, 좋은 수가 있습니다. 욕실 천장에 감시카메라가 있다고 하시니 그 아래에 서서 ‘수령님 만세’ 하고 외치세요. 감시카메라로 보고 다음에 다시 초청을 해줄지도 몰라요. 다만 저희들 없을 때 하세요. 만세 부르는 걸 보게 되면 남으로 내려가서 신고를 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불고지죄로 나도 처벌받거든요.”

그분만 그런 게 아니었다. 2005년 6·15 남북공동선언 5주년 기념행사가 평양에서 열렸다. 보수 쪽 사람들도 여럿 북을 방문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경상도 보수단체에서 일하는 분도 다시 오고 싶다 했다. 그가 북에 동조하게 되었을 리는 없지만, 그동안 원수 삼고 지내던 북쪽 사람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고 말이 되는 사람들이라는 걸 겪어 알게 된 것이다. 북 역시 남에서 온 사람들과 자주 만날수록 그저 돈밖에 모르고 미국에 영혼을 팔아버린 속물들이라는 식의 편견을 차츰 버려가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북과의 만남 자체에 극도로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2009년 8월 김대중 대통령 서거 때는 북의 애국열사릉에다 묻으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남과 북에서 전쟁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야 이 극단의 미움이 사라지려나.

1989년 8월15일 낮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는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분단 이후 민간인이 공개적으로 그런 것은 그게 처음이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유엔군 소령은 두 사람에게 불법남하했으니 북으로 돌아가라며 만일 남으로 오면 체포하겠다고 경고했다. 임수경은 그에게 여권과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며 이랬다. “내가 대한민국 사람이고 서울 시민인데 왜 당신이 북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냐.”

그는 이 상황을 나중에 이렇게 적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누구의 땅인가. 군사분계선 남쪽 지역마저도 통치영역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존재하는데 하물며 북쪽 지역을 통치영역으로 규정하고 반국가단체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가.’

당시 티브이에서는 문규현 신부가 군사분계선에서 주먹을 휘두르며 미군 철수를 외치던 장면을 반복해서 내보냈다. 이를 지켜보던 어머니는 미사 때마다 성당 친구 할머니들과 ‘문 신부님 무사하게 해주십사’ 하고 열심히 비셨다.

국가보안법의 상상력으론 ‘적국으로 탈출’이었다. 1989년 7월 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석했던 임수경씨. <한겨레> 자료사진

‘데모크레이지’와 변증법, 그리고 민변

당시 교황청 대사로 이반 디아스라는 사람이 와 있었다. 인도 출신의 대주교였는데 신부가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며 문 신부가 허락도 없이 평양에 간 것은 순명하라는 사제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문 신부는 자신이 소속된 인성회 하마오 주교에게 평양에 가기 전에 허락을 구했다. 하마오 주교는 ‘당신처럼 훌륭한 신부와 같이 일하게 되어 기쁘다’며 문 신부 앞에 기다리고 있을 고난의 길을 걱정해 주기까지 했다. 디아스는 이듬해인 1990년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유치원생 수준이고 데모크라시가 아니라 데모크레이지(데모만 하는 미친)”라고 했다가 성당에서 청년 신자들로부터 달걀세례를 받았다. 정작 정치에 간여한 것은 이반 디아스 자신이었다. 이런 인물이 몇 년 뒤에는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직까지 맡았다.

그의 말처럼 ‘지금 여기’ 구체적 삶의 현장에 눈감는 걸 제대로 된 종교라 할 수 있을까. 문 신부는 복음적 가치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고, 영성의 모체는 교회가 아니라 역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임수경과 문규현 두 사람은 판문점에서 체포되어 임수경은 안기부에서, 문규현 신부는 서울시경에서 조사를 받았다. 체포된 다음날인가 황인철 변호사께서 전화를 걸어 왔다. 안기부에 접견을 가자는 것이었다.

그 전해인 1988년 5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이 출범했다. 그때까지는 이돈명, 홍성우, 조준희, 황인철 변호사 등 원로·중견 변호사들의 모임인 ‘정법회’에서 시국사건을 맡아왔다. 1987년 무렵 이양원 변호사의 제안으로 이석태, 윤종현, 이원형, 김갑배, 이경우, 조용환, 유남영, 백승헌, 손광운 등 경력 수년차 젊은 변호사들이 모였다. 한 주도 안 빠지고 열심히 모여서 당시 유행하던 사회과학 세미나를 했다. 보안법적 상상력에서는 이런 공부를, 북쪽에서 한다는 ‘학습’이라 이름지었다. 그 무렵 나는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라는 삼단논법밖에 모르다가 ‘하나에서 둘이 나오고 셋이 나오는’ 변증법의 논리에 눈이 확 트였다. 젊은 변호사들은 변혁운동의 한 부문으로서 변호사운동을 꿈꾸며 ‘청년변호사협회’를 만들었다. 그 얼마 뒤 정법회 선배들의 통합 제의를 받고 격렬한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나는 ‘노인’들과 같이 하면 운신의 폭이 좁아진다는 이유로 통합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표결 끝에 몇 표 차이로 통합이 결정되었다.

이제는 그때의 나처럼 후배들이 나를 ‘노인’으로 여기겠거니….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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