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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1월 양평 일가족 생매장 사건 현장인 양평군 싸리봉 아래 산골짜기에서 범인 오태환(왼쪽)이 여아를 대신한 인형을 구덩이에 생매장하는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사진출처 91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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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③ 범죄와의 전쟁: 양평 생매장 사건(상)
‘며칠 동안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이란 소설을 봤어요. 절망 중에 있는 주인공 남자를 애정을 갖고 도와주는 변호사가 나오는 대목이 있는데, 벌써 3년 전인가요? 그때의 선생님을 생각하게 되었고 가슴이 짠하더군요.
어떻게 지내세요?
어젯밤엔 정말 오랜만에 밤하늘을 봤는데 별이, 어쩜 별이 그렇게도 생소하든지, 깜짝 놀랐어요.’
청주여자교도소에서 온 그녀의 첫 편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 앞에는 94.1.15자 소인이 찍힌 이 편지를 시작으로 그 뒤에 보내온 편지들이 잔뜩 쌓여 있다.
갑자기 창밖에 눈발이 마구 흩날린다. 순식간에 천지 사이가 날리는 눈들로 하얗다.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하늘에서 인사라도 보내고 있는 걸까. 그녀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부슬비가 내리던 안개 낀 그날 오후…
1990년 11월9일 양평 모곡 유원지 근처. 초겨울 나무들은 잎을 다 떨구었다. 검은 몸을 앙상하게 드러낸 채 마치 군인들이 열병식이나 하듯이 산비탈과 능선을 따라 줄지어 서 있었다. 인적이 거의 끊긴 산길에는 부슬부슬 겨울비가 내리고 안개가 스멀스멀 돌아다녔다. 오후 1시인데도 앞이 뿌옇게 잘 보이지 않았다. 서른한살 동갑내기 남자 셋에, 스물한살 여자 하나를 태운 쏘나타 차가 이 한적한 산길을 올랐다. 그러다 갑자기, 마침 옆을 스쳐 지나가던 와인 빛깔 쏘나타 차를 쫓아가 앞을 가로막았다. 차 유리창으로 비와 안개가 흘러 운전하는 남자 한 명만 타고 있는 걸로 보였다. 이성준과 윤용필은 차에서 내려 상대방 차로 옮겨 탔다. 그리고 두 대의 차는 가파르고 높은 곳에 있는 나무들을 돌보려고 내놓은 좁다란 임도를 따라 2, 3킬로미터를 더 들어갔다. 계절로 보나 길로 보나 정말로 아무도 올 이 없는 으슥하고 한적한 데였다. 여자는 이성준이 갑자기 다른 차를 납치하는 걸 보고 너무 놀라고 겁이 났다. 하지만 이를 말릴 방법도 없고 엄두도 나지 않아 결국 시키는 대로 차에서 내려 40여미터 뒤 길모퉁이를 돌아가 기다렸다. 그사이 이성준, 윤용필, 오태환은 상대 차를 운전하던 남자와 뒷자리에 있던 두 할머니를 꽁꽁 묶어 두 대의 차 트렁크에 나누어 싣고, 남자의 다섯살짜리 손녀는 현장에서 떨어져 있던 여자에게 맡겼다. 그 뒤 세 사람은 차로 임도 2.5킬로미터 거리를 오가며 두 시간 반 동안 두 할머니를 계곡 아래로 떠밀고, 남자의 목을 조르고, 어린아이를 산 채로 매장했다. 오, 하느님…. 세 사람 모두 대마초를 피운 환각 상태였다. 이 상황을 보지 못한 여자는 이들이 강도질을 하고 있는 걸로 알았다. 돌아온 세 사람에게 여러 차례 “아이와 할아버지(운전하던 남자)는 어쨌느냐”고 물었다. 이들은 “나무에 묶어 두었다”고 둘러댔다. 그날 밤 날이 갑자기 추워지자 여자는 오태환에게 다시 물었다. “이 추위에 얼어 죽으면 어떻게 해요.” “바보 같은 소리 마. 한 한 시간쯤 걸리면 묶은 것 풀고 나올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어떻게 사람을 죽게 할 수가 있냐.” 또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날 부슬비와 안개 낀 산골에서 여자는 살아서는 도저히 헤어 나올 길이 없는 깊은 늪에 빠졌다. 그 석 달 전인 8월, 스물한살 여자는 실연을 당했다. 여행사에 다니면서 일요일이면 주일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녀였다. 양가 부모 인사까지 마친 터에 상대방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 친한 친구가 다 잊으라면서 젊은이들이 모이는 나이트에 끌고 갔다.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도저히 조명 번쩍이는 그 자리에 더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오는데 남자가 쫓아왔다. 키가 훤칠하고 얼굴이 희고 단정해 보였다. 길거리에서 빨간 장미꽃다발을 사 들고 집까지 따라왔다. 얼마 뒤에는 여자 아버지에게 결혼하겠다며 인사까지 드렸다. 유복한 집안 셋째 아들이고 레스토랑을 경영한다고 속였다. 이성준이었다. 그는 여자와 결혼하려면 돈이 필요하므로 궁리 끝에 막다른 길을 선택한 걸로 여겨진다. 택시운전을 하던 윤용필과 자동차등록소에서 일하던 오태환을 꼬드겨 냈다. 이들 세 사람은 10월 말에 강릉에 갔다. 저녁에 경포대에 놀러 왔던 신혼부부를 납치해 돈과 반지, 카메라를 빼앗고 두 사람을 나무에 꽁꽁 묶어 놓았다. 이게 당시 떠들썩했던 ‘강릉 신혼부부 납치사건’이다. 이성준은 신혼부부가 타고 온 엑셀 차에 오태환의 자동차 검사증을 던져 놓았다. 며칠 전 오태환 때문에 이성준 자신에게 전과가 있는 걸 여자가 알게 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오태환이 잡히면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 분명한데도 그랬다. 이성준은 주변에 있는 모든 이에게 재앙이었던 셈이다. 그 무렵 여자는 이성준이 불같은 성격에다 차츰 말과 행동에서 처음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을 보이므로 헤어지려 했고, 수면제까지 먹었다. 강릉사건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이성준의 머릿속에는 여자 이외에 다른 아무런 생각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양평 모곡 유원지 산속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여자가 모르게 철저히 따돌렸다. 그가 정말로 여자를 보호하려 했다면 아예 그런 자리에 데리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 어쩌면 그는 마음 한구석 자포자기 상태에서 ‘마지막 동행’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오 하느님, 셋은 환각 상태였다
여아를 산 채로 묻어버렸다
분노가 이성을 덮기 시작했다 주범은 총에 맞아 죽었다
상황 모른 채 끌려다닌 여자는
체포를 돕고도 ‘공범’으로 경찰의 발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죽음 그 끔찍한 11월9일 저녁 그들은 모곡 유원지를 떠나 다음날 대전에 도착했다. 경찰은 신혼부부 차에서 오태환의 자동차 검사증을 보고 이들 세 사람을 강릉 신혼부부 강도사건 용의자로 수배했다. 여자가 이성준과 같이 있는 걸 알고 여자의 오빠와 친한 친구에게도 미리 이 사실을 귀띔해 두었다. 여자는 대전에서 감시하러 뒤따라오는 오태환을 떼어 놓고 친구 집에 갔다. 그리고 넋이 나간 얼굴로 “저 사람들이 지리산 같이 가자는데 너무 무서워. 제발 나 좀 도와줘”라 했다. 여자가 알려준 위치에 경찰이 출동했다.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큰길이었는데 경찰이 포위하자 세 사람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윤용필만 현장에서 바로 잡히고 오태환은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다가 뒤쫓아간 여자의 오빠에게 붙잡혔다. 이성준은 차를 몰고 도망쳤고 경찰은 그를 향해 총을 여러 발 쏘았다. 이성준은 결국 죽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는 총을 맞은 상태에서도 피를 흘리며 계속 차를 몰고 도망가다가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건물 옥상에 올라가 숨을 거두었다. 이 모든 일들의 마지막 책임을 져야 할 이성준이 죽은 것은 남은 세 사람에게는 커다란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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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0월 ‘범죄와의 전쟁’ 선포 이후 경찰은 모든 강력범 일제 검문검색을 위해 외근 경찰관들에게 권총과 실탄을 지급했다.(왼쪽) 시위현장에선 ‘공격적인 시위진압’ 방침이 떨어졌다. ‘백골단’이 거칠게 시위대를 끌어내고 있다.(오른쪽) 91보도사진연감,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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