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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4일 수원 법정에서 열린 양평 생매장 사건 첫 재판. 방송카메라가 법정 안까지 들어왔다. ‘범죄와의 전쟁’ 첫 사건이니 국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의도였다. 문화방송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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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③ 범죄와의 전쟁: 양평 생매장 사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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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뒤 그녀는 감옥에서 “절망”이란 글을 보내왔다.
“이 구차한 삶이여. 그냥 그때 죽었어야 할 것을. 강도짓 하는 데 공모하여 망을 보고 일가족을 무참히 묻어 죽였노라고 인정하므로 나도 그들처럼 사형당해 죽었어야 할 것을.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남아 품고 있기에 숨 막히는 ‘주홍글씨’의 억눌림이여. 무슨 수로 내 속을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살아있어야 할 의무를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운명처럼 살아있는 것이라고. 그래도 구차하기는 마찬가지인 삶.
아 그리운 평범이여. 스물일곱의 평범함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꽃잎의 떨림에도 가슴 팔랑이던 소녀에서 모성으로 성숙되는 여인의 평범함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 돌아라. 끊임없이 돌아라. 윤회의 삶이여. 누명은 누명인 채로, 절망은 절망인 채로, 가슴에 품자. 품어서 소멸될 업이라면 한없이 품어서 내생에는 지독히도 평범한 구차하지 않은 아니, 적당히만 구차한 삶으로 살고 싶어라.”
검사의 걸작 논고 “재판도 필요없어” 1990년 12월4일. 범행 한 달도 안 되어서 첫 재판이 열렸다. 여자는 착하고 영리해 보이는 커다란 눈에, 아직 앳된 여고생 티가 남아 있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도저히 현실이라 믿기지 않는 듯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어린 여자보고 이를 감당하라 하는 건 너무 가혹했다. 그날 아침 나는 수원 법정에 10시20분쯤 들어섰다. 보통 이렇게 크고 복잡한 사건은 심리를 맨 뒤로 미루고 다른 사건들부터 진행해 왔다. 그래서 윤용필, 오태환의 국선변호를 맡은 변호사와 10시30분에 출석하기로 약속을 해 놓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법정에 들어선 나는 너무 놀랐다. 판사들이 앉은 법대 뒤에서 텔레비전 방송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데다 변호사들도 참석하지 않았는데 이미 재판을 시작해서 인정신문과 검사 주신문까지 다 끝났다는 게 아닌가? 어떤 재판에서도 티브이 카메라가 법정 안에까지 들어간 예는 없었다.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 재판 때도 법정 스케치가 영상을 대신했다. 그런데 카메라들이 판사석에까지 올라가다니… ‘범죄와의 전쟁’ 첫 사건이니 국민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한 의도였다. 법정에서 TV 카메라가 돌았다
변호인 없이 재판이 시작됐다
공판조서는 거짓투성이였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이 사건은 변호인 없이는 법정 자체가 열릴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검사 신문까지 다 끝냈다. 진행된 절차는 당연히 위법이고 무효였다. 재판부는 대통령의 주문에 적극 호응해서 기자들을 다 불러 놓고는 변호인들이 오지 않자 그대로 재판을 강행한 거였다. 아마도 너무나 뻔한 사건이고 모든 국민들이 이 사건에 대해서 분개하고 있으니, 그렇게 해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을 거라고 가볍게 생각한 듯했다. 하지만 이건 사법부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행동이었다. 재판장은 국선변호인과 내가 출석하자, 국선변호인에게 윤용필, 오태환에 대한 반대신문을 하게 했다. 나는 즉각 이의했다. ‘앞의 진행은 법적으로 무효다. 변호인들은 피고인들이 검사 주신문 때 무어라 대답했는지도 들어보지 못했다. 처음부터 다시 진행하라.’ 재판장은 내 요구를 묵살하더니 여자에 대한 반대신문만 1주일 뒤에 하겠다며 두 피고인들에 대해서는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고 2주 뒤로 선고일을 잡았다. 검사의 논고가 걸작이었다. “본건을 철저히 그리고 신속히 심리해 주신 재판부의 노고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며… 이러한 피고인들을 위하여 과연 우리가 이러한 재판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인지 감히 반문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흉악범죄라지만 사건이 일어나고 한 달 남짓 만에 1심 선고까지 다 마친다고? 재판절차도 필요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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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감옥에서 한 땀 한 땀 수놓아 보내준 시골 초가 그림. 교도소에서 그려 전국자수대회에서 입선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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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과에서 문학을 배웠다
그리고 암이 찾아왔다 무엇보다도 여자가 강도살인에 공모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정황이 있었다. 범행 전날 밤 이들은 범행현장 인근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었고 범행 도중에도 시신을 매장하려고 삽을 빌려갔다. 11월8일 밤 민박집 할머니는 숙박비 4만원을 선불해달라고 했다. 일행은 돈이 없었고 여자가 내일 인근 마을 농협에 가서 찾아다 주겠다며,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의 이름과 대전 집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전날 차 안에서 강도살인 모의하는 걸 들었고, 대상을 물색하기 위해 그곳에 간 거였다면 여자로서는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선뜻 적어 줄 리가 절대로 없었다. 마침 할머니의 딸과 민박 주인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 1심 재판 때 딸을 증인으로 신청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자의 공모 여부를 판단하는 데 이 정황은 매우 중요하다. 항소심에서 검사 쪽 증인으로 나온 할머니는 거짓말을 했다. 당시 딸도, 민박집 주인도 없었으며 여자가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준 사실도 절대 없었노라고. 나와 재판장이 계속 추궁을 하자 마지못해 주인은 있었다고 번복을 했다. 다음 재판 때 결국 딸이 나와서 여자로부터 이름과 전화번호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리고 차 다니는 길에서 2, 3킬로미터나 떨어져 올 이도 갈 이도 없는 그 깊은 산중에서 여자가 무슨 망을 어떻게 본다는 것인지. 항소심은 여자가 ‘강도살인의 공모에 가담하였다고 볼 수 있을지 애매한 점이 많다’면서도 유죄를 인정하고 형량만 징역 10년으로 낮추었다. “오늘 나는 봄길을 걸어봅니다” 다 죽었다. 겨울비와 뿌연 안개 스멀대던 인적 끊긴 산속에서 어린 서연이와 할아버지 그리고 두 할머니가 죽었다. 이성준은 총에 맞은 채 도망가다 죽었다. 윤용필은 ‘이 쓸모없는 하찮은 목숨에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라며 장기를 기증하고 갔다. 그 노모는 아들 시신을 인수하는 자리에서 혼절했다. 오태환은 자신이 여론에 떠밀려 과도한 형을 받았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억울해했다. 그는 용인 사형수 묘역 한구석에 묻혔다. 여자는 20대 청춘을 감옥에서 보냈다. 동료와 교도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또 그들에게 사랑을 주었다. 1999년 초봄, 8년여 만에 가석방으로 나왔다. 열심히 공부해서, 들어가기 힘들다는 서울예전 문창과에 가서 어릴 적 꿈이던 문학을 배웠다.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에서 당선 바로 아래 자리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암으로, 고단했던 33년 짧은 삶을 마쳤다. 내 방에는 여자가 감옥에서 한 땀 한 땀 수놓은 시골 초가 그림이 걸려 있다. 지금 내 책상 위에 흩어져 있는 소설이며 시 초고들, 그리고 감옥에서 보내온 편지들이 그녀가 여기 살다 간 흔적의 전부다. 2001년 3월21일 보낸 엽서에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햇볕 아래 모든 것은 감출 수 없다는 듯, 사물이건, 사람이건, 나무건 꽃이건, 모종의 병을 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름하여 노출증. 오늘 나는 봄길을 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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