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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4.13 19:22 수정 : 2012.04.14 18:13

1990년 3월 서울 돈암동과 동소문동 재개발지구 세입자들이 철거에 대비해 마을 진입로에 자동차 타이어를 엮어 만든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⑦ 서울 달동네 재개발 사건(상)

1·4후퇴 때 평양에서 혈혈단신, 맨주먹으로 피난 내려온 아버지. 어찌어찌해서 같은 고향 출신 색시도 얻고 1960년대 초 동대문 밖 창신초등학교 뒤에 양옥집도 지었다. 그 집 지을 때, 손이 있을 자리에 반짝반짝 은빛 나는 쇠갈고리 끼우고 목발 짚은 6·25 상이용사들이 종종 들이닥쳤다. 마치 구청 직원이라도 되는 양 무허가 운운하며 돈을 뜯어갔다. 엄연히 허가받고 짓는 집인데 경찰도 찾아왔다. 참다못한 어머니가 ‘우리 시아주버님이 시경 경무관’이라고 넌지시 이르자, “아, 진작 말씀하시지. 앞으론 아무도 얼씬 못하게 하겠습니다.” 이러곤 경례까지 붙이고 갔더란다.

말이 양옥집이지 겨우 30평 남짓 벽돌 쌓고 기와 올린, 방 3개에 내가 좋아하던 다락방이 있는 조그만 집이었다. 그래도 우리 집 바로 위 창신동 산동네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하꼬방’들에 비하면 양옥집은 양옥집이었다. 그 산동네 아이들이 하도 많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니 1학년이 20반까지 있었고 한 반에 100명, 생일이 늦은 나는 번호가 91번쯤 되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선생님들에게 방을 세주어, 방 하나에 식구들이 오글오글 함께 살기는 세든 쪽이나 집주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때는 셋방을 살았다. 일자로 지은 ‘브로크’(시멘트블록)집에 무려 일곱가구가 방 하나씩에 들어 살았는데 재래식 변소가 하나여서 30여명이 줄을 섰다. 밤이나 낮이나 대문은 아예 열어 놓고 살았다. 아직도 가끔 그때 꿈을 꾼다.

화려한 강남신화 뒤 서민들의 눈물
1970, 80년대 서울의 주거환경은 대충 내가 겪은 이 두 경우와 비슷했다. 자기 집 가진 가구가 반이 안 되었고 집주인이나 세입자나 사는 형편은 거기서 거기였다. 1960년대부터 수백만명의 시골사람들이 서울로 흘러들어와 값싼 노동력으로 경제개발의 밑거름이 되었고, 정부는 저임금을 유지하려고 농촌 쌀값도 붙들어 맸다. 저임금과 저곡가. 지금 저 화려한 강남신화는 이런 서민들의 이중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울시 통계로도 1988년 무렵 저소득층 집단거주지역은 105곳이고 400가구 이상 사는 대규모 지역도 33곳에 이르렀다. 대략 40만가구, 200만명가량이 ‘달동네’에 살았다. 그래서 그 지역에 국가적 차원에서 재개발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1980, 90년대는 달동네 사람들 수난시대였다. 그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사당동, 상계동, 목동, 돈암동, 동소문동, 도원동, 전농동, 봉천동… 지금은 화려한 고층 아파트들이 수없이 늘어서 있지만 그 자리에서 참 많은 사람들이 죽고, 얻어맞아 다치고, 감옥에 갔다. 이런 일들에 이리저리 간여했던 나는 그 슬픈 일들을 일일이 다 기억해내기도 괴롭다.

1988년 초 어느 여름날 밤, 돈암동 산동네 ‘너른 마당’에 동네 사람들 수백명이 모였다. 재벌급 부자들이 모여 사는 성북동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 조금 내려오다 보면 어려운 이웃들 3000여가구가 모여 사는 서울에서 제일 큰 달동네가 나온다. 그 동네에는 골목길들이 수없이 실핏줄처럼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닥지닥지 붙어 있는 작은 집들은 그 좁은 공간을 기가 막히게 활용하고 있어서 일류 건축가들이 아무리 애를 써도 그대로 재현하기 어려울 법했다. 이건 그대로 보존하면 영화 찍고 관광객 불러 모으기엔 그만이었다.

그 달동네 공터 너른 마당에서는 저 건너 남산타워 조명을 필두로 서울 시내 야경이 환하게 다 내려다보였다. 나무 침상에선 아이들이 수박을 먹고 있었고 그 엄마, 아버지들이 모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청 터지게, 절박하게 불러댔다. 책상머리를 아직 못 벗어난 나도 그때 저 아래 서울 시내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주먹 휘둘러 가며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쳤다. 그러곤 무어라고 나도 실감을 잘 못하는 연설을 했다.

아마도 이랬던 것 같다. ‘단결만이 여러분 살길입니다. 왜냐, 어차피 법으로 가면 임차기간이 다 지나갔기 때문에 집을 비워 주어야 합니다. 시유지 같은 남의 땅에 방 두세 개짜리 판잣집 짓고 살면서 주인이나 세입자나 방 한 칸씩 쓰고 살다가 이제 재개발이 되니 건물주라는 이유로 아파트 분양권 받고 세입자들은 수십년 살아온 동네를 그냥 쫓겨나는 건 우리 헌법정신에 반합니다. 민법으론 지지만 헌법으론 우리가 이깁니다.’

1990년 1월의 어느날, 석유 1통을 이웃과 나누고 있는 서울 돈암동 재개발지역 주민들. <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여름 돈암동 재개발
세입자는 빈손으로 내몰렸고
분양대금을 못낸 집주인은
헐값에 분양권을 팔고 떠났다
투기꾼·건설사만 수천억을 벌었다

2년간 투쟁과 구속이 있고서야
세입자들 숙원이 이뤄졌다
영구임대주택과 임시 주거촌
하지만 이 승리가 다른 철거지에도
자동적으로 보장된 건 아니었다

집주인과 세입자들, 이웃이 원수로
돈암동 재개발 지역은 국공유지가 2만5000평가량 포함되어 있었는데 당국은 국공유지를 평당 30만원씩 불하해 주었다. 시가가 평당 100만원가량 되었으니 조합 쪽은 가만히 앉아서 175억원이라는, 당시 화폐가치로 볼 때 막대한 시세차익을 얻는 거였다.

당시 그 지역 아파트 재개발로 조합과 건설사가 얻는 이익은 수천억원대로 추정되었다. 이 이익 중 건설사 정상수익 수백억원을 제하고 남는 나머지 대부분 이익은 정부가 재개발 지정을 함으로써 생긴 것이므로 조합, 세입자, 건설사가 적절하게 나누는 게 헌법정신에 맞는다. 민법상 집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명도소송을 할 게 아니라 이익의 극히 일부를 세입자들에게 돌리면 문제는 공정하게 해결되는 거였다.

사실 재개발 이전에는 집주인과 세입자들이 같이 두레를 이루어 건축일 다니고, 없으면 서로 나눠 쓰고 도우며 지내왔다. 그런데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서로 원수가 되었다. 집주인들은 어차피 추가로 내야 할 분양대금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분양권을 내다 팔았다. 조합은 원가옥주는 거의 없고 매수인인 투기꾼들로 구성되었다. 조합은 원가옥주들을 시켜서 남아 있던 수백가구 세입자들 앞으로 명도소송을 걸어왔다. 세입자들을 분열시키려는 시도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조합에서는 세입자들에게 방 한 칸 특별분양권을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24평짜리 국민주택의 방 한 칸 입주금이 1000만원이어서 그림의 떡이었다. 설령 그 돈을 마련한다 해도 한 가구 평균 4명인 세 집 12명이 24평 아파트 하나를 같이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입자 대책위원회는 영구임대주택과 가수용 단지 건립을 요구했다.

‘세입자 일동’ 명의로 이런 유인물이 뿌려졌다. “지금까지 협상이 타결되지 못한 이유는 순전히 이태교 세대위 위원장의 엉뚱한 생각(세입자들을 이용하여 폭력 유혈사태를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이태교씨가 투쟁의 영웅이 되어 시의회 의원이 되어 보겠다는 교활한 야심) 때문입니다. 꼭 6·25 때 공산당의 행동과 똑같지 않습니까. 세입자 다수의 뜻을 받들어 이태교 일파와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용기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단 말입니까.”

먼 길을 돌아갔다. 그 뒤 2년여 동안 이태교 위원장 등 세입자들 10여명이 구속되어 1, 2년씩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다.

세대위 부위원장 정상율은 어느 날 집주인이 행패를 부린다는 연락을 받고 세입자 아주머니를 도우러 갔다가 전 집주인이 휘두른 칼에 가슴을 찔려 그 자리에서 죽었다. “나 심장 찔려서 바로 죽을 것 같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그는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 하나 죽어 이놈의 철거를 막을 수 있다면 죽겠다. 내가 싸우다 죽으면 돈암동 사거리에서 노제를 치러 달라.” 그가 정말 자신이 죽을 거라 생각했을까. 아마도 아니지 싶다. 너무 화가 나서 한번 해 본 소리였겠지. 그런데 그는 정말로 죽었다. 그것도 수백, 수천억원 이익을 모두 가져간 조합과 건설사가 아닌, 한동네 사람 칼에 죽었다. 재개발 고시 무렵 600만원 하던 집은 수차례의 전매를 거쳐 2년 뒤에는 1억2000만원까지 올랐다. 원래 살던 가옥주들은 기껏해야 2000, 3000만원에 팔고 나간 뒤였다. 나중에 완공된 아파트에 입주한 원가옥주는 1600명 중 10%에 못 미치는 150가구에 불과했다.

세대위 간부의 죽음과 핵심 멤버들의 배신
칼을 휘두른 집주인도 3150만원에 집을 판 뒤, 매수인인 복부인이 세입자를 빨리 내보내지 않으면 잔금 550만원을 못 준다고 하자 술을 마시고 시장에 가서 30㎝ 식칼을 사 가지고 와서 자기 집 세입자도 아니고 말리러 온 동네 사람을 찔렀다. 이익은 80, 90년대를 휩쓸던 투기꾼 복부인들이 다 가져가고, 원래 한동네에 오순도순 살던 가난뱅이 집주인과 세입자들끼리 서로 죽이고 죽었다.

그 복부인들은 지금 강남 타워팰리스에 살면서 자식들 외고에 보내 판검사 만들고, 집값 떨어질세라 공직자, 언론사 임원들인 남편들 닦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 사회 상류층을 자처하며 목소리 높이는 이들의 그리 오래되지 않은 너절한 과거는 바로 여기 달동네다.

그 동네에서 잡혀간 세입자들 형사재판 변론하고, 수백건 명도소송들 시간 끌어주고, 철거 깡패들 고소하고, 손해배상 청구하고… 그때 덕수궁 뒤에 있던 서울지방법원 마당에는 이 많은 재판 방청하러 돈암동 산동네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오갔다.

88, 89년 두 해는 그렇게 돈암동과 함께 보냈다.

그 와중에 정말 기가 막히고 슬펐던 순간. 바로 어제까지 세입자들과 울고 웃으며 고난을 같이하고, 머리 맞대고 대책을 논의하던 세대위 핵심 몇 사람이 저쪽 편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재판 준비하러 수도 없이 우리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이렇게 세대위 일을 하다가 감옥까지 갔다 왔는데도 그랬다. 빈집 철거와 아파트 베란다 새시 공사 시공권이 그 대가였다는 소리도 들렸다. 어차피 철거민 싸움은 비밀이 있을 수 없긴 했다. 많은 주민들 중 그 누구 한 사람이라도 언제라도 반대로 돌아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핵심 성원이 조합편에 넘어갔다니 한동안은 막막했다. 아, 우리가 무슨 소리를 했고 어떻게 나올지 저들이 다 알겠구나. 정말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지금쯤은 그들을 한번 만나 보고도 싶다. 만나서 그동안 잘 지냈는지 안부도 묻고 술도 한잔하고 그 속내도 듣고 싶다.

1990년 봄, 그 많은 돈암동 산동네 사람들의 몇 년에 걸친 고통과 눈물, 감옥살이, 그리고 목숨을 바친 대가로 마침내 철거민 투쟁 사상 처음으로 두 가지 숙원이 이루어졌다. 조합과 건설사가 세입자들에게 영구임대주택을 지어주고, 그동안 살 수 있도록 가수용 단지를 만들어 주는 데 합의했다. 합의에는 세입자대책위원회와 재개발조합, 건설사, 서울시장 고건, 성북구청, 이렇게 5자가 참여했다. 1990년 4월 법무법인 덕수에서 공증을 하고 나는 그 공증서에 서명을 했다. 만세!

정말 기쁜 날이었다. 달동네에서 잔치가 열렸다. 막걸리에다 닭 잡고 돼지 삶고 춤추고 노래했다. 이런 날도 오는구나.

하지만 이 첫 승리가 다른 철거 지역에서도 자동적으로 보장된 건 아니었다. 다른 세대위에 기댈 언덕이 된 것은 틀림없었지만 그래도 매번 싸움 없이 거저 얻어진 곳은 없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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