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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총 21명을 엽기적으로 연쇄살해한 유영철이 시신을 암매장한 서울 봉원사 계곡에서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2005년 6월 대법원은 그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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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⑭ 사형제 위헌심판(하)
처참한 살인 현장을 본 사람은 사형존치론자가 되고, 처연한 사형집행을 목격한 사람은 사형폐지론자가 된다.
남쪽 바다에 놀러 갔다가 노인에게 터무니없는 죽음을 맞은 스무살 안팎의 청춘들과 그 가족들 고통은 사형제 위헌 여부 논란의 가장 아픈 속 상처였다.
유영철에 의해 큰형을 잃은 안아무개는 불행이 꼬리를 물었다. 둘째 형은 자살했고 막내 동생은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세상을 떴다. 네 형제 중 홀로 남게 된 그는 일부러 죄짓고 구치소에 가서 유영철을 죽이고 말겠다고 별렀다. 그는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극도로 미워했다.
유가족들의 한, 분노, 상처 또는 용서
유영철에게 팔순 노모와 육순 처, 그리고 3대 독자 아들을 한꺼번에 잃은 60대 노인 고정원은 이렇게 썼다.
‘왜 우리 가족을 죽였는가, 왜? 둔기로 머리를 쳐서 어머니는 눈이 빠져나오고, 아내는 아침에 먹은 해장국이 전부 토해져 있었어요. 범인을 잡아서 찢어 죽이고 싶었는데… 막상 범인이 잡히고 나니까 저도 알 수 없는 마음의 변화가 일었어요. 가족의 죽음을 똑같은 죽음으로 되갚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의문이 들었어요.… 다른 분들, 그로부터 피해를 보신 가족들이 나를 보면 저 정신 나간 또라이 같은 짓을 한다고, 왜 자기 부모, 처자 죽인 놈을 용서하느냐고 책망할지 모릅니다.… 애비인 나는 범인을 용서하고, 자식인 두 딸은 나와 수녀님, 유영철을 미워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죠. 흉악범을 용서하는 게 사회적으로 정상이 아닌 걸로 비치다 보니 남은 가족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건가 봐요. 외국도 그렇다더군요. 하지만 어쩔 겁니까. 길이 서로 달라 그렇겠거니 하고 기다릴 수밖에요.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있는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고정원은 유영철 사건 재판부에 “판사님, 절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하고 편지를 썼다.
그는 천주교 주교회의 사형폐지 소위원회 초청으로 온 영화 <데드 맨 워킹>의 실제 주인공 수녀도 만났고, 미국 살인피해자가족모임(MVFHR) 대표도 만났다. 이 모임은 미국 내 테러나 살인 등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모여 사형폐지운동을 벌이고 있다. 회원이 5천명이나 되는 이 단체는 이렇게 외친다.
‘우리 유가족 이름으로 사형? 안 돼!’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국 55개 검찰청 산하에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개설되어 있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와 천주교 사형폐지 소위원회 등 일부 종교단체들이 피해자 가족들을 돕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 사형폐지는 대안인 절대적 종신형제도의 도입과 살인 피해자 가족들을 돕는 사회적 부조 체계가 함께해야 가능한 일로 보인다.
‘막상 범인이 잡히고 나니 마음의 변화가 일었어요
죽음으로 되갚는 게 온당한지
절 또라이로 책망해도
유가족 이름의 사형은 안돼요’ 지금은 열렬한 극우파 대표 논객이 되어 있지만 1980년대 초 나는 조갑제 기자 기사들을 열심히 읽었다. <뿌리 깊은 나무> 잡지 시절 그의 글은 참 좋았다. 나는 나중에 그가 쓴 ‘사형집행의 실제와 억울하다는 유언’이라는 글을 읽고 충격을 받아 사형폐지 쪽으로 전향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1997년 12월30일 김영삼 정권이 23명을 마지막으로 집행할 때까지 총 920명이 사형을 당했다. 대략 1년에 18명꼴이다. 그 글을 보면 교도관들은 사형집행관으로 차출되는 걸 피하려고 별수를 다 썼단다. 심지어 사표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사형집행 당일 해당자에게는 에둘러 이렇게 집행을 통고한다. “하느님께 영광 돌리자.” “극락에 가도록 하자.” 참 말이 좋지. 무슨 영광이고 무슨 극락이었겠는가. 미리 찬송가를 1절만 부르기로 약속을 하지만 사형수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더 벌려고 2절, 3절로 넘어가면, 이는 거기 있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이들에게는 국가가 사실상 살인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으니 이것도 사형을 그만두어야 할 논거 중 하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열렬하게 사형을 없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사형집행인들이다.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직접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이 초짜 신부이던 시절, 사형집행을 하는 데 입회하게 되었다. 최월갑이란 사형수였는데 천주교 묘지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목에 밧줄을 걸었다. 마루청이 꺼지고 공중에 매달렸는데 잠시 후 “꽝” 소리가 나서 살펴보니 교수대 나무가 부러져 사형수가 아래로 추락한 거였다. 그는 간수들이 사형대 고치는 걸 지켜보다가 머리와 얼굴에 피가 묻은 채 당신을 보고 히죽 웃더라는 거였다. ‘반 시간 뒤엔 천당에 가 있겠네요’ 하며 두번째 죽음도 편안히 받아들이던 월갑이의 마지막 모습을 영 잊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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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족 3명을 살해한 유영철의 사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탄원한 고정원(왼쪽)씨와 ‘사형수의 대모’로 알려진 조성애 수녀가 2006년 2월 만나 이야기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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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인도받은 범죄인에겐
사형집행을 할 수가 없다
조약은 국내법과 동일 효력이다
국내서 잡힌 이들도 사형 안된다 헌재는 공개변론을 한번 열었다. 그리고 2010년 2월, 재판관 5 대 4로 사형 합헌 결정을 내렸다. 헌법 평등의 원칙 주장에 대해서는 아무 판단도 하지 않았다. 결과에 대해 아주 많이 아쉬웠고, 모든 이들이 맥이 빠졌다. 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로구나. 그래도 합헌 쪽에 손을 든 재판관 2명이 국회에서 폐지를 검토해보라는 의견을 덧붙여, 사실상은 재판관 9명 중 6명이 현 사형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본 셈이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번 19대 국회에서 절대적 종신형제도 도입을 대안으로 하는 사형폐지 법안을 꼭 통과시키려고 신발 끈을 고쳐 맸다. 새누리당 정의화, 민주당 유인태, 진보당 노회찬 의원이 각 당 폐지법안 발의 대표로 나섰다. 보성 어부 노인은 2010년 결국 사형이 확정되었다. 현재 59명의 사형수가 감옥에 있다. 몇해 전, 잊을 만하면 다시 터지곤 하는 연쇄살인 사건으로 감옥 안이 뒤숭숭하던 시절. 십수년째 감옥에 있는 사형수로부터 사형이 집행될까 걱정하는 편지를 받았다. ‘변호사님,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살겠습니다.’ 헌법 제10조를 풀어서 이리 답글을 보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천 개의 강을 비추듯이,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무어라 부를 수도 없는 커다란 달이 하나 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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