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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원이 가리키는 잘려나간 커튼줄(조종끈). 검사는 커튼줄을 범인이 범행 도구로 잘라 써서 그렇게 됐다고 주장했다. 아래 사진은 경찰이 국과수에 보내기 위해 잘라냈다는 커튼줄. 매듭이 5개인데 맨 오른쪽 위 동그라미 속은, 검사가 “남자가 목을 조르는 데 쓰려고 줄을 끊었고 그때 잘린 끝이 그 뒤 발생한 화재의 화염으로 열변형이 되었다며 국과수의 감정을 받았다”는 부분이다. 그러나 아래 사진의 커튼줄을 위 사진의 잘린 커튼줄에 연결하니 정상적인 커튼줄 모양으로 돌아갔다. 범행에 사용됐다는 커튼줄은 애시당초 없었다는 거였다. 한 편의 코미디였다. 김형태 변호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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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21)…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4)
남자가 처와 언쟁을 하다가어느 결에 가위로 줄을 끊고
다시 세가닥 줄 매듭을 풀어
한 줄로 처의 목을 졸랐다고?
처의 목엔 매듭 자국도 없었다
부엌 개수대의 미역국 냄비…
전날 저녁 다 세척했고
다음날 아침 먹기 전에 죽었다면
미역국 냄비는 왜 씻지 않은 채
그대로 개수대 안에 있는가 “애기는 가끔 웃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제 방에 애기 사진도 있는데 요즈음은 통 안 나타나요. 보고 싶은데… 집사람은 굉장히 슬픈 얼굴로 지난주까지는 보였는데 이번주에는 전혀 나타나질 않고. 저는 단지 친구 잃은 것처럼 계속 보고만 싶고 그래요.” 처와 어린 딸을 잃고 달포쯤 지나서, 남자는 한 스님과 통화하면서 이리 꿈 얘기를 했다. 경찰은 사건 난 후부터 9월에 남자를 구속할 때까지 석달 동안 계속해서 전화 감청을 했다. 그 기록에서 나는 남자의 이 슬픈 하소연을 읽었다. 꿈에라도 처자 모습을 한번 보면 좀 나을 건가. 겪어보지 않아 그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는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간 아기와 처를 혹 꿈에서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잡혀가기 전까지 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지냈다.
진짜 살인범은 17년을 어떻게 살았을까 이 사람은 전생에 무슨 업을 지었기에 이리도 처자 잃고 저는 그 살인범으로 몰린 걸까. <피에타>라는 영화 속에 악덕 사채업자의 하수인인 젊은 청춘이 있다. 잔인하기가 도저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그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어머니’ 때문에 현생에서 제 죗값을 모조리 갚으려 한다. 그래서 몰래 피해자 트럭 밑에 기어들어가 스스로를 묶은 채 길바닥 위로 끌려가면서 자신의 피로 하얀 눈길을 빨갛게 물들이더만. 2시간 영화에, 빚 못 갚은 이들 손발 꺾고 부러뜨리는 악행 30분, 나머지는 저 스스로 제 죗값을 치르는 데 1시간 반. 그 불쌍한 청춘의 외로움과 빨간 피에 나는 그만 목이 꽉 메었다. 세상에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타고난 나쁜 피와 이 냉정한 세상의 합작품. 우선 나쁜 피라. 하지만 곰곰 따져보면 나쁜 피가 전생의 업보도 아니요, 그 개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내가 나쁜 피와 게으른 성격, 모자란 머리를 원해서 타고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원초적 한계. 성인들이나 깨친 이들은 속인들을 향해 왜 못 깨치느냐, 왜 나쁜 마음을 먹느냐고 야단치지만, 사실 이건 유전자의 에이비시를 모르는 소치다. 뭐, 성인이나 선사들도 마침 부모들의 좋은 유전자들이 모여 그저 잠시 그분들을 만들어냈기에 그리된 것 아니겠는가. 그 유전자로 이루어진 그분들의 몸과 마음도 다시 흩어져 간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나에게 외모와 성격과 지능, 건강을 부여한 건 모두 부모 두 사람의 유전자다. 더 윗대로 올라가면 나에게 유전자를 준 30대 조상들은 2의 30승, 약 10억명쯤 된다. 30대면 약 천년 전이니 그때 우리나라 인구는 10억은커녕, 백만이 좀 넘었을 터. 결국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공통 조상을 가진다는 거다. 천년 전 조상들의 유전자들을 오늘날 나와 살인범, 도통한 스님이 다같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래로 내려가면 다시 유전자들이 섞이고 섞여 내 30대 자손 중에는 성인도 나오고 살인마도 나올 게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랴. 이렇게 모였다, 흩어졌다, 흘러가는 게 이 세상 참모습이니, 사람과 사물과 사건 가운데 저라고 주장할 만한 별게 없다는 걸 알고 그냥 지켜보고 있을 뿐. 그렇게 지켜볼 줄 알면 속인들도 악인들도 다 부처다. 하긴 이렇게 지켜보는 일도 그렇게 타고났거나, 그리하려고 애쓰는 이들에게나 가능할 터. 이걸 가지고 잘난체할 일도, 남을 타박할 일도 없다. 이 냉정한 세상은 또 어떤가. <피에타>의 그 청년이 운 나쁘게 나쁜 피를 타고났어도, 피에타 조각상의 성모마리아처럼 아들의 불행에 눈물 흘리는 어머니가 곁에 있었더라면 그렇게 냉혈한 짓을 하지는 못했을 거다. 그리고 외모와 머리, 돈 있는 사람들이 승자독식하지 않고 같이 나누는 사회체제를 만들면 약자들이 절망해서, 자포자기해서 자신과 이웃, 사회를 무차별 공격하는 일도 줄어들 게다. 나는 남자의 처자를 목 조르고, 물에 띄우고, 장롱에 불 지르고, 남편에게 살인을 뒤집어씌운 그 사람이 지난 17년 동안 어떤 죗값을 치러왔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피에타>에 나오는 ‘순결한’ 마음을 지닌 그 젊은 청춘만큼은 못 되어도 온 마음으로 남자와 그 처자에게 깊이 속죄하고 있기를 빈다.
닷새 뒤까지 그릇의 물기가 남았다니… 식기세척기의 상태도 1심 사형선고의 근거가 되었다. 검사와 1심 법원의 주장은 이랬다. ‘죽은 처는 하루 동안 사용한 그릇들을 모아 저녁에만 세척기를 돌렸다. 그런데 사건이 난 뒤 보니 식기세척기 안에는 세척된 그릇들만 있었다. 그러니 전날인 6월11일 저녁을 먹고 난 그릇들을 세척한 뒤 6월12일 아침을 먹기 전에 죽은 게 틀림없다.’ 과연 그런가. 우선 식기세척기는 사건 나흘 뒤인 6월16일에야 비로소 처의 오빠가 현장에 가서 상태를 확인하고 경찰에 이상하다고 하는 바람에 문제가 된 거였다. 정말 어이가 없는 건, 6월16일 오빠가 갔을 때 세척기 안 그릇들이 세척된 상태였던 건 맞지만, 결정적으로 그릇들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는 거였다. 6월11일 밤 사용한 게 마지막이었다면 어찌 물기가 닷새 뒤까지 남아 있었다는 건가. 사건 이후 6월16일쯤 누군가-아마도 경찰이었을 게다- 실수로 세척기를 돌려서 그 얼마 뒤 오빠가 왔을 때 물기가 있었던 거였다. 현장 보존이 제대로 안 된 세척기 상태는 전혀 살인의 증거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6월11일 사용한 그릇, 수저의 수가 세척기 안에 있는 숫자보다 더 많았다. 기계 말고 손설거지도 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사건 당일 처가 아침 먹은 그릇을 손설거지해 치웠을 수도 있다. 항소심 현장검증에서 나는 싱크대 개수대에 미역국 냄비가 있던 점에 주목했다. 전날 저녁 다 세척했고 다음날 아침 먹기 전에 죽었다면 미역국 냄비는 왜 씻지 않은 채 그대로 개수대 안에 있는가. 이건 바로 6월12일 당일 아침, 처가 남편 출근 후 미역국을 먹고 그날 밤에 씻으려고 그대로 두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개수대 안에는 어린 딸이 먹는 물컵도 있었다. 아이는 밤에는 우유만 먹지 물은 먹지 않는다. 검찰 논리대로 전날 저녁 죽 먹은 이후 아침 먹기 전에 죽은 거라면 이 물컵 역시 저녁때 세척을 해서 세척기 안에 있어야 했다. 당일 아침 엄마가 밥 먹을 때 아이도 물을 마신 증거였다. 나는 현장검증 때 싱크대 위에 있는 행주와 스펀지, 수세미, 고무장갑, 주방세제를 사진 찍어 제출했다. 12일 아침 먹은 그릇은 수세미 등을 이용해 손으로 설거지하고 기름기가 많은 미역국 냄비는 저녁에 세척기로 씻으려고 싱크대 안에 남겨두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식기는 언제나 세척기로, 그것도 저녁에만 세척한다는 검사의 논거는 완전히 무너졌다. 더 황당한 일도 있었다. 검사는 6월12일 당일 처가 아침을 먹기 전에 남자가 범행을 하고 7시에 출근했다고 했다. 남자는 7시 출근하면서 아파트 쓰레기장에 쓰레기를 버렸다. 경찰은 쓰레기봉지 안에서 조기 등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를 확인하고 이건 전날 저녁 부부가 먹은 거라고 했다. 그런데 6월19일 형사가 현장 주방에서 또다른 쓰레기봉지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조기 반마리와 사용한 기저귀 2개가 들어 있었다. 아니, 경찰이 12일 현장감식 때는 무얼 했길래 이걸 못 보았다는 건가. 남자가 12일 아침 출근하면서 집에 있는 음식쓰레기를 가지고 나갔으므로 또다른 음식쓰레기와 아이 기저귀가 주방에서 발견되었다는 건 남자가 출근한 이후 처가 아침을 먹고 아이도 기저귀를 사용했다는 거였다. 범행 도구를 둘러싸고도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검사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건 발생 9일 뒤인 6월21일 현장에 가보니 베란다 커튼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이를 제대로 설치하고 보니 오른쪽 조종끈이 너무 짧았고 이는 범행 도구로 잘라 썼기 때문이다. 범인이 잘라 쓴 줄은 찾지 못했다.’ 그리고 경찰은 남자가 자르고 남은 것이라며 줄을 약 90센티 정도 잘라 국과수에 보내 잘린 끝부분이 열로 변형된 것인지를 물었다. 경찰이 국과수에 보낸 커튼줄을 살펴보니 3가닥 나일론줄을 약 20센티 간격으로 하나로 묶어 매듭을 지어 모두 5개 매듭이 있었다. 이 커튼은 로만셰이드 커튼이라고 했다. 창문 오른쪽 틀에 고정못을 박고 이 매듭들을 차례로 거기에 걸면 완전히 내린 커튼이 20센티 간격으로 순차적으로 위로 올라갔다. 그런데 7월에 경찰이 그 커튼을 설치했던 업자 박아무개를 불러 커튼 설치 과정을 재현했다. 그때 매듭이 5개였다. 여기서 잠깐! 경찰이 감정을 위해 잘라 국과수에 보낸 게 매듭이 5개이니, 그렇다면 애시당초 범인이 잘라 간 건 전혀 없다는 소리 아닌가. 멀쩡한 커튼줄을 끝부분 감정한다며 잘라 가 놓고는 범인이 잘라 쓴 거라고 소동을 벌인 걸로 보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커튼 설치업자와 장모의 증언 번복 나는 이 커튼의 원리를 이해하려고 커튼가게들이 모여 있는 동대문시장이며 청량리시장을 열심히 돌아다녔다. 그때 거추장스럽게 넥타이 매고 그 땡볕 속을 땀 뻘뻘 흘리며 걷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요즘은 재판 없으면 노타이에 반팔. 홀가분하다. 세월이 많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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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닷새 뒤까지 물기가 남아 있던 식기세척기. 경찰이 실수로 세척기를 돌렸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현장 보존이 제대로 안 된 세척기 상태는 전혀 살인의 증거가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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