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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08 19:03 수정 : 2012.06.08 23:01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주대학교 종점으로 지난달 29일 3-2번 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 승객이 모두 내린 뒤 기사는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기지개를 켜며 피로를 쫓아냈다. 한낮 기온이 30도까지 오른 나른한 오후, 기사가 붉어진 눈을 비비며 말했다. “운행시간표에 대려면 그냥 운전대에 앉아 쉬는 게 나아요.” 파업 장기화. “사흘째 내리 근무예요. 전주 시내버스 운전사 중 격일 휴무를 하는 사람 거의 없을 거예요. 이러다 큰 사고라도 날까 걱정이죠.”

[토요판] 커버스토리/유령들의 파업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투명인간들

전주 버스노동자 정임초씨의 투쟁

전북 전주 시내버스의 2차 파업이 78일째(전북고속은 1차 파업 이후 539일째)로 접어든 지난달 29일, 전주시청 앞에 설치된 바리케이드 뒤로 시내버스 노조원들이 가져다 놓은 펼침막이 보인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고생헌다.” 지난달 29일 오전, 전북 전주시 덕진구 팔복동에서 385번 버스에 올라탄 정임초(53)씨가 기사에게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기사가 돌아보더니 멋쩍은 듯 맞인사를 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짧고도 서먹한 인사다. 정씨는 저만치 뒤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승객’ 정씨는 석달 전까지만 해도 ‘호남고속 1774호’를 몰던 버스기사였다. 하지만 정씨는 이날까지 78일째 운전대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호남고속 등 전주 시내버스 5개사 노조(민주노총 소속)가 지난 3월13일부터 2시간 부분 파업에 들어간 뒤 사쪽이 부분 직장폐쇄를 했기 때문이다. 이번 파업은, 민주노총 소속 새 노조 인정 문제로 시작된 1차 파업(2010년 12월8일~2011년 4월29일)의 연속선상에 있다. 지난 539일 중 224일이나 일을 못 한 셈이다.

그래도 버스는 잘만 굴러간다. 파업에 동참하지 않았던 한국노총 노조원들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며 복귀한 동료들이 운전대를 잡으면서, 버스 운행률은 최근 80% 선까지 올라갔다. “하루 50건에 이르렀던 버스 관련 민원 신고도 3~10건 선으로 떨어졌다”고 전주시 관계자가 전했다.

정씨는 이날 전주시청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운전대를 잡은 동료 보기가 머쓱해도 버스를 타지 않을 수 없다. “월급 끊긴 파업 노동자가 탈 수 있는 건 버스뿐이다.” 되레 그가 말했다. “운전대 잡고 있는 사람이라고 속이 편하겠어요? 어차피 함께할 사람들인데 미워하면 절대 안 되죠.”

시청 앞에서는 이날 ‘버스노동자 집단 릴레이 단식농성 돌입 기자회견’이 열렸다. 단식농성쯤이야 한 줄 뉴스감도 되지 않는다는 걸, 노조원들도 모르지 않는다. 김현철 민주버스본부 전북지부 수석지부장이 단식농성(23일째)을 하고, 호남의 ‘여당’ 민주통합당(전북도당)을 점거(28일째)해봤자, 절박한 사연 대신 노조원들의 ‘돌출행동’만 보도됐다. “시청 앞에서 똥을 싸고 알몸으로 돌아다니기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방송에 명함도 못 내민다.” 노조원 임승균(55)씨가 쓰게 웃었다.

기자회견은 20여분 만에 끝이 났다. 30도까지 치솟은 땡볕을 피하기 위해 농성자들이 시청 처마 밑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시청 직원들이 이를 막아섰다. “전주시가 회사쪽 편만 든다.” 노조원들 사이에서 원성이 터져 나왔다. 그 소란 한편에선 ‘전주·완주 화합 분위기 조성’을 위해 전주시 주민자치협의회가 개최한 공예품·서예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20년간 버스를 몰아온 베테랑 기사 정임초씨는 “한동안 무책임한 가장일 수밖에 없지만 끝까지 파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오전반 첫차는 일산 종점에서 새벽 5시에 나간다. 그때부터 5분 간격으로 버스가 차례로 나가는데, 오전반 막차가 7시에 나가면 내가 첫차로 노선을 한바퀴 돌고 와서 7시5분에 두번째 탕을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차로 6시40분까지는 노선을 한번 돌고 와야 한다. 그래야 밥 먹는 시간을 한 20분쯤 벌 수 있다. 아니 똥을 누고 자판기 커피 한 잔 뺄 시간이라도 있으려면 밥을 한 10분 안에는 먹어야 한다. 그래야 7시5분에 나갈 수 있으니까. 그러려면 1시간35분 안에 노선을 돌아야 한다는 얘기다.”

월간 <작은책> 발행인 안건모씨가 20년 버스 운전기사 경험을 담아 2006년 내놓은 에세이집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의 한 대목이다. 같아도 너무 똑같다. ‘일산’을 ‘전주’로 바꿔놓으니, 안씨의 ‘과거’가 호남고속 1774호차 기사 정임초(53)씨의 ‘오늘’과 오롯이 포개졌다. “제발 사람답게 일하자!” 1차 파업(2010년 12월8일~2011년 4월29일)에 이어 지난 3월13일 시작된 전주 시내버스 5개사 노조의 2차 파업에 동참하고 있는 까닭이다.

사장 조부 묘소 풀 깎아주고

반값에 사장실 리모델링 해주고

10년을 노예처럼 기었다

하지만 월급은 오를 줄 모르고

사고처리도 운전사 몫이었다

작년 1차 이어 다시 파업

남편은 공사장, 부인은 식당

대학생 딸은 등록금 없어 휴학

막내는 휴대폰이 갖고싶단다

정임초씨가 인터뷰 도중 보여준, 고위 간부한테서 온 회유성 문자. 전주/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차마 라이터 불을 댕기진 못하고…

파업 장기화는 정씨에겐 “무책임한 가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1차 파업 때도 다섯달이나 월급을 못 받았는데, 정씨는 지금도 석달째 빈손으로 집에 갈 판이다. 빚이 늘어간다. “마누라 보기 민망하지.” 정씨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파업을 하든 말든, 어디 사정 봐가며 돈 쓸 일이 생기던가. 허리띠를 졸라매도 다달이 은행 빚 68만원, 어머니 요양 병원비 45만원 내기에도 빠듯하다. 대학생인 둘째 딸은 등록금 낼 돈이 없어 지난 파업 때 휴학계를 냈다. 파업 투쟁 틈틈이 공사장에서 ‘부업’을 하고, 아내가 식당일을 해 벌이에 보태도 부모님과 네 아이까지, 여덟 식구의 생계는 이미 벼랑 끝 위다.

정씨는 ‘분신’을 시도했다. 지난 4월23일, 자신이 다니던 호남고속 사무실에서였다. 길어진 파업에 지친 아내와 말다툼을 하다 ‘욱’하는 심정이었다. 그날은 10살짜리 늦둥이 아들의 소풍 전날이었다. “아빠가 만든 김치볶음밥으로 도시락 싸줘” 하는 아들의 말에 오랜만에 앞치마를 둘렀다. 그 모습을 본 아내가 “다른 집 남자들은 처자식 먹여살린다고 (회사로) 돌아가는데 뭐한다고 당신만 계속 그러고 있냐”며 속에 묻어뒀던 불만을 터뜨렸다. “갈 데 없는 처지란 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몰아세울 수가 있어?” 분이 난 정씨는 공사장에서 쓰던 시너를 들고, 10분 거리 회사로 달려갔다. 파업 전, 매일 새벽 별을 보며 출근하던 길이었다.

시간은 밤 11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홀로 야근하던 직원이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너를 머리에 부었다. 차마 라이터 불을 당기진 못했다. “순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늦둥이 아들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은 ‘사무실에 불을 지르려고 했다’(현주건조물방화예비)는 혐의로 정씨를 체포했다. 유치장에 있는데 아내가 면회를 왔다. 그는 아내를 만나지 않았다.

새벽 5시에 출근해 하루 16시간 근무

“어떻게 당신까지 나한테 그럴 수 있나” 싶어 아내가 미웠다. 3살 차이 나는 아내와는 28살 때 친구 결혼식장에서 만났다. 딸 셋, 아들 하나를 낳으며 함께한 세월이 벌써 25년이다. “내가 미워하면 아내도 갈 곳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이르자 스르르 화가 누그러졌다. “파업만은 끝까지 하겠다”는 마음만은 내려놓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노예 같은 삶을 되물림할 수는 없었다.”

1992년부터 전주에서만 20년간 버스를 몰았다. 새벽 5시에 출근해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운전대를 붙잡았다. 하루 16시간, 14일 만근(격일 근무 28일)에 뼈가 녹아나도 생활은 늘 제자리걸음이다. 90여만원 수준이던 임금은 20년 동안 2배 정도밖에 늘지 않았다. 공공운수노조에 따르면 6년차 버스노동자의 임금은 236만1752원. “연차가 있어도 임금 차는 10여만원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게 버스 노조원들 얘기다. 정씨는 “쉬는 날마다 공사장에서 부업을 하는데도 네 아이 중 단 한명도 학원 문턱을 밟아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우리 반 애들 중 휴대폰 없는 애는 나뿐”이라며 칭얼거리던 늦둥이 아들이 늘 명치끝에 걸린다. 정씨는 “아들에게 휴대폰을 사주기 위해서라도 파업을 잘 끝내야 한다”며 웃었다.

지금 다니는 호남고속으로 옮겨온 건 2002년 5월9일이다. 그때만 해도 미래에 대한 기대란 게 있었다. “호남고속이 삼례공용버스터미널을 지을 때, 김재호 회장(작고, 김택수 현 회장의 아버지)이 직접 삽을 들고 나와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아, 저런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라면 뼈를 묻어도 되겠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버스도 안 다니는 시간에 출퇴근을 해야 하지만 교통비 지원 따위는 없었다. 정씨가 회사에서 10분 거리에 집을 얻은 이유이기도 하다. 회사가 주는 식사쿠폰은 고작 4000원짜리다. 그나마 쿠폰을 사용할 수 있는 기사식당조차 없는 종점이 태반이다. 짜장면이라도 시켜먹으려면 5000원은 있어야 하는데, 쿠폰을 현금화하겠다고 하면 회사서는 10%의 수수료를 떼갔다. 그뿐인가. 일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기사들이 알아서 사고 처리 비용을 물었다. “그거 안 물어주고 징계를 받으면 며칠씩 쉬어야 하는데, 일 못해 받게 되는 불이익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예쁨 받고파’ 사주 조부 묘소 관리 나서기도

그럴수록 “사주의 예쁨을 받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동료 예닐곱과 ‘묏등부대’란 걸 꾸려 사주 조부의 묘소 관리를 도맡아했다. 명절 때만이 아니라, 풀이 자라기 무섭게 알아서들 묘소로 갔다. “한마디로 알아서들 긴 거다.” 그가 두 손바닥을 맞비비며 얘기했다. 묏등부대 활동은 2년여 전까지도 계속됐다. “이런 ‘충성’의 대가로 입사 1년 만에 예비기사에서 정식기사가 됐고, 새 차에 좋은 노선 배치를 받았다.”

그의 ‘충성심’이 흔들린 건 2005년이었다. 당시 그가 공사장에서 부업을 하며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로 회사 사장실과 화장실 리모델링 공사를 했던 게 계기였다. 다른 현장에서 받는 돈 절반만 받았지만 몰딩 하나, 타일 하나까지 손수 골라가며 꼼꼼하게 공사를 했다. 쉬는 날뿐만 아니라 배차 날짜까지 빼면서 꼬박 6개월을 일했다. 그러다 인대가 끊어지는 사고를 당했지만 회사는 나 몰라라 했다. 병원비라도 달라는 말도 못했다. “(회사를) 그만두라고 할까봐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날이 추워지면 그때 다친 오른쪽 손가락 3개가 저릿저릿 아프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노예처럼 살았던 기억이 떠올라 약이 바싹바싹 오른다”고 정씨가 말했다.

2010년. 회사가 통상임금으로 줘야 할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됐다. 회사 쪽이 싫어하는 민주노총 노조 쪽에 가입해 파업에 나서고 있는 까닭이다. 파업에 나선 그를 보는 회사 쪽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하지만 그가 말했다. “내가 그 사람들(회사)을 배신한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나를 배신한 것”이라고.

전주/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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