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로부터
내게 이런 조언을 할 자격이 있는가 싶기도 합니다. 알다시피 나는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던 대통령이고 게다가 “실패한 대통령”으로 비판받기까지 하니 말이지요. 그러기에 더더욱, 나의 경험이 역설적으로 당신에게 지혜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 나이 이제 구십이 가까워 옵니다. 지난 시대 풍파를 이리저리 겪은 한 노인이 젊은 지도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정도라고 해도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재선 도전에 꼭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격려요, 마땅히 받을 축복입니다. 오바마 아닌 다른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끔찍한 재난입니다. ‘변화’를 내세워 대통령이 된 당신 아닙니까? 바로 그 변화에 지속력을 부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동력이 생겨나기 시작한 ‘오바마 정치’가 21세기 역사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라던 세가지는인권과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모든 차별을 없애는 일
하지만 79년 이란 인질사태 때
소신 대신 ‘힘의 외교’를 택했고
실패한 대통령으로 남았어요 이-팔 분쟁 평화적으로 해결한
‘캠프 데이비드 회담’은 내 자랑
중동에서도 한반도에서도
힘을 통한 압박에 의존 말기를
친애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워싱턴을 물갈이하라’는 그때의 특명
소수 부자들을 위한 대통령, 인종차별을 심화시킬 정책, 군사력을 앞세워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정부, 국민의 당연한 권리인 사회복지 확장을 인기영합주의라고 몰아붙이는 세력이 이 나라 권력을 차지하게 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지구를 지켜낼 에너지 자원과 환경에 대한 성찰이 없는 집단,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려 들지 않는 정당,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교육에 대한 재정 마련을 뒷전으로 돌리는 이들이 미국을 주도하는 사태를 우리는 허용할 수 없습니다. 공화당의 대선 주자 밋 롬니처럼 ‘강한 미국’을 앞세워 외교적 수단보다는 전쟁을 하거나, 다른 나라의 권리를 힘으로 짓밟는 시대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2008년 월가의 탐욕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까? 국민들이 낸 혈세로 그들의 손해를 최우선으로 보전해주는 정부가 등장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 미국인 대다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자, 지구촌의 앞날을 암담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오바마 당신의 재선 성공은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실현되는 일입니다. 돌아보니, 내가 제39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던 때가 바로 지금의 당신과 비슷한 나이군요. 50대 초반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인지도 2%의 무명 인사였지요. 조지아주 주지사를 지냈는데도 말입니다. 내가 1976년 ‘프레지던트’로 나서겠다고 하자 어머니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세요? “프레지던트? 어디 회장 선거에 나가니?” 그런 나에게 미국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주어진 것은 당시 미국인들이 새로운 변화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기껏 해봐야 “남부 조지아 땅콩장수” 정도로 알려진 나 지미 카터는 부패하고 음모가 판치는 워싱턴 정가의 주류세력과는 거리가 먼, 그래도 깨끗하고 신선한 인물로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당시 워싱턴은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해서 대통령과 정부의 권위가 추락할 대로 추락해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은 워싱턴을 물갈이하는 역할을 나에게 준 셈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워싱턴의 눈으로 보면 ‘아웃사이더’였지요. 1971년 조지아주 주지사로 당선된 뒤, 나는 이미 나의 고향에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조지아주가 어떤 곳입니까? 남부의 오랜 인종차별주의가 깊게 배어 있고, 그로 인해 흑백 분리교육에 대한 완고한 의식이 여전히 지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주지사 선거에 나갔을 때에도, 표를 위해 인종차별단체인 ‘백인시민연합’에 가입하는 것이 낫다는 선거캠프의 압박을 받았지만 뿌리쳤습니다. 그런 곳에서 인종차별 종식을 외치고 흑인 판사와 고위직 공무원 임명을 공약으로 내세웠으니 내가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중앙정보국 CIA를 개혁하려 했더니
나의 주지사 당선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 바람에 ‘새로운 남부 주지사’라는 칭호를 받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베트남 전쟁 반대, 민권운동의 기운이 바꾸어 놓은 현실 위에 나의 주지사 당선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주지사 당선 직후 최대 과제는 역시 기존 관료집단과 정치세력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들에게 포위되는 순간, 나의 본래 정치적 이상과 꿈은 좌절된다는 절박한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주지사 때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이 경험이 나의 대통령 재직 시절의 정치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나의 주지사 시절 정치는 세간에 잘 알려져 있지 않기도 하고요. 주지사로서 내가 최대로 힘을 쏟았던 것은 적어도 세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주정부의 조직 개편’이었습니다. 300개에 이르는 주정부 기구를 30개 부서로 압축해서 체계를 잡았습니다. 이 조직 개편은 단지 기구의 수를 줄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주정부 내 직책이 능력 위주로 주어지도록 했고 이 과정에서 흑인 인재들을 대거 등용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이었습니다. 저항이 있었지만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아웃사이더 정치’였습니다. 이것은 이후 인권정치 또는 인권외교의 모태가 되었고, 특히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그 역할의 비밀이 천하에 드러난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의 조직 개편 작업에 중요한 경험이 되었답니다. 지금 오바마 정부 내에 과거의 네오콘 세력이 여전히 포진해 있음은 사실 의아한 일인데, 이들의 반격이 우려되기는 하겠지만 재선에 성공하면 변화가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둘째는 ‘차별 없는 교육정책’의 추진이었습니다. 흑백 인종분리 정책이 가장 심하게 펼쳐지던 남부에서 이러한 교육 정책의 제시는 그 자체로도 정치적 폭풍을 불러들이는 일이었습니다. 이 작업은 단지 인종차별 종식만이 아니라, 빈부 격차로 인한 교육 격차를 개혁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요구되었습니다. 빈곤지역에 대한 교육 재정 지원은 일차적 고려 대상이었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대통령이 되었을 때 미국 최초로 연방 차원의 교육부를 설치하는 조처로 이어졌습니다. 당신이 교육에 대한 재정 투입을 강조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박수를 받을 만합니다. 지금 미국의 교육 현실은 너무도 우려가 됩니다. 셋째는 ‘사형제도 폐지 추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조지아 주의회가 반대하는 바람에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조지아 주의회는 강간도 사형할 수 있다는 법을 만들어 통과시켰지만, 결국 연방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이 나기도 했지요. 미국이 아직도 사형제도를 유지하는 나라라는 것은 문명국가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 내 자랑만 했군요. 꼭 그러자고 한 건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어떤 종류의 차별도 종식하고,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는 정치”를 이루고 싶었던 꿈을 이야기하려는 겁니다. 교육부와 함께 에너지 위기 해결을 위해 에너지부를 신설했지만, 아웃사이더인 나의 권한과 권위가 정부조직 전체를 장악하기에는 쉽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4년이라는 시간은 그 일을 하기에는 짧았습니다. 특히 권력기관인 중앙정보국 개혁은 미국의 대외정책, 즉 외교정책의 변화와 맞물려 가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단지 기구 개편의 수준이 아니라 좀더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정책 개혁이 있어야 했습니다. 레이건 시절, 중앙정보국의 해외 비밀공작이나 군사정책 개입이 드러난 ‘이란-콘트라 사건’도, 정부기구의 개혁이 더 큰 틀의 변화와 함께 가야 함을 말해줍니다. 인권외교 표방만큼이나 미국 정부의 관련 기관을 그에 맞게 수술하는 작업은 더욱 중요했습니다. ‘힘’은 국제적 도덕성 가질 때 의미 있어
1979년 이란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이 이란 학생들에게 접수되고, 인질사태가 났던 것도 중앙정보국 해외공작에 대한 이란 젊은 세대의 반발과 저항의 결과였지요. 지금 돌아봐도 안타깝고 쓰라립니다. 우리의 대이란 정책이 나의 소신대로 인권과 평화를 중심으로 펼쳐지지 못했습니다. 당시 이란의 독재자 팔레비에게 저항하는 이란 민주화 운동과 우리가 내부적으로 결합했다면, 오늘날 우리와 이란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랬다면 인질사태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 또한 재선에 성공했으리라 믿습니다. 이란 인질사태 당시 나는, 내 소신과 배치되는 ‘힘의 외교’라는 방향으로 미국의 외교노선을 바꾼 적이 있습니다. 중동지역에 대한 우리의 이익을 해치는 사태가 일어나면 군사력을 동원하겠다는 내용이었는데, 나로서는 다급했지요. 당시 나는 재선운동을 하고 있었거든요. 이란 인질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힘의 외교를 주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협상에 매달렸습니다. 협상의 열매는 레이건 정부가 가지고 갔고, 나는 협상에 실패하고 뒤늦게 힘의 외교를 내세운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힘을 내세우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의 국제적 도덕성을 가지고 있을 때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첫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 미국이 이제는 힘으로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가 아니라 ‘존경받는 지도국가’로 변모해야 한다고 했던 점은 나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한 ‘캠프 데이비드 회담’ 성사는 아직도 자랑스럽게 기억합니다. 이제는 분쟁해결 수준을 넘어서서, 팔레스타인에 국가 건립의 자유를 인정하고 이 지역에 두 개의 독립국가가 공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이 지역의 평화를 구조적으로 보장하는 기초입니다. 소련과 핵무기 축소 협상으로 추진한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Ⅱ를 성사시킨 점도 당신에게 환기시키고 싶습니다. 지구의 대량 살상과 파괴를 부를, 핵무기를 포함한 일체의 전략무기를 점차 없애나가자는 당신의 제안을 나는 적극적으로 지지합니다. 그런 차원에서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이제까지보다는 더 분명하게 그 성과가 드러나기를 바랍니다. 1994년 어느 날 아침,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왔더군요. 퇴임한 대통령으로서 북한에 가는 특사가 된 나는 외부엔 개인적 방문으로 알렸지만 사실상 미국 정부의 의지가 실린 외교행위를 했습니다. 중국의 위상이나 역할이 사뭇 달라진 오늘의 현실에서 한반도 평화를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은 우리 미국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상대를 압박하기만 한다고 해서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이뤄냈던 대북 화해 정책의 결과는 깊이 주목해야 합니다. 전쟁과 빈곤을 퇴치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화가 보장되는 미국, 그리고 세계를 만드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에 전력을 다할 때, 미국의 위상이 전혀 달라질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진정한 힘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러한 가치에 헌신해온 인물이자 대통령입니다. ‘아웃사이더 정치’가 미국을 바꿀 것입니다. 미국의 새로운 세기엔 패권이 아니라 윤리가 정치를 이끌기를 바랍니다. 오바마 대통령 당신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김민웅(성공회대 사회과학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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