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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8일 서울 관악구 서원동 장군봉 근린공원에서 열린 야구경기에서 수비를 보던 시각장애인 송재용씨가 안타성 타구를 잡기 위해 집중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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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ㅣ 커버스토리] 시각장애인들이 야구 하는 법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란 말이 있지요. 시각장애인 야구도 그렇습니다. 눈으로 공을 볼 수는 없어도 소리로 배트에 공을 맞힐 수는 있습니다. 9회말 2아웃 상황에 놓였다 해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누구든지 끝내기홈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선수들은 야구를 합니다. 장군봉 근린공원에서는 오늘도 하얀 공이 하늘을 가릅니다.
“안녕하세요. (서울) 마포구에 사는 서동호라고 합니다.”
지난 9월7일 오전 9시30분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지하 1층 체력단련실, 새로 온 서씨는 인사 후 체력검사부터 했다. 키 160㎝, 몸무게 56㎏의 시각장애 1급인 서씨의 몸은 야구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근육량이 부족했고 악력과 배근력이 약했다. 특히 악력은 100명 중 뒤에서 5등이었다. 배근력은 평균의 60%였다. 담당자가 서씨에게 체지방률이 약간 높다며 운동해야 한다고 말하자 수줍은 웃음이 돌아왔다.
서씨는 이날 처음으로 배트를 잡아봤다. 투수가 소프트볼에서 심을 뽑으면 나오는 “삐삐”거리는 기계음이나, 타자가 안타를 치고 달릴 때 베이스가 ‘나 여기 있소’ 하고 내는 “삐이” 하는 소리도 처음 들었다. 서씨는 프로야구 출범 초기부터 엠비시(MBC) 청룡을 좋아했고, 엠비시 청룡이 엘지(LG) 트윈스로 바뀐 뒤에도 변함없이 이 팀을 응원해온 야구팬이었다. 하지만 47살이었던 2005년 무렵 녹내장 판정을 받은 서씨는 서서히 눈이 보이지 않았다. 20대였던 딸이 30대가 됐어도, 서씨는 딸의 20대 시절 얼굴만 기억한다. 복지관을 오가며 점자와 역술을 배우는 등 재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세상이 세워놓은 벽이 높게 느껴졌다. 위염이 심해져 집에서만 지내다 바깥활동을 해야겠다는 의지로 야구를 시작했다. 서씨는 두달간 경기에 빠진 적이 없을 만큼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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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8일 시각장애인 황현철씨가 안타를 친 뒤 파란색 막대 모양의 1루 베이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옆은 이날 경기 진행을 도운 복지관 직원.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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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는 4회말, 홈과 1루만 있다
삐삐~ 날아오는 공을 치면
삐이~ 소리 나는 베이스로 뛴다
수비가 먼저 공 잡으면 아웃! B팀 송재용씨가 선두 득점
서동호씨 방망이는 허공을 갈랐다
안대 낀 봉사자들은 좌충우돌
이상엽씨와 표기철씨 합작으로
A팀이 3-1 역전승을 거뒀다
끝났다, 드디어 박수가 터졌다 수비의 신, 소리만 듣고도 슬라이딩 캐치 시각장애인 야구에서는 수비가 베이스를 지키지도, 내야와 외야를 구분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수비수마다 따로 부르는 이름이 없다. 굳이 따지면 이날 송씨는 중견수, 황씨가 좌익수, 김씨가 유격수, 서씨는 1루수였다. 기자는 3루 근처 우익수였다. 굴러오는 공을 잡기에는 글러브보다 목장갑이 편한 듯 선수들은 목장갑을 찾았다. 폼은 안 나지만, 마음만은 메이저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추신수 선수 못지않았다. 타자 이씨가 공에서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노련한 타자는 초구를 걸렀다. 시각장애인 야구에서 초구는 중요하다. 투수의 구속, 공의 높이 등을 감지하기 위해 타자는 첫번째 공의 소리가 그리는 포물선을 잘 상상해야 한다. 정안인 타자에게 날아오는 공이 점점 크게 보인다면, 시각장애인 타자는 공에서 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는 식이다. 선수가 기억하는 익숙한 찰나의 순간이 타자의 배트타이밍이다. “따아앙~!” 이씨가 친 공이 투수 옆으로 빠르게 빠졌다. “삐이-.” 베이스 알람이 켜졌다. 배트를 땅에 던진 이씨가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투수 뒤에 있던 송씨 옆으로 공이 흘렀다. 허리를 낮추고 굴러오는 공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야구 좀 해본 사람들은 아는 수비의 정석이다. B팀 송씨의 수비가 그랬다. 두 개의 심장이라도 있는 듯 경기장 전역을 커버하는 송씨는 야구팀에서 자랑하는 ‘수비의 신’이었다. 송씨는 침착하게 소리에 집중하더니 빠지는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슬라이딩한 송씨의 검은 바지에 허옇게 모래먼지가 다 묻었지만 송씨는 침착하게 공을 잡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거의 동시에 이씨의 손이 막대 모양의 베이스를 후려쳤다. “아웃!” 신씨가 주먹을 꽉 쥐었다. 가만히 서 있던 서씨도 굽은 허리를 펴면서 말했다. “나이스 캐치~.” 송씨의 활약에 A팀은 에이스를 포함해 3자 범퇴. “체인지!” 신씨의 목소리가 하늘에 울려퍼졌다. 1회말 B팀의 공격이 이어졌다. 원아웃 상황, ‘수비의 신’ 송씨가 타석에 섰다. 다른 선수들은 1루 라인 밖에 서서 송씨를 응원했다. 컨디션 좋은 송씨가 1구를 거르면서 말했다. “음, 이런 공이구나. 알았어요.” 송씨의 주문은 계속됐다. “다시 한번 베이스 소리 들려주세요.” 응원하는 같은 편 자원봉사자들을 향해서도 주문했다. “안타 쳤을 때는 박수치지 말아주세요. 베이스 소리가 안 들리니까요.” 맹학교에서 발야구 하던 습관이 남은 송씨는 천천히 높게 들어오는 공을 밀어치는 걸 좋아한다. 송씨는 공을 기다렸다. “땅~!” 스리스트라이크 이후 4구에서 안타였다. 공은 1루 라인을 타고 또그르르 계속 흘렀다. 발로 곡선을 그리면서 송씨가 베이스로 달려갔다. 뒤뚱거리며 뛰던 송씨가 베이스를 그냥 지나쳤다가 뒤로 돌아오라는 말을 듣고서야 베이스를 찾았다. 다행히 아직 안대를 한 자원봉사자 수비는 공을 찾지 못해 헤매는 중. 송씨의 터치가 빨랐다. B팀의 첫 득점이었다. 송씨가 자원봉사자의 안내를 받으며 홈 쪽으로 돌아오면서 말했다. “에휴, 다른 수비수들과 부딪힐까봐 마음 편하게 못 달려요.” 시각장애인 야구는 도전이다. 장애물이 있을까봐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시각장애인에게 달리기란 평소에 쉽게 하지 못하는 운동이다. 서씨도 경기 전 몸을 풀기 위해 달리는 자신의 모습에 상기되곤 했다. 자원봉사자의 팔을 잡고 겅중겅중 뛰는 모습이 부자연스러워 보였지만, 겨우 50m도 안 되는 운동장을 뛰고 가쁘게 숨을 쉬어도 서씨는 즐겁다며 말했다. “뛰는 게 어색하긴 해도 기분이 좋아요. 상쾌하고.” 마음껏 달려보는 기회, 그 자유로움이 시각장애인 야구의 매력 중 하나였다. 계속해서 1회말 B팀의 공격이었다. 이날의 4번 타자인 서씨의 첫 타석이었다. 신중하게 공 하나를 거른 서씨가 입을 꼭 다물었다 삐쭉 내밀었다. 스윙~. 아쉽지만 헛돌았다. 서씨는 혼자 스윙 연습을 할 때 가슴 높이에서 배트를 휘두르지만, 경기만 시작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배트는 계속 머리 위에서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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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에 앞선 몸풀기로 시각장애인 서동호씨(왼쪽)와 자원봉사자 울산대학교 김성준씨가 손을 잡고 운동장을 달리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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