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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25일 오후, 24년 만에 고향인 버마(미얀마) 중부 만달레이 짜욱세로 돌아온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탄 케(오른쪽). 군사독재 반대운동을 벌이다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2000년 세상을 뜬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의 대리인 역할을 맡아온 동네 어른 민 나잉을 껴안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매솟·랑군·네피도·짜욱세/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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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탄 케의 귀향
정부에 첫 초청받은 버마 밀림 투사들
24년 만의 ‘조국 여행’ 20일간 동행르포
▶ 지난해 12월18일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대표단 아홉 명이 현실점검여행이라는 이름을 달고 24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그들은 버마 정부와 2011년 1월부터 평화회담을 시작했고, 2012년 8월부터 자신들이 직접 버마 국내로 들어가서 그 변화를 점검하겠다는 의지를 밝혀왔다. 정부가 그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학생대표단에게 20일짜리 특별여행허가서가 나왔다. 그동안 평화협상 과정을 취재해온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버마학생민주전선 대표단을 동행 취재했다. 버마의 국호는 1989년 군사정권에 의해 ‘미얀마’로 바뀌었지만 민주세력을 비롯한 현지인들이 국호 개정의 불법성을 들어 버마를 고집하고 있는 현실을 존중해 기사에선 ‘버마’로 표기했음을 밝힌다.
뜨거운 환대 당당한 회담, 다시 눈물 삼키며 전선으로…
평화협상은 정말 가능할까
대표단이 신문 1면을 장식했고
“계속 대화하자”로 끝난
정부회담서도 희망은 보였다
아웅산 수치 대신 나온
민족민주동맹 부의장에겐
배신감을 맛보아야 했다
고향 짜욱세에서의 일주일
정치지도자라는 환대를 받으며
어머니와 보낸 46번째 생일
그러나 또 기약없는 이별
모든 ‘탄 케’들은 언제 돌아올까
국경으로 가는 마지막 일성
“비굴하게 돌아오지는 않겠다”
“어머니, 두어 달 뒤에 돌아올게요.”
1988년 12월의 어느 날, 만달레이 의과대학 5학년 탄 케가 버마(미얀마) 중부의 고향 만달레이 짜욱세를 떠날 땐 정말 그럴 줄 알았다. 두 달은 1년이 되었고, 1년은 10년이 되었고, 10년은 20년이 되었다. 마침내 2012년 12월25일, 스물두 살에 떠났던 젊은이는 마흔여섯 살의 중년이 되어 돌아왔다. ‘테러리스트 수괴’라는 딱지를 단 채로.
온 동네가 달려 나왔다. 아리는 눈물도 있었다. 뜨거운 포옹도 있었다. 하지만 24년 세월은 신파로 흐르지 않았다. 어머니 먀 탄이 이렇게 분위기를 휘어잡았기 때문이다. “왜들 울어? 우리 짜욱세 자존심과 가문의 전통이 있는데….” 어머니는 아들 손 한번 잡지 않고 딱 두 마디만을 던졌다. “괜찮지? 잘 있었지?”
집 떠나던 그날도 그랬다. 아버지는 울었지만, 어머니는 오늘처럼 담담히 말했다. 동생을 부둥켜안았던 탄 케는 머쓱한 듯 슬며시 손을 풀었다.
1988년 버마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학생들이 군사독재 정권의 유혈진압에 쫓겨 타이·중국·인도 국경으로 빠져나갔다. 의대생이었던 탄 케도 그때 인도 국경을 넘었다. 그 청년 학생들은 국경산악 소수민족 해방구에서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깃발을 올리고 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외치며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로부터 500여명에 이르는 꽃다운 청춘들이 전선에서 산화했고 버마학생민주전선은 세계 학생운동사에 유례없는 무장투쟁 기록을 남겼다. 버마의 군사독재 정권은 그들에게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을 찍었다.
세월이 흘러 2011년, 민간복으로 갈아입은 버마 군인들은 테인 세인을 대통령으로 내세워 ‘변화’를 외치기 시작했다. 평화 없이 변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부는 2012년 들어 카렌민족해방군(KNLA)을 비롯한 각 소수민족 해방군과 휴전협정을 맺어갔다. 유일한 무장민주세력인 버마학생민주전선에도 평화협상의 기운이 흘러들었다. 지난해 11월9일 버마학생민주전선은 정부와 밀담 끝에 12월18일 의장 탄 케와 사무총장 서니가 이끄는 대표단 아홉 명을 ‘현실점검여행’이라는 이름 아래 버마 안으로 파견했다. 20일짜리 조건을 단 그 여행은 탄 케를 비롯한 대표단에게 꿈만 같은 귀향으로 이어졌다.
12월18일 아침 7시 타이 국경도시 매솟을 떠나 버마로 들어선 대표단은 밤 11시 랑군(양곤)의 미얀마평화센터(MPC)에 첫발을 디뎠다. “(정부의) 은혜가 아니다. 내 땅에 내가 왔을 뿐!” 탄 케의 얼굴엔 긴장감이 돌았다. 그 땅은 조국이었지만 여전히 적지였다.
동지들을 만난 데 이어 장관들의 영접을 받다
12월19일 아침 8시30분, 탄 케를 비롯한 대표단은 거대한 불탑인 슈웨다곤 파고다 방문으로 현실점검여행 첫날을 열었다. 수많은 관광객과 참배객들 틈에 끼어든 그들의 얼굴에선 비로소 긴장감이 사라졌다. 정부가 대표단 움직임을 대놓고 따라잡거나 집적거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부터다. 아침 10시 대표단은 첫 정치 일정으로 ‘88세대 학생들’(88 Generation Students) 사무실을 찾았다. 88세대 학생들은 1988년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전설적인 학생운동 지도자 민 꼬 나잉을 비롯한 이른바 학생운동 성골들이 20여년 감옥살이 끝에 풀려난 뒤 2005년 조직한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단체다. 버마학생민주전선한테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와 무장투쟁 정당성을 세상에 확인시킬 가장 중요한 상대였다. 대표단은 꼬 꼬 지를 비롯한 88세대 학생들 지도부로부터 뜨거운 환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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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각지에서 활동하는 민주화 운동가들이 탄 케의 고향인 짜욱세까지 찾아와 버마학생민주전선 깃발을 펼쳐들고 민주화 운동의 영웅이었던 그의 아버지 기일을 기념했다. 뒷줄 왼쪽에서 셋째가 88세대 학생들 지도자 코 지미, 다섯째가 탄 케, 여섯째가 탄 케의 어머니 먀 탄, 일곱째가 88세대 학생들 지도자 민 꼬 나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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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해 11월10일 먀 예가 이끄는 88세대 학생들 대표단 5명은 버마-타이 국경 쪽 카렌민족해방군 해방구에 진을 친 버마학생민주전선 기지를 비밀스레 방문했다. 이 만남을 통해 두 운동 진영은 이미 정치적 이견이 없음을 확인한 상태였다. 어쨌든, 버마 안쪽에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온 88세대 학생들과 국경 쪽에서 무장 민주화투쟁을 벌여온 버마학생민주전선의 공개적인 랑군 회담은 버마 학생운동사에 중대한 획을 그을 만한 사건이었다.
12월21일 제2차 회의를 마친 두 조직은 민 꼬 나잉과 탄 케의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1988년 민주항쟁에서 태어난 같은 뿌리의 두 학생운동 조직이 민주항쟁 25돌인 2013년에 함께 민주평화 포럼을 열어 학생운동 통합과 버마 정치 상황을 점검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웅산 수치(수찌)가 이끌어온 야당 민족민주동맹(NLD)이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버마 정치 현실에서 대안세력화 가능성까지 던져 놓은 셈이다.
민 꼬 나잉은 21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1988년부터 학생군 무장투쟁은 버마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부분이다. 버마학생민주전선은 학생운동 필요성에서 태어난 조직이었고 그들의 무장투쟁은 현재 정치 상황에서도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우린 그 동지들이 무장투쟁 필요성이 사라졌다고 판단하는 날 기꺼이 그 결정을 받아들일 것이다.” 무장투쟁 정당성을 공개 선언함으로써 대표단한테 큰 힘을 실어주는 메시지다. 그날부터 탄 케를 비롯한 대표단 얼굴에선 긴장감이 완전히 가셨고 자신감이 넘쳤다.
버마학생민주전선과 88세대 학생들의 회담은 버마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정부와 버마학생민주전선이 밀담에서 합의했던 ‘현실점검여행 중 노 미디어 노 뉴스’란 조건은 두 학생조직의 회담에서부터 일찌감치 깨졌다. 88세대 학생들 사무실엔 50여명에 이르는 현지 기자들이 들이닥쳤고 다음 날 신문들은 버마학생민주전선을 줄줄이 표지에 올렸다. 그동안 버마의 ‘변화’를 의심하며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대표단한텐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탄 케는 자신의 얼굴이 1면에 나온 신문을 집어 들면서 “한마디로 놀랍다. 언론이 풀렸는데 (변화를) 부정만 하긴 힘들게 생겼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사실 하루 전인 20일은 탄 케와 대표단 모두에게 참 아픈 날이었다. 대표단이 민족민주동맹 사무실을 방문했으나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아웅산 수치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나온 민족민주동맹 부의장 틴 우가 회담 상대인 버마학생민주전선 현안과 상관없는 주제를 45분 동안이나 횡설수설 늘어놓았던 탓이다. 회담을 끝내고 나온 탄 케는 혀를 내둘렀다. “버마 정치의 미래가 달린 연방제나 소수민족 문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 보이더라. 이건 회담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역사책 읽어주는 느낌이었다.” 대표단과 회담하기 전 기자를 만난 틴 우는 “학생들 무장투쟁이라고? 절대 인정할 수 없다. 그건 국경 쪽(버마학생민주전선) 착각일 뿐”이라며 대표단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12월24일 새벽 5시, 대표단은 정부와 공식회담 일정이 잡혀 있는 수도 네피도로 향했다. 오후 1시 네피도에 도착한 대표단은 호텔에 짐을 풀기 무섭게 회담장인 대통령 집무실 별관으로 달려갔다. 정부 쪽에서는 버마학생민주전선뿐 아니라 소수민족해방군들과 평화협상을 주도해온 아웅 민 대통령실 장관을 비롯해 장관 넷과 차관을 포함한 7명이 나섰다. 짐작했던 것보다는 훨씬 높은 수위로 버마학생민주전선을 받아들였다. 비록 버마학생민주전선이 300여명에 지나지 않는 소규모 군사력을 지녔지만 유일한 무장민주세력이라는 강한 상징성을 지닌 까닭에 정부가 평화회담에 그만큼 큰 공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셈이다. 형식적인 인사치레쯤으로 끝날 것이라 여겼던 회담도 2시부터 시작해 7시 무렵에 마칠 만큼 정부가 애쓰는 흔적을 남겼다.
긴 회담 시간에 비해 내용은 단출했다. 탄 케는 정부대표단에게 “정부가 카친독립군(현재 버마학생민주전선 병력이 동맹군으로 투입된 전선) 공격을 즉각 중단하고, 모든 소수민족해방·민주혁명세력과 통합평화협상을 시작하라”고 요구했다. 아웅 민 장관은 “이미 대통령이 카친 공격 중단 명령을 내렸다. 통합평화협상은 카친독립군이 협상 테이블로 들어와야 가능하다”고 대꾸했다. 결국, 문제의 시작과 끝은 정부군의 카친 공격이었다. 이건 버마학생민주전선이 풀어낼 수 없는 고단위 정치 과제이다. 따라서 네피도 회담의 결론은 “앞으로도 계속 대화를 해나가자”는 말과 악수가 전부였다. 대표단은 새벽부터 장거리 여행에다 긴 시간 이어진 회담으로 녹초가 된 채 회담장을 빠져나왔다.
그의 가족사는 투쟁으로 빛나는 버마현대사
12월25일, 이른 아침부터 대표단 아홉은 뿔뿔이 흩어져 ‘귀향투쟁’에 들어갔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들 표정은 저마다 읽기 힘든 난수표였다. 기쁨, 흥분, 불안이 뒤섞여 그야말로 착잡했다. 애초 2년 안에 독재정권을 깨고 귀향한다던 그의 맹세는 24년이 되었고 민주정부는 아직 멀기만 하였으니.
탄 케는 네피도까지 자동차를 끌고 마중 나온 고향 친구 셋과 뒤엉켜 4시간 거리인 짜욱세까지 온통 부랑아판을 만들었다. 꼬나문 담배들이며, 치고받는 장난질에다, 음담패설까지. 24년 세월의 간극도 고향 친구들 앞에선 그렇게 쉽사리 허물어졌다.
짜욱세 전방 3㎞ 지점. 탄 케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아아아, 짜욱세.” 그이 눈엔 이내 물기가 고였다. “저 산(슈에 타르 리아웅산) 위, 저 탑, 저게 우리 동네 상징인데….” 탄 케는 말을 잊지 못한 채 고개 숙여 눈물을 감췄다. 테러리스트 수괴란 이 사내, 탄 케는 본디 눈물이 잦았다. ‘어머니’나 ‘고향’ 같은 말만 나오면 늘 목이 메곤 했다. 무장투쟁, 거친 사내들, 험악한 게릴라들과 어울리지 않는 감성인가? 그만큼 맺힌 한들이 많았다. 달리 보면 그런 예민한 감성 없는 이들이 이상을 좇는 혁명전선에 뛰어들기란 쉽지 않았을 테다.
오후 2시 짜욱세. 자동차에서 내리는 탄 케에게 가족, 친구, 이웃들이 달려들었다. 여기저기 환성도 터졌다. 근데, 주인공이어야 할 그의 어머니는 멀찍이 서서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말로만 들어왔던 그 어머니다웠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일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장난기가 넘쳤고, 당신의 말을 빌리자면 ‘발랄한 소녀’였다. 24년 만에 돌아온 아들은 제쳐두고 처음 본 한국 기자를 “오빠”라 부르며 싸이의 ‘강남스타일’ 한 대목을 따라 몸을 흔들어 보일 정도였다.
어머니는 돌아온 아들에게 손수 차린 점심을 대접했다. 어머니와 아들, 이 극복할 수 없는 관계는 세상 어디나 같았다. 어머니는 생선 가시를 발라 아들 숟가락에 담았고, 나물을 찢어 아들 밥에 올렸다. 그로부터 ‘테러리스트 수괴’는 느닷없이 어리광부리는 아이로 돌변했다. 밥상을 물리고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개선장군처럼 떠들어대는 탄 케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속내를 털어냈다. “큰애는 아직 국경에 있는데 어미가 어찌 저 한 놈 돌아왔다고 기뻐 날뛸 수 있겠나.”
어머니 얼굴에선 남모를 냉랭함이 흘렀다. 가문의 자존심, 이 분야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어머니였지만 그 심장을 온전히 감출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귀향 첫날 밤을 보낸 26일 아침, 탄 케는 다시 어른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숨 돌릴 틈 없는 온갖 정치회담과 이웃·친지 방문이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주어진 귀향투쟁 1주일, 단 1시간도 헛되이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묻어나는 강력한 시간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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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1일 랑군에서 만난 두 조직의 수장. 탄 케가 88세대학생 대표단의 수장인 민 꼬 나잉의 가슴에 버마학생민주전선 배지를 달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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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아침 9시 짜욱세 한가운데 자리잡은 민곤 사원. 탄 케 아버지 기일인 12월16일과 탄 케 생일인 12월27일을 한날로 묶은 이 제사 겸 잔치에 민족시인 코 래이(Ko Lay. Innwa Gonyi)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민주투사들, 정치범들, 학생운동가들, 승려들, 야당 정치인들, 예술가들, 학자들 300여명이 몰려들었다. 그들 앞에서 연설하는 탄 케는 국경산악 무장투쟁을 이끌어온 게릴라 지도자에서 어느덧 도시 정치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탄 케가 변했다기보다는 참석한 도시 민주세력들이 탄 케를 “정치인”으로 부르면서 지도자급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이날 무엇보다 민 꼬 나잉이 찾아와 탄 케 가족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민곤 사원은 폭발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가는 곳마다 탄케의 가문 이야기는 늘 화두로 떠올랐다. 만나는 이들마다 탄 케 어머니를 끌어안고는 저마다 가족사에 경의를 표했다. 2003년 5월 아웅산 수치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나자마자 짜욱세로 탄 케 어머니를 찾아와 “대를 이은 당신 가족의 민주투쟁과 희생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나도 남편을 잃었고 두 아들을 만날 수 없는 형편이 당신과 너무 똑같다. 잘 견뎌내기 바란다”며 깊은 존경심을 안겨주었듯이.
대를 이은 민주혁명투쟁, 고난에 찬 한 가족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버마인들에게 큰 희망이었다. 그 빛나는 가족사를 보자. 여기에 버마 현대사가 있다. 탄 케 아버지 소 윈 마웅은 만달레이대학 학생회장으로 1962년 네 윈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전국적인 독재타도운동을 이끈 주인공이었다. 그로부터 한평생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 했던 아버지는 1988년 민주항쟁을 이끈 죄목으로 군사법정에서 30년 형을 받고 복역하다 1997년 풀려났으나 2000년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탄 케의 형 탄 독은 1988년 민주항쟁 도화선이 된 랑군공대 시위를 이끈 학생운동 지도자로 국경 민주혁명전선에 뛰어들어 현재 망명 버마노동조합기구(BLSO) 의장으로 일하고 있다.
탄 케는 형 이야기만 나오면 질투심에 불탄다. 두 살 터울로 어릴 때부터 치고받고 싸우면서 자란 탓도 있지만 아버지가 형을 편애한 걸로 믿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형을 좋아했던 건 자신이 평생 타도 대상으로 여겼던 독재자 네 윈을 형이 쫓아내주었다고 여겨서지. 1988년 3월부터 형이 이끈 랑군공대 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번지면서 결국 네 윈이 7월23일 물러났거든.”
“진정한 귀향의 날엔 가장 늦게 오겠다”
그렇게 네 윈이 물러나고 8월8일부터 버마 전역에선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주화를 외쳤다. 그 무렵 그냥 의대생으로 기껏 단상에 올라 연설 한번 한 게 다였던 탄 케는 “아버지와 함께 짜욱세 시청을 접수했던 그 시절이 내 인생에 황금기였다”며 자신에게도 형 못지않은 무용담이 있다는 듯 흥분했다. 근데, 듣고 있던 어머니 이야기는 달랐다. “황금기는 무슨 얼어죽을! 9월18일 쿠데타로 집권한 소 마웅이란 놈이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하면서 닥치는 대로 잡아가뒀는데. 그 무렵 남편과 탄 독이 잡혀 들어간데다, 저 탄 케란 놈은 짜욱세 외부 출입금지령을 받았으니 누굴 먼저 돌봐야 할지 모르겠는 거야. 나중엔 보석금 내면 다 풀어준다고 했는데, 셋 모두를 데리고 나올 돈이 없었어. 그래서 또 셋을 다 포기했지.”
그렇게 셋을 포기하며 살아온 어머니의 일생이 오늘날 탄 케의 든든한 후광임은 굳이 말할 나위도 없다. 탄 케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탄 케는 “어머니는 나의 영웅”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즈음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인들은 국법질서회복평의회(SLORC)란 이름을 내걸고 계엄령을 선포한 뒤 평화적인 시위대를 향해 유혈진압작전을 벌여 5000명을 웃도는 시민을 살해했다. 이어 버마 전역에는 대규모 검거 열풍이 불어닥쳤고 1만여명에 이르는 청년, 학생들은 타이·인도·중국 국경 쪽으로 빠져나갔다. 그 국경지역은 1948년 버마 독립 때부터 자치·독립을 외치며 무장투쟁을 벌여온 카렌민족해방군, 몬민족해방군(MNLA), 카친독립군(KIA) 같은 소수민족들의 해방구였다. 탄 독과 탄 케도 그 대열에 합류해 인도 국경으로 향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 탄 케는 치를 떨었다. “내남없이 우리가 닿았던 그 국경산악엔 먹을거리도 입을거리도 없었고, 심지어 잠자리마저 없어 맨땅에서 쪼그려 잤어. 오직 하나 풍부했던 건 살인적인 편견뿐이었지. 버마인이라고 우릴 믿지 않는 거야. 투쟁 의지를 보여주고자 칼 한 자루 없는 맨손으로 전선에 오르기도 했고, 어떤 동지들은 지뢰밭에 내몰리는 시험까지 당했지.” 탄 케 말마따나, 1988년 11월1일 카렌민족해방군 완카기지에서 올린 버마학생민주전선 깃발은 그야말로 동지들 목숨과 맞바꾼 역사였다. 그로부터 버마학생민주전선은 소수민족해방세력과 민주혁명세력이 연합한 버마민주동맹(DAB)의 일원으로 반독재·민주화투쟁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지도부 분열과 국경 혁명 고착화로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학생군은 하나둘씩 전선을 떠났다. 버마 안팎에서는 학생군 무장투쟁을 달갑잖게 여기는 소리들이 높아졌다. 결국 쪼그라든 버마학생민주전선은 2001년 제6차 대표회의에서 제1세대 지도부가 전면 퇴진한 가운데 북부 카친해방구에서 야전의료팀을 꾸려왔던 탄 케를 의장으로 선출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날 탄 케는 맹세했다. “단 한 명 동지만이라도 남는다면 절대 쿳 다웅(싸우는 공작새: 버마학생민주전선 깃발)을 내리지 않겠다.”
소란스럽고, 정신없고, 난리판 같았던 짜욱세의 1주일이 별똥별처럼 휙 지나갔다. 그리고 해가 바뀌었다. 2013년 1월1일 새벽 4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탄 케와 가족들은 또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그렇게 24년 만의 귀향은 내일 없는 어둠만 남긴 채 끝이 났다. 탄 케는 눈물을 삼키며 랑군으로 향했다. 그이는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랑군까지 따라나선 그 고향 친구 셋도 말문을 닫았다. 그 불편하고 무거운 침묵, 아직은 버마의 변화를 말하기 이른 까닭이다.
절망할 필요는 없다. 24년 전, 군인들에 쫓겨 빈털터리 맨손으로 국경 민주혁명전선에 올랐던 수많은 ‘탄 케’들이 오늘, 자신들을 쫓아냈던 바로 그 군인들 앞에 당당히 앉아 정치를 말하고 있다. 역사는 싸우는 이들의 몫이었고, 역사는 그 싸우는 이들 편이었다는 사실을 버마학생민주전선이 증명했다. 탄 케를 비롯한 대표단 아홉 명이 단 20일 동안 버마를 휘젓고 다니면서 또 증명했다.
대표단이 일정을 모든 마친 1월6일, 탄 케가 타이-버마 국경전선으로 되돌아오기 전 했던 마지막 말을 여기 기록에 남긴다. “우리의 깃발 ‘쿳 다웅’을 접어서 비굴하게 랑군으로 되돌아오지는 않겠다.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으로서 현실점검여행엔 가장 먼저 랑군으로 달려왔지만 진정한 귀향의 날이 오면 모든 동지들을 무사히 랑군으로 돌려보내고 가장 늦게 쿳 다웅을 펼쳐 들고 돌아오겠다.”
매솟·랑군·네피도·짜욱세/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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