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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 일본 세이가쿠인대 교수가 2010년 11월 ‘한겨레-부산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했을 때의 모습.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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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강상중 일본 세이가쿠인대 교수 인터뷰
역류하는 한·일 역사 공통점을 말한다
자신의 책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를 통해 ‘귀태’라는 용어를 국내에 처음 소개했던 강상중 일본 세이가쿠인대학 교수가 광복절 68돌을 앞둔 지난 7일 저녁 <한겨레>와 만났다. 최근 이 대학 총장에 선임돼 화제가 되기도 했던 그는, 한국의 식민지 청산과 일본의 우경화, 한국의 정치권을 잠시 흔들었던 ‘귀태’ 논란에 관해 견해를 밝혔다.
인터뷰 도쿄/정남구 특파원,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한국과 일본 모두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없다” ▶ 광복절 68돌(15일)이 다가옵니다. 우리는 과연 일본 식민지배의 유산을 얼마나 청산했을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친일 부역이 더 큰 문제일까요,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이 더 큰 문제일까요. ‘귀태 논란’을 보면 해답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한국 국적의 재일동포로는 처음 일본 종합대학 총장으로 선임된 강상중 일본 세이가쿠인(성학원)대학 교수가 각각 광복절과 종전기념일 68돌을 맞는 한국과 일본을 진단했습니다. 지난 7월11일 한국에서는 ‘귀태 논란’이 불거졌다. 홍익표 민주당 의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을 ‘만주국의 귀태’, ‘귀태의 후손’이라고 빗댄 발언에서 비롯된 소동이었다. 홍 의원의 귀태 발언이 나오자 청와대와 새누리당, 보수 언론은 일제히 홍 의원과 민주당을 겨냥해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홍 의원의 발언은 대통령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대선 불복성 발언이라는 논리였다. 귀태 논란은 7월12일 민주당의 사과와 홍 의원의 원내대변인직 사퇴로 수그러들었다. 귀태 논란이 한국 정치권을 휩쓸고 지나간 뒤인 7월22일 일본에서는 한국 국적의 재일동포 정치학자가 처음으로 일본 종합대학 총장 자리에 선임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자신의 책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책과함께)를 통해 ‘귀태’라는 용어를 한국에 소개한 강상중(62) 세이가쿠인대학 교수가 그 주인공이었다. 1998년 4월 역시 한국 국적자로는 처음 도쿄대 정교수(사회정보연구소)로 임용된 강 교수는 지난 4월 16년간 몸담았던 도쿄대를 떠나 일본 사이타마현 아게오시에 있는 세이가쿠인대로 옮겼다. 강상중 교수는 7일 저녁 세이가쿠인대 연구실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 “귀태는 일본 군국주의가 낳은 존재, 곧 만주국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만주국이란 귀태의 한가운데에서 정치가로서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 기시 노부스케였다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다카기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만주군관학교에서 군인의 길을 걸었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귀태 논란에 대한 입장 이외에도 지난 7월에 치러진 일본 참의원 선거 결과와 아베 정부의 우경화 움직임, 광복절 68돌을 맞는 한국의 식민지 유산 청산 등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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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중 세이가쿠인대 교수는 지난 7일 일본 사이타마현 아게오시에 있는 대학 연구실에서 <한겨레>와 만나 “만주국과 연결돼 있는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같은 시기에 한·일 두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역사적 인연 같다”고 말했다. 도쿄/정남구 특파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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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가 군국주의로 왜곡된
1905~1945년 일본을 지칭한 말
나는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만주국을 귀태라고 표현했다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도
다카기 마사오였던 박정희도
청춘 보낸 만주에서 기반을 닦았다
두 사람의 후손이 같은 시기에
지도자가 된 건 역사의 인연이다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방향으로 헌법 해석을 고치려는 의도는 어디에 있다고 보나? “일본 헌법 9조에서는 육해공군 등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지만 실제로 일본 자위대의 전력은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막강하다. 일본은 이를 실질적인 군사력으로 인정받아 다른 나라에서 운용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하자는 식으로 헌법 해석을 바꾸자’, ‘지금의 헌법에 따른 자위대의 이름을 국방군으로 바꾸자’ 등의 주장이 나오는 배경은 이런 욕망에서 비롯하고 있다.” 이번 인터뷰 다음날인 8일 오후, 일본 정부는 각료회의를 열어 법령에 관한 유권해석을 담당하는 내각 법제국(한국의 법제처에 해당) 장관에 고마쓰 이치로 주프랑스 대사를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내각 법제국은 그동안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갖고는 있지만 전쟁 포기와 전력보유·교전권 불인정 등을 명기한 헌법 9조에 따라 자위권 행사는 할 수 없다고 해석해왔다. 반면 고마쓰 신임 법제국 장관은 2011년 10월 출간한 자신의 책 <실천국제법>에서 동맹국을 위한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필요성을 적극 주장해왔다. -아베 정부는 이번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헌법 9조의 개정에 앞서 개헌 절차를 규정한 헌법 96조의 개정 공약을 내세웠다. ‘평화헌법’으로 불리는 헌법 9조 개헌을 위해 헌법 96조부터 먼저 공략하겠다는 것인데, 가능하리라고 보나? “간단하지만은 않다. 일단 헌법 개정 국민투표 발의에 필요한 참의원 3분의 2를 확보하지 못했다. 여론의 반대도 만만치 않아 국민투표를 통과할지도 의문이다. 물론 과거보다는 개헌을 위한 여건이 좀더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일본이 헌법 개정 등 보통 국가 구상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한-일 관계는 험악해질 수밖에 없다. “일본과 같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가인 독일은 어느 정도 보통 국가라 할 수 있다. 독일이 일본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대규모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비핵보유국 가운데 유일하게) 핵물질(플루토늄)은 물론 핵 재처리 시설과 핵연료 사이클(핵물질 추출·제조 공정) 기술을 갖고 있다.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서도 독일은 일본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이웃 나라의 신뢰를 얻었다. 과거사 문제로 한국이나 중국과 여전히 갈등을 겪고 있는 일본은 독일과 다르다. 일본이 보통 국가를 건설하고 싶다면 적어도 역사 문제만큼은 독일을 배워 한국과 일본의 신뢰관계를 구축했어야 했다.” -일본 정부 각료인 이나다 도모미 행정개혁담당상과 신도 요시타카 총무상 등이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오는 15일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하기로 했다. 아베 총리도 재임 기간에 꼭 야스쿠니에 참배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알고 있다. 대다수 한국인은 일본 정부의 이런 태도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아베 총리는 오는 15일 야스쿠니에 공식 참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10월 추계대제에 맞춰 참배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한-일, 중-일 정상회담은 열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일본 정부 인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미국의 반발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에이(A)급 전범을 합사한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태평양전쟁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은 야스쿠니 참배로 한국과 중국, 미국 등 모든 주요 나라의 반발을 살 수 있다.” -일본 정부 각료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대한 일본 국민의 반응은 어떤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일본 국민에게 박수를 받은 일이 있었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반적인 종교시설이 아니라 태평양전쟁 전몰자 추도 시설의 기능도 지니고 있다. 일본 국민 가운데에는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이런 의미를 갖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 고이즈미 정부 이후 많은 일본 국민은 정부 인사가 8월15일에 맞춰 야스쿠니에 참배하면 한국과 중국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한국전쟁 없었다면 식민지 청산 됐을 것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한-일 양국 간 주요 현안으로 남아 있다. 이와 관련해 아베 총리는 위안부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등 문제적 시각을 드러냈다. 심지어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한 ‘고노 담화’(1993년)와 침략과 식민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1995년)까지 뜯어고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고노 담화는 당시 일본 정부의 합의 아래에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발표한 공식 담화였고, 무라야마 담화도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총리의 개인적 입장이 아니라 내각 전체의 견해였다. 무게가 있는 것이었다. 아베 총리는 이를 고쳐 아베 담화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적이 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고노 담화를 수정한다면 예컨대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은 객관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등의 문구를 넣으려고 할 텐데, 이를 바꾸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사 인식은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광복절 68돌을 맞는 한국도 식민지 유산의 청산이라는 과제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닌가? “일본이 한국 사회에 남긴 식민지 유산은 넓고 깊다. 특히 일본제국주의와 만주국의 인맥이 세대를 거듭하며 한국 사회에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들 인맥은 ‘표면적’으로 한국의 압축적인 근대화를 이끄는 구실을 했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깊게 남기고 있는데, 그것이 커다란 유산이 되고 있다. 이는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와도 관련이 된다.” 전쟁 전후에 대한 일본의
혼재된 향수와 반성이
기시 노부스케를 불러냈고
민주화에 실망한 한국은
독재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세계화를 경험한 젊은이들은
반항과 일탈 현상을 보이는데
한국 젊은이들은 민주화 세력을
일본 젊은이들은 재일 한국인을
희생양 삼으며 공격하고 있다 -식민지 유산의 청산이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전쟁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과 분단이 없었다면 식민지 유산의 청산은 상당히 이뤄졌을 수 있다. 프랑스는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나치 협력자에 대한 청산 작업을 강력히 추진했다. 이와 달리 한국은 식민 지배에 이은 전쟁과 분단이 결정적이었다. 식민 지배에 의한 피해를 회복하기에 앞서 대규모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한국 국민의 피해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남북분단이 지금까지 해소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남북관계마저 험악하니 식민지 유산 청산보다 냉전 체제에 입각한 반공주의가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중의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의 식민지 유산 청산은 앞으로도 꽤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 -지난 7월 한국 정치권에서는 강 교수의 책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에서 나오는 ‘귀태’라는 표현을 둘러싸고 격한 논란이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나? “귀태라는 용어는 한국과 일본에서 조금 다른 의미로 쓰인다. 일본보다 한국에서 좀더 안 좋은 표현으로 통하는 것 같다. 귀태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작가 시바 료타로였다. 그는 자신의 책 <이 나라의 모습>에서 1905년 일본이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은 시점부터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15일까지를 ‘일본 역사의 귀태’라고 표현했다. 그에게 이 시기는 메이지시대 초기의 상대적으로 건전한 민족주의가 군국주의에 의해 왜곡된 시대였다. 나는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귀태라는 표현을 썼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겨 만주로 진출했는데, 그렇다면 만주국이란 존재는 귀태의 소산이라는 뜻이었다.” 지난 7월11일 민주당 원내대변인이었던 홍익표 의원은 국회 브리핑에서 <기시 노부스케…>의 내용을 소개하며 “귀태라는 표현이 있다. ‘귀신 귀’ 자에 ‘태아 태’ 자를 써서 그 뜻은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태어났다, 당시 일본제국주의가 세운 만주국의 귀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귀태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고 지적했다. ‘귀태의 후손’이란 곧 박근혜 대통령과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강 교수는 귀태 논란 이후에 이뤄진 이번 한겨레 인터뷰에서 귀태와 관련해 “초점을 맞춘 것은 만주국이었다”고 말했지만, <기시 노부스케…>를 보면 “‘제국의 귀태’라고까지 불러야 마땅할 이런 만주 인맥 ‘동창회’”(20쪽) 등의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 <기시 노부스케…>에는 이밖에도 ‘만주가 낳은 귀태들’, ‘되살아나는 귀태들’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만주국과 만주 인맥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쓰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만주 인맥의 대표적 인물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일본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군국주의 체제를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 가운데 한명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전쟁에 대해 어떠한 반성도 하지 않았다. 일본 우익 정치인의 원형으로 꼽히는 기시는 1957년 총리 자리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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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11월11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가운데)이 일본 총리 관저 만찬회에서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왼쪽) 등과 만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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