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일 오후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심곡동 집 앞에서 김진경(41)씨(가운데)가 부모 김성운(71)·최중선(67)씨와 함께 밝게 웃었다. 김씨는 뇌병변장애, 시각장애를 동반한 지적장애인이다. 41년 동안 세 식구는 한집에서 살고 있다. 장애가 있는 딸의 주거, 고용, 소득보장, 권리보호 등 삶의 모든 순간을 부모가 함께했다, 아니 감당했다. 김씨는 부모가 백살까지 살아 자신의 곁에 있어주길 바란다. 취재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토요판] 커버스토리
가족 외엔 아무도 지켜주지 않았던
지적장애인 김진경씨의 41년 인생
▶ 2012년 12월 말 기준 전국의 지적장애인은 17만3257명입니다. 비장애인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들이지요. 서번트 증후군을 겪는 드라마 <굿닥터>의 주인공처럼 재능이 특출하지는 않아도, 그들도 비장애인과 똑같이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호기심이 많고 사람 사귀는 것을 특히 좋아하지요. 비장애인이 먼저 다가가 손을 잡아준다면, 그들의 세계와 통하는 다리가 놓이지 않을까요.
여느 집처럼 분주한 아침이었다. 지난 3일 아침 7시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심곡동에 있는 2층짜리 오래된 주택 안도 바빴다. 어머니 최중선(67)씨가 아침식사를 차렸다. 딸 김진경(41)씨의 뇌전증 약 5알도 챙겼다. 아침 8시면 각각 4살, 1살인, 아들 부부의 두 딸이 집에 온다. 최중선-김성운(71)씨 부부는 맞벌이로 바쁜 아들 부부의 딸들까지 함께 돌본다. 최씨가 둘째 손녀를 안아 올리며 말했다.
“진경이 하나로 끝내려 했더니 이제는 애들까지 봐야 해.”
8시30분 대문 앞에서 ‘빠앙~’ 소리가 났다. 김씨가 서둘러 일어났다. 최씨는 다 큰 딸의 등에 배낭을 얹어주며 함께 현관문 밖으로 따라나갔다. 기다리고 있는 15인승 흰색 승합차에 올라타는 딸에게 엄마는 손을 흔들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다. 차 안에는 김씨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미리 타고 있었다.
김씨는 지능지수 70의 경도 지적장애인이다. 처음 만난 사람들은 김씨에게 지적장애가 있는지 잘 알아채지 못한다. 김씨의 인지능력은 지적장애인 중에서 높은 편이다. 감정 표현에 적극적이고 말도 잘한다. 기억력도 비상하다. 지적장애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김씨의 시각장애와 뇌병변장애로 인한 몸의 부자연스러움이 눈에 더 잘 띈다. 최근에는 김씨처럼 다른 장애를 동반하는 지적장애인이 늘었다.
김씨와 김씨의 부모는 열악했던 국내 장애인 관련 정책을 스스로 이겨내왔다. 1977년 정부는 장애인 의무교육을 규정한 ‘특수교육진흥법’을 제정했지만 누구나 특수교육을 받을 만한 환경은 마련되지 않았다. 중학교까지 일반학교를 다닌 김씨에게 발달기에 꼭 필요한 맞춤형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외에도 주거, 고용 등 삶의 모든 고비는 오롯이 김씨와 가족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평생 보호자가 필요한 김씨에게 특수교사이자 활동보조인의 역할을 해준 이는 항상 엄마였다.
한층 높아진 가을 하늘이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탑승객이 늘고 차 안에서는 아이처럼 순수한 대화가 와글와글 이어졌다.
“1년 내내 날씨가 이랬으면 좋겠다.”
“나도 나도. 난 겨울이 싫어.”
“누가 싫다고? 진경이가?”
“겨울이! 겨울이! 하하하.”
9시 목적지에 도착했다. 부천시 원미구 상동 자동차백화점 건물 3층 ‘함께하는 자립 작업장’이 이들의 직장이다. 널따란 테이블 위로 작업할 스위치 덮개들이 하얀 눈처럼 쌓여 있었다. 한번 쇳조각을 끼는 데 2원. 위아래 합쳐 덮개 하나당 4원이다. 13명의 지적장애인, 자폐성 장애인, 뇌성마비 장애인이 함께 모여 8000개의 스위치 덮개를 조립하는 것이 이날 하루의 목표다. 한달 동안 20일 일한다고 치면 약 16만개. 항상 목표량을 다 채우지 못한다. 누가 일을 더 많이 했고 적게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능력껏 일할 뿐이다.
“언니 많이 해.”
“종명이도 많이 해.”
작은 손으로 천천히 조립을 하던 이종명(36)씨가 김진경씨에게 말을 걸자 김씨도 살갑게 대답했다. 이씨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데에 더 의미가 있어서일까.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는 모습이 가족 같다. 무슨 생각을 하며 일하느냐고 묻자 김씨가 말했다.
“여기서는 시간이 잘 가서 좋아요. 집에서 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일할 때는 아무 생각도 안 해요.”
|
3일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상동의 자립 작업장에서 김진경씨가 조립을 하고 있다. 하나에 4원짜리 스위치 덮개를 끼우던 김씨는 오후에는 멀티탭(여러개의 콘센트가 있는 전기기구)의 전원을 표시하는 주홍색 스위치를 조립했다. 멀티탭 조립은 개당 100원이지만 6~7단계의 조립과정이 복잡해 주로 자원봉사자(비장애인)가 맡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개당 4원’ 스위치 덮개를 조립했다
장애인연금까지 월수입 15만원
부모가 집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을 받지는 못한다 작업장은 20명의 장애인 부모가
형편껏 돈 모아 만든 일터다
고용·소득·주거·권리보장 모두
오롯이 부모들의 몫이었다 부모들이 만든 작업장은 국가 지원 대상이 되지 못했다. 부천시가 건물 용도가 노유자시설(노인, 장애인, 임산부 등이 이용하는 시설)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애인복지시설 신청을 반려했다. 법적으로 장애인시설 운영을 하려면 건물 용도가 노유자시설로 등록돼 있어야 하는데 한 사무실을 위해 건물 전체의 용도 변경을 하기는 어려웠다. 자폐성 장애가 있는 아들 박인웅(38)씨의 아버지인 박병환씨가 부모들을 대표해 사연을 설명했다. “부천시가 장애인복지시설 신청을 반려하길래, 다시 인천지방법원에 반려처분 취소소송을 냈습니다. 판사님 말씀이 법대로 하면 인적 구성이나 시설, 건물 용도가 문제가 되지만, 부천시에서 그냥 해주면 어떠냐는 거예요. 우리가 바라는 것도 재판에서 이기려는 게 아니라 건물 용도가 노유자시설이 아니라도 장애인보호작업장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거였는데….” 1심 재판에서 지자, 부모들은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기각됐다. 부모들은 법률과 제도가 세운 원칙이 매정하다고 느꼈다. 대법원에 상고했다. 현재 작업장은 복지법인의 이름만 빌려 운영하고 있다. 운영비를 아낄 겸 자녀와 봉사자들의 점심식사와 간식을 챙겨주러 60~70살이 넘은 고령의 어머니들이 한달에 두번씩 작업장에 온다. 최씨도 당번 날이면 손녀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작업장에 들른다. 주거 문제도 부모 경제력에 달렸다. 작업장을 다니는 다른 지적장애인 4명은 부모들이 8000만원씩 내서 구입한 아파트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나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이라 장애가 있는 자식을 위해 따로 공간을 내줄 수 있었다. 형편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김씨처럼 고령의 부모와 평생을 같이 사는 방법뿐이다. 복지시설이나 지자체가 운영하는 그룹홈(장애인의 자립을 위해 사회복지사와 다른 장애인들과 함께 거주하는 주거형태)은 항상 대기자가 많다. 결국 지적장애인의 주거, 고용, 소득 보장은 부모가 아니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현실과 마주쳐야 했다. 김치훈 ㈔전국장애인부모연대 정책연구실장은 국가가 개별 장애인의 자립을 가족의 몫으로만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장애인의 개인소득, 근로능력을 기준으로 지원할지, 얼마나 지원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데 우리나라는 가구를 기준으로 지원을 결정합니다. 가족에게 장애인의 모든 생활을 전가하는 구조인 거죠.” 장애인단체에서는 부양의무제를 전형적인 행정편의적 발상이라며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
3일 오후 5시 작업장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눈이 나쁜 김진경씨는 집 바로 앞에서 내린다. 강재훈 선임기자
|
|
자폐성 장애인에 견줘 지적장애인은 호기심이 많다. 밝은 성격이라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한다. 가을바람이 시원했던 23일 오후 예전부터 가보고 싶던 선유도 공원에서 김진경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특수학교인 고등학교 때까지
맞춤형 교육은 이뤄지지 않았다
1987년 장애인등록법 시행됐지만
고교졸업 뒤 그는 갈 곳이 없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남들처럼 살려는 생각은 접었다
친구라고 꼽을 사람도 없었다
부모가 아프면 대안은 시설뿐 “그때 직접 쿠키도 만들고 김치찌개도 해보고 커피도 끓이면서 이런 일을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수녀님이 주말마다 밖에 데리고 나가주니까 더 좋았죠.” 성교육 시간도 따로 있었다. 그때 김씨는 남자에 대해서도 조금 배웠다. 남자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의 벽은 견고했다. 그 벽은 자신이 세운 벽일지도, 젊은 시절 누구나 부딪힐 수 있는 평범한 벽일지도 모르지만 김씨는 비장애인처럼 도전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김씨가 만난 첫번째 남자는 5살 많은 지적장애인 남성이었다. 김씨가 기억하는 그는 “시건방졌다.” 밥상을 들 수 있느냐, 짧은 치마는 왜 안 입느냐는 남자의 말을 듣고는 정이 다 떨어졌다. 두번째 사람은 한살 위 지적장애인 남성이었다. 첫 사람보다 나쁘지 않았는데 전화만 오갈 뿐 먼저 만나서 연애해보자는 말이 없었다. 같이 복지관에서 생활하던 지적장애인 여성의 결혼생활이 불행해지자 김씨의 소망은 희미해졌다. “결혼 잘한 사람도 1명은 있었어요. 근데 결혼했던 2명이 아기만 업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 집 엄마가 우리 엄마한테 말하는 걸 들었는데 ‘혹 떼려다 혹 붙였다’고 하더라고요.” 부모도 김씨와 같이 마음을 접었다. “비장애인인 남자였는데 통장에서 여자 돈 다 뺏고 술 먹고 때리고 그랬대. 자기가 포기하니까 솔직히 나도 마음이 편하더라고. 결혼했는데 살다 나오면 안 되잖아.” “(활동보조인을 쓸 수 있을 만큼) 돈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모를까. 우리 마음대로 그게 안 되지.” 김씨를 포함한 지적장애인들은 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배울 기회가 적고 혹여 성을 알았다고 해도 실제 사랑할 기회가 적다. 지적장애인 중에 인지능력이 뛰어난 편인 김씨는 남자의 성기 이름이 ‘고추’, 여자는 생리를 하고 남자는 안 하는 것 정도는 성교육 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애를 지울 수도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지우기로 결정했다면 애를 왜 지워도 되는 건지, 애를 지우면 여성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는 모른다. 자연스럽게 김씨는 남들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이후 누군가를 만지고 싶은 느낌, 나도 사랑받고 싶은 느낌, 아이를 갖고 싶은 생각은 전혀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제 궁금하지도 않다. “나도 나를 건사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아기라니 싶죠. 가족들 말로는 유전이 아니니까 나는 아기를 낳아도 괜찮다고 하는데 아기 고생시킬 자신도 없고 그러다 애만 시설로 보내면 애한테 상처 주는 거 아냐. 싫어. 안 돼. 연속극에 그런 장면 나오면 ‘아 나오나 보다’ 하고 마는 거지.” 김씨는 부모가 떠나면 자기가 의존할 사람은 신부님과 수녀님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부모에겐 ‘하나밖에 없는 우리 딸’ 집에 돌아온 오후 5시 이후 김씨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 밤 10시에 잠에 든다. 주말이면 성당에 다녀오는 것 말고는 항상 집에 있는다. 뇌전증 약을 받거나 장애인 등급 검사를 위해 병원에 갈 뿐 정기적인 검사나 치료는 따로 받지 않는다. 작업장 식구들과 그들의 가족, 신부님과 수녀님이 김씨가 아는 사람들이다. 친구라고 꼽을 사람은 없었다. 2011년 12월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서 펴낸 ‘발달장애인 활동지원 등을 위한 욕구조사 및 정책과제 수립연구’를 보면 발달장애인이 즐기는 문화 및 여가활동의 78%가 텔레비전이나 비디오 시청이었다. 60.5%가 친한 친구가 한명도 없다고 대답했다. 비장애인 친구가 없다는 응답이 80%를 넘었다. 일상생활 지원이 필요한 정도를 보면 68.3%가 거의 모든 일에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답했으며, 도와주는 사람은 부모 68.8%, 형제 8.8%, 배우자 7.4% 순서였다. 장애인 활동보조인(바우처)을 이용한다는 대답은 0.1%에 그쳤다. 이 연구는 지적장애인 174명과 자폐성 장애인 26명을 대상으로 실시했으며, 보통 발달장애인이란 지적장애인과 자폐성 장애인을 일컫는 용어다. 지난 23일 오후 김씨와 함께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선유도공원으로 나들이에 나섰다. 세상 구경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것을 보고 들을 기회가 적어서일까. 잘 보이지 않고 왼쪽 몸이 불편해 더딘 걸음이어도 지하철 환승 계단을 열심히 걸었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볕에 김씨 얼굴에 땀이 맺혔다. 이날 김씨는 적극적으로 감정과 생각을 표현했다. 사진기자에게 “오빠”라고 부르며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공원에 있는 소금쟁이가 무엇인지, 곤충은 무엇인지 한참을 물어봤고 차량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전방에 사고 다발지역’이라는 의미도 궁금해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많이 아쉬워했다. “나의 추억이니까. 오늘 만난 것도 추억으로 기억해야지. 나 때문에 힘들지 않았어요?” 늘 배려를 받으며 살아서 남을 배려하는 게 몸에 배어 있는 듯했다. “항상 엄마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만 말하지 말라고 그래요. 오늘도 내가 말이 많았죠?” 고작 하루의 나들이였는데, 김씨는 미안함과 고마움을 여러번 표시했다. 호기심 많은 김씨에게 부모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김씨는 부모가 백살까지 살아줬으면 바란다. 부모가 있어야 좋아하는 나들이도 갈 수 있다. “6월에 작업장 식구들과 박물관에 소풍을 갔어요. 조카들 때문에 엄마가 나랑 같이 못 갈 줄 알고, 나는 소풍 못 가는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조카를 아빠한테 맡기고 같이 가 주어서 정말 고마웠어요.” 김씨는 나중에 자신은 시설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도 김씨를 맡길 곳이 시설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씨가 말했다. “내 짐이잖아. 아들에게 떠넘기기는 싫어. 나로 끝내야지.” 그래도 부모는 딸이 예쁘다. “쟤 아니었으면 남의 고통을 모르고 살았을 거야. 나보다 더 고생한 사람들 많은 걸 알게 됐어. 쟤 때문에 우리도 사는 거지. 이사도 안 가고 계속 여기서 사는 거야.” 지난달 27일 처음 찾은 김씨의 방에 여러개의 사진앨범이 있었다.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딸을 위한 엄마의 선물이었다. 사진 속에는 생일잔치, 학창시절 소풍, 가족 여행 등 차곡히 김씨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예쁜 옷을 입고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김씨 사진 옆으로 ‘하나밖에 없는 우리 딸’이라는 글씨가 정성스럽게 쓰여 있었다.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길, 날은 이미 컴컴해졌다. 집 앞에 도착한 김씨가 “엄마” 하고 외쳤다. 세 식구가 나란히 대문 앞에 섰다. 김씨 가족의 41년 동행에 사회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