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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27일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청사 앞에서 1인시위를 하는 고 안학수 하사의 동생 안용수씨. 그가 50년간 몸으로 겪은 국가는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였다. “국군포로인 형을 탈영·월북자로 조작한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시인하고 사과하라”는 요구를 앞으로도 멈추지 않겠다고 말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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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 ‘포로 안학수’ 동생 안용수의 투쟁
베트남에서 실종된 형의 생사를 확인한 곳은 <노동신문> 대남 선전 기사
군·정보기관은 형을 ‘범법자·월북자’로 몰며 연좌제의 칼날을 들이댔다
교장에서 한직으로 밀려난 아버지, 미래를 빼앗긴 형제들…
고등학생이던 나도 보안사의 상습적인 고문으로 장애를 얻었다
인민군 장교 출신 탈북자에게 들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
“납북 후 고문 많이 당했고, 75년 탈북 시도하다 총살당했다”
▶ 1973년 베트남전 한국군 철수 직후 주월한국군 사령부가 집계한 국군 실종자는 7명이었습니다. 국군 포로는 0명이었습니다. 9년 동안 32만여명이 참전해 중부의 밀림에서 게릴라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는데 단 한명의 포로도 없다니. 36년이 지난 2009년이 되어서야 공식 국군포로 1명이 발생했습니다. 남북한에 모두 버림받은 비운의 참전 군인 안학수 하사입니다. 그와 가족들의 50년 이야기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게 합니다. 파병을 거부하고 일본으로 밀항한 김동희 병장은 남북한과 일본 세곳으로부터 버림받은 또 다른 경우이군요..
“아버님 전상서!
세월은 흘러 어느덧 귀국할 기간도 앞으로 3개월. 그동안 여러 번 편지를 받고는 답장을 제때 못 해드린 것 죄송합니다. 물론 궁금하셨지요? 그러나 편지를 하지 못했다고 제가 고생되는 혹은 무슨 변을 당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의 이곳 날씨는 우리나라의 초가을 날씨를 상징케 하는 것처럼 신선할 정도입니다. 하루에 몇 번씩 소나기가 오는 탓인가 봅니다. 고국에는 가뭄이 계속된다고 하니 퍽 무더웁겠구먼요.
어린 同生(동생)들도 공부 열심히 하고 있겠지요. 아버님께서는 아직 그곳에서 근무하시는지? 혹은 다른 곳으로 전근이 되시는지요?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서 걱정이 되셨겠지만 저는 그 전같이 아버님에게 생활을 기대어온 철부지한 학생이 아닙니다. 이젠 당당한 대한민국의 국토를 방위하는 육군 병장입니다. 제가 할 일은 제가 하고 제가 필요한 것은 저의 노력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생활을 합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과 같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략) 1965. 6. 28 월남 붕따우에서 鶴壽(학수) 올림.”
“미제 침략군의 총알받이로 남부윁남(월남)에 끌려갔다가 의거하여 조국으로 돌아온 전 남조선 <국군> 하사 안학수는 26일 평양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석상에서 그는 <미제와 박정희 도당에게 기만당하여 남부윁남에 끌려간 후 실지 체험을 통하여 미제야말로 남조선을 침략하고 우리민족을 분렬시킨 원쑤일뿐만 아니라 남부윁남에서 저들의 식민지통치를 유지하려고 발악하는 침략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박정희 도당은 미제 침략자들에게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고 있는 더러운 반역자이며 미제의 충실한 앞잡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게 되었으며 남부윁남인민들의 투쟁이 자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정의의 투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면서 바로 이 엄연한 진리가 자기로 하여금 의거하게 하였다고 말하였다. (하략)” (<로동신문> 1967년 3월27일치)
포항 집은 어떻게 ‘베트남의 밀림’이 되었나
안용수(62)씨는 빛바랜 편지를 꺼내 다시 읽어본다. 고향과 가족에 대한 둘째 형 안학수 하사의 애틋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책임감이 강한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모습도 엿보인다. 1963년 9월 군에 입대한 안학수는 통신학교 교육을 받고 대구 제5관구사령관 암호병으로 근무하다 사령관 추천으로 베트남 파병에 차출되었다. 우수한 군 인력들을 선발한 제1차 파병단 140명(제1이동외과병원 군의관·간호사·헌병 34명과 행정지원인력 96명, 태권도교관 10명)의 일원으로 1964년 9월11일 부산항을 떠날 때 가족들은 자못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사이공(당시 남베트남 수도, 현 호찌민)에서 100㎞ 떨어진 남부 항구도시 붕따우에서 제1이동외과병원 통신병으로 근무하며 두세 달에 한번쯤 편지를 보내왔다. 예정된 1년을 넘겨 1년 더 베트남 근무를 연장했던 둘째 형은 1966년 8월 편지를 마지막으로 소식이 끊겼다. 1966년 9월9일 의약품 수령을 위해 출장 간 사이공에서 종적을 감췄고, 귀국예정일인 9월16일 김포공항 입국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6개월 뒤인 1967년 3월27일, 서울이 아닌 평양의 대남방송과 신문에 등장했다.
끊긴 편지 대신 둘째 형의 근황을 자세히 알려준 것은 북한 <로동신문>이었다. 안씨는 <로동신문> 1967년 3월27일치 1면 정중앙에 박힌 둘째 형의 기사를 다시 읽어본다. 큰제목은 ‘조국과 김일성 원수님의 따뜻한 품에 안긴 나는 지금 무한히 행복하다.’ 사진 속의 형은 손짓을 하며 북한 기자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한다. 다음날인 3월28일치 <로동신문>에서 안 하사는 꽃다발을 흔들며 군중들의 박수에 답한다. 모란봉청년문화극장에서 열린 평양시 환영군중대회장 단상에 나온 사진이다. 3월29일치 신문엔 평양시 학생청년 환영대회가 열렸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3월30일부터는 ‘내가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의 안 하사 수기가 8차례에 걸쳐 연재된다. 상투적인 남한 비방과 김일성 찬양 일색이었다. 곧이곧대로 믿을 만한가. 냉전시대의 전형적인 심리전이자 체제선전 전술은 아닌가. 가족들은 안학수 하사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시키는 대로 했다고 보았다. 어떻게 베트남 밀림을 뚫고 월북하겠다는 생각을 하겠는가. 월북할 이유도 없었다. 아버지 안영술(1922년생·2001년 사망)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나온 대구사범 출신의 국민학교(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초청으로 대구사범 시절의 은사 김영기 선생과 함께 청와대를 다녀오기도 했다. 청와대 교육행정관으로 내정됐다고 알려지면서 주변의 부러움을 받는 집안이었다. 안 하사는 베트남에서도 성경과 찬송가책을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붕따우에선 성당을 다녔다. 대한민국 정보기관은 북한에 ‘심리전 중지나 포로 송환’ 요구를 하기보다는 그들의 선전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안 하사가 자진 월북했다고 단정했다.
사이공 실종 뒤 평양에 나타나 탈영·월북자 된 둘째 형 안학수
고문과 감시로 가족 파탄 났지만
50년간 끈질긴 국가와의 증거싸움
국가는 지고도 끝내 승복 안한다 “포로는 한명도 없다”던 정부
베트콩쪽이 포로 데려가라 하자
민간인 복장 입히고 귀국시켰다
국무회의에선 아예 실종자를
탈영자·범법자로 몰기로 했다 안 하사가 베트남에서 사라지면서, 베트남전의 악몽은 오롯이 포항에 남은 가족들 몫이 되었다. 또 하나의 ‘베트남전쟁’이었다. 늪과 밀림은 없었다. 숨어서 저격을 가하고 포탄을 퍼붓는 베트콩은 없었다. 집과 학교와 직장은 보이지 않는 총알과 포탄이 쏟아지는 공포의 늪과 밀림으로 변해갔다. 보안사(현 기무사) 요원들이 베트콩보다 더 무서웠다. 그들은 안용수씨 가족을 ‘적’으로 취급하고 공격했다. “안학수는 월북했다. 당신들은 잠재적 스파이다.” 고문과 구타, 사직 압력, 불이익 협박이 이어졌다. 졸지에 빨갱이 가족이 된 아버지와 어머니(남금순, 1922년생, 2001년 사망), 4형제는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살았다. 재직중이던 포항 동부국민학교 교장 관사에서 쫓겨난 아버지는 횡성의 학습교재창 임시노무원으로 강제취업당했다가 2년 만에 화병으로 그만두고 무직자 신세가 됐다. 항일운동 경력이 있음에도, 독립유공자 서훈심사 대상 자격을 박탈당했다. 공기업에 다니던 큰형 성수(1941년생)씨는 진급이 안 돼 말단 직원으로 퇴직을 했다. 셋째 형 인수(1949년생)씨는 군 복무중 보안사에 끌려가 문초를 당했고, 제대 뒤 작은 회사의 사환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다. 동생 철수(1955년생)씨는 신원 이상자라는 이유로 해군사관학교에 합격하고도 입학이 불허됐다. 긴 세월 방황하다 종교인의 길을 걸었다. 넷째 아들인 용수씨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보안사 포항지부에 끌려가 상습적인 고문과 구타를 당하다 장애3급 판정을 받았다. 연좌제의 덫에 걸려 사법고시 응시는 물론 본인이 희망하는 대학 입학도 좌절됐다. 현역 입대를 하지 않는 서울교대에 강제로 입학하게 돼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했지만 1980년 사직당했다. 그 뒤 총신대 종교교육과에 편입해 졸업했고, 여권 신원조회가 사라진 1984년 스코틀랜드 애버딘으로 떠나 신학을 공부했다. 보안사 요원은 그곳까지 따라왔다. 1988년 귀국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신경계 기능이상(신체정상화) 등 고문후유증으로 투병하다 2007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금은 ‘한반도국제대학원’에 시간강사(고대문헌 해석학)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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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 국군 하사’ 안학수가 월북해 기자회견을 했다고 보도한 1967년 3월27일치 <로동신문>. 베트남전 한국군 파병이 절정을 이룬1967~1968년의 남북관계는 최악이었다. 정보기관은 납북 가능성을 배제하고 북한 언론 보도만을 근거 삼아 안 하사를 ‘월북자’로 단정했다. (왼쪽 위)“한국군 포로가 단 한명도 없다”고 천명한 <전우신문> 1973년 3월16일치의 이세호 주월한국군사령관 귀국 기자회견 보도. (왼쪽 아래) 베트남전 실종자를 탈영자로 간주한다는 1973년 3월27일 국무회의 의결 내용. 정부는 실종자 송환 노력을 포기했다.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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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학수가 포로였다고 증언했다
정부는 40여년간 이를 숨기면서
2008년까지 ‘월북자’ 취급 했다
그 잘못은 절대 시인 않고 있다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에서
재판부는 정부 불법행위의
불가피성만 따지는 듯했다
2009년에 진실 밝혀졌는데도
90년대 소송 안한 걸 문제삼아 실종 초기 상황도 미스터리다. 1966년 9월9일 안 하사가 사이공에서 사라진 뒤 일일전투상보에 의한 보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통지 의무도 지켜지지 않았다. 당사자가 근무지인 제1이동외과병원에 나타나지 않는데도, 10월1일 하사 호봉 승급 인사명령까지 그대로 진행했다. 실종 뒤에도 안 하사는 계속 정상 근무자로 처리됐다. 당시 제1이동외과병원 병원장이었던 송익훈(당시 중령)씨와 상급부대인 건설지원단(나중에 비둘기부대) 보안대장인 송재철(당시 중령)씨는 2008년 9월 <추적60분>(한국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안학수 실종에 관해 그 어떤 보고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행정총괄장교였던 김학영(당시 소령)씨는 “실종 사실을 알고 걱정은 되었지만 귀대할 줄 알고 조사나 보고는 안 했다”고 증언했다. 안용수씨가 나중에 확인한 안 하사의 군 인사기록카드는 위·변조 흔적으로 가득했다. 6하원칙 없이 사실관계가 엉성한 돈과 여자 문제를 월북 동기인 양 서술해 놓았다. 탈영과 탈삭(병적 삭제) 일자를 기록한 글씨체도 여러 사람이 쓴 것처럼 뒤죽박죽이었다. 나중에 한국에서 누군가가 조작할 의도로 기재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2008년 정부 합동조사단은 그 ‘누군가’의 실체를 밝히지 않았다. 합조단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요구 거절 당해 돌이켜보면, 여기까지도 기적이었다. 2001년 아버지가 임종하며 자신에게 “원통해서 눈을 못 감겠다. 용수 네가 꼭 해결하라”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면 끈질기게 달라붙어 투쟁하지 않았다. 두 형님은 50여년 전 그 사건 이야기를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선교사가 된 동생은 미국에 있다. 안씨는 외롭게 홀로 분투했다. 국정원·기무사·국방부 공무원들과의 싸움이었다. 1970년대에 그들은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말을 붙이기도 힘들었다. “빨갱이 동생이 왜 전화했느냐” “월북자가 맞는데 왜 성가시게 구느냐”며 욕설을 던졌다. 1992년 노태우 정부 때까지 그랬다. 1993년 김영삼 정부 이후 분위기가 변하긴 했다. 2008년 통일부 납북피해자지원단을 중심으로 정부 합동조사단이 구성될 때 안씨는 가족 대표나 가족을 대신할 전문가가 참여하게 해 달라고 요구했다. 합동조사단의 국방부 실무자는 ‘친절하게’ 거절했다. “그동안 고생하셨다. 우리가 조사 잘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키면서도 요구는 들어주지 않았다. 안씨는 “기만당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전쟁 상황에서 적국의 포로를 학대한다면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적국에 붙잡힌 자국의 포로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그 가족을 수십년에 걸쳐 학대한 행위는 어떨까. 역설적으로 더 기가 막힌 ‘전쟁범죄’에 속하지 않을까. 교학사에서 발행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332쪽 ‘박정희 정부의 압축성장과 그 열매’ 편에서 “베트남 파병을 통해 얻어지는 경제적 효과를 통해 외화를 조달하고자 노력하였다”고 설명한다. 구체적인 예로 “1965년에서 1973년까지 베트남 수출 초과액은 28억3천만달러이고 파견된 군인들과 근로자들, 기업의 사업소득은 1965~1972년 사이에 총 7억5천만달러”라고 한다. 사람이 죽어나간 전쟁터에서 얼마나 달콤한 열매를 따먹었는지만을 계산하는 일은 염치없어 보인다. 그 그늘 아래서 어떤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렸고 또 지금도 흘리는지 헤아려보는 게 파병 50주년에 더 걸맞은 일은 아닐까. 논란이 돼온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나, 참전군인들의 고엽제 후유증 문제가 그렇다. 안 하사와 같은 국군포로의‘월북자 조작’ 문제도 마찬가지다. 안용수씨는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 가족과의 증거싸움, 진실게임에서 졌다”고 단언했다. 남은 것은 시인과 사과다. 안씨는 그것이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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