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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의 피고인 유우성씨는 지난 16일 오후 서울 서초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무실에서 열린 검찰의 증거조작 의혹 해명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유씨는 이날 자신의 입장을 밝히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때로는 답답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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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 유우성·유가려 남매 이야기
▶ 서울시공무원 간첩사건의 피의자 유우성씨는 간첩으로 몰려 1년째 재판정에서 시달리고 있습니다. 유죄를 입증하겠다고 나선 검찰과 국정원이 증거조작을 했다는 중국 정부의 통보에 유씨는 크게 절망했습니다. 중국에 머물고 있는 유씨의 가족들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유씨와 유씨 가족들을 다시 만나보았습니다. 간첩임을 밝혀내려 한 게 아니라 간첩을 만들려고 한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피의자 유우성(34)씨는 요즘 인터넷 뉴스 검색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언론이 검찰의 증거 위조 의혹을 다루는 것에 크게 고무됐다. 지난해 초 ‘서울시청에 간첩이 근무하고 있었다’고 발표한 검찰의 말을 대서특필하던 언론들이 항소심 재판정에서 불거지고 있던 증거 위조 의혹에는 침묵으로 일관하자 크게 낙담했던 유씨였다. 일부에서는 ‘국가정보원이 비공식적으로 입수한 문서여도 내용만 맞으면 괜찮다’는 설명으로 사건의 본질을 희석하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이 입수했다고 하는 출입경기록이 유씨의 실제 여권기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도하는 언론은 적다. “(서울시에서 근무할 때) 탈북자가 아니고 (기초생활)수급자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고!” 지난 20일 밤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유씨가 화를 냈다. 텔레비전에서는 한 종편 프로그램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을 정리한다며 유씨가 서울시에서 탈북자를 관리했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틀린 설명이었다. 탈북자 정보를 북에 건넸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유씨는 언론 보도 하나하나에 예민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저는 남한이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서 건너왔는데, 국가기관이 이렇게 증거를 조작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저는 정말 북한이 싫어서 건너온 사람입니다. 검찰은 왜 저를 계속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걸까요.” 20일 밤 자신의 서울 강동구 집에서 기자와 만난 유씨가 맥주를 벌컥 들이켜며 말했다. 유씨는 지난해 8월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뒤에도 지금까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까닭도 없이 두시간에 한번씩 깬다. 그동안 겪은 고통에 대한 후유증이다. 술을 들이켜면 조금 빨리 잠을 잘 수 있다. 수면제를 1년 가까이 먹어온 유씨는 이제 약에 의지한 잠을 줄이려 노력중이다.조선족 동포가 사는 연길에도
간첩 증거조작 사건이 알려지며
남매 얼굴은 꽤 알려져버렸다
티브이에 나오는 유씨의 얼굴이
가족들은 반가우면서도 슬프다
유씨는 인터넷 뉴스 검색으로
매일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검찰 말 대서특필하던 언론이
증거조작 의혹에 침묵하는 데
크게 낙담하며 절망하고 있다
북한이 싫어 남한으로 넘어왔는데… 유우성씨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나고 자란 재북 화교였다. 유씨는 “고조할아버지가 일제에 대항해 조선인들과 함께 싸웠던 한족 독립운동가였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후손들이 중국이 아닌 조선 땅에 정착하기를 바랐다. 할아버지는 조선 반도에서 숨을 거뒀다. 자손들은 조선 땅에 정착했고 한국전쟁 이후 그곳은 북한이 되었다. 그러나 유씨는 커갈수록 북한 정권이 싫어졌다. 관리들은 여유롭게 사는데 서민들은 너무 가난했다. 부자 세습 독재정권이 계속되는 게 못마땅했다. 2001년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탈북 직전까지 회령시의 한 병원에서 준의사(의사보조. 3년제인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면 준의사 자격증을 받는다)로 근무했다고 한다. 치료약이 없어 죽는 주민이 너무 많았다. 의사들은 약을 빼돌려 생계 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며 살고 싶어 의사가 되었지만 북한에서 의사로 사는 것이 점점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유씨는 재북 화교여서 중국을 다녀볼 기회가 남들에 비해 많았다. 두만강만 넘으면 입을 것 먹을 것이 넘쳐났고 병에 걸린 사람들도 병원에서 좋은 치료를 받는 것을 목격했다. 같은 하늘 아래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북한은 한심한 감옥 같은 곳이었어요. 아무리 의술이 높아도 의료설비와 의약품이 없으면 결코 환자들을 치료할 수 없는 곳이었어요. 점점 북한 사회가 싫어졌어요.” 그러나 유씨는 중국이 아닌 한국에서 살고 싶었다.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한반도에서 한민족처럼 살아왔기에 중국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남한에서의 ‘제2의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유씨는 2004년 3월 북한을 나와 중국-라오스-베트남-타이를 거쳐 한달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살아남기 위해 막노동, 보따리상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고생 끝에 2007년 연세대학교 중문학과에 편입했고 2011년 6월 서울시청 복지정책과 생활보장팀 계약직 공무원이 되었다. 생활이 안정되자 동생 유가려(27)씨를 데려와 함께 살고 싶었다. 동생은 아버지 유아무개씨와 함께 2011년 7월 북한을 완전히 나와 중국 국적 취득을 위해 연길시에 머무르고 있었다. 유우성씨는 평소 자신과 연락하고 지내던 국정원 관계자에게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동생을 한국에 데려오고 싶다고 말하니까 선생님(국정원 관계자)은 ‘한국에 데려오면 잘 도와주겠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데려온 건데 마치 제가 북한 보위부의 지시를 받고 데려온 것처럼 국정원과 검찰은 주장했어요.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유씨는 국정원을 믿었다. 2012년 10월30일 동생을 제주공항을 통해 입국시켰다. 국정원에 자진신고했다. 국정원이 운영하는 경기도 합동신문센터(탈북자 신원 등을 확인하는 기관)에서 동생이 몇개월 머물다 조사가 끝나면 곧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유씨는 기대했다. 동생은 바로 합동신문센터로 보내졌다. 그러나 동생은 풀려나지 않았다. 2013년 1월10일 아침 국정원 수사관들이 유우성씨의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눈을 가린 채 승합차에 태워졌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서울구치소에 입감됐고 파란색 수형복을 입게 됐다. 동생을 한국에 데려오면 도와주겠다던 국정원 관계자는 더이상 유씨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국정원의 설명은 황당했다. 동생 유가려씨가 “오빠가 간첩”이라고 자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유가려씨는 ‘고문을 받고 허위 자백했다’며 기존 국정원에서의 진술을 뒤집었다. 국정원 수사 결과를 토대로 작성된 검찰 공소장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도 여럿 확인됐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진행한 중국 현지 조사가 큰 역할을 했다. 탈북자 간첩사건에서 중국 현지 조사가 이뤄진 적은 없었다. 결국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는 지난해 8월22일 유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항소했지만 통상적인 절차로 보였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이 사건은 검찰이 새로운 증거를 제출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검찰은 지난해 11월1일 유씨가 북한과 중국을 오갈 때 기록된 출입경기록을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했다. 기록에는 유씨가 2006년 5월27일 오전 10시24분 중국 용정시 삼합변방검사참(중국-북한 국경지대의 중국 쪽 세관)을 통해 북한 회령시에서 나온 뒤 한시간도 안 돼 오전 11시16분 다시 북으로 들어갔다가 2006년 6월10일 오후 3시17분 역시 삼합검사참을 통해 북에서 나온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유씨가 2006년 5월27일 이후 다시 북한에 간 적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씨는 이 출입경기록이 가짜라고 확신했다. 유씨는 연길로 돌아간 동생에게 위임장을 보내 자신의 출입경기록을 발급받아 오게 했다. 놀랍게도 검찰이 제출한 출입경기록과 달랐다. 중국 공안이 보관중인 유씨의 실제 여권기록은 유씨가 발급받아온 출입경기록과만 내용이 일치했다. 법정에서 위조 공방이 오갔다. 지난 17일 중국 정부는 한국 재판부에 공문을 보내 ‘한국 검찰이 제출한 3건의 문서는 모두 위조’라고 통보했다. 간첩사건이 간첩조작사건으로 국면이 바뀌었다. [관련영상] [최성진·허재현의 토요팟] #7. '유우성 간첩 조작' 중국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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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중국 연길시에서 만난 유우성씨의 동생 유가려씨가 기자와 인터뷰하는 도중 과거의 아픔이 떠올라 눈물을 흘리고 있다.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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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과 국정원은 ‘그날’ 이후
유씨의 행적 증명해줄 증인은
조사하지 않거나 무시한 채
북한서 유씨 봤다는 탈북자들만
법정에서 증인으로 내세운다
2007년 국정원의 부탁을 받고
북한 첩보활동하는 탈북자에게
정보요원 활동을 제의받았다
국정원에 잘 보여야 했지만
유씨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유가려씨가 티브이 보다 놀라는 이유 유우성씨의 어머니 조아무개씨는 2006년 5월22일 숨졌다. 남한에 머물고 있던 아들과 몰래 전화통화를 하다가 보위부의 기습단속에 걸렸다는 게 유씨의 말이다. 평소 심장이 좋지 않던 조씨는 깜짝 놀라 심장이 멎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이 일로 유씨는 보위부 요원이 될 게 아니라 보위부를 적으로 삼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검찰은 유씨와 그의 친구들, 친척들의 일관된 진술은 무시하고 유가려씨가 국정원에서 고문받아 허위 자백한 것으로 보이는 진술에만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사 과정에서 유씨가 북한을 드나들며 간첩활동을 했다고 볼 수 없는 여러 증거들이 확보됐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간첩으로 보일 만한 증거들만 꿰어맞추어 공소장을 작성했다면 이것은 ‘간첩을 잡는’ 게 아니라 ‘간첩을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유씨는 이러한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결과를 미리 만들어놓고 수사를 하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제가 간첩이 아니라는 진술을 하는 사람들의 말은 모두 무시하고, 저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악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진술만 검찰은 받아들이고 있어요. 재판부는 동생이 국정원에서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사실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유씨는 2007년 국정원의 부탁을 받고 북한 첩보활동을 하는 탈북자로부터 함께 정보요원 활동을 하자고 제의받은 적이 있다. 유씨는 거절했다. 북한과 접촉도 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에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허위 정보를 건네주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유씨의 판단이었다. “혹시 그때 국정원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제가 이렇게 간첩으로 몰리지 않았을까요.” 유씨는 대체 자신이 왜 간첩으로 의심을 사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호소했다. “저는 남한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제발 좀 저를 평범한 한국 국민으로 살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텔레비전 뉴스에 자주 얼굴이 나오면서 이제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생계를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학부모가 유씨의 얼굴을 알아차려 더이상 오지 말라고 통보했다. 안정적인 일자리였던 서울시 공무원 일자리도 잃고, 1년 동안 재판정에 오가느라 유씨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 동생 유가려씨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괴롭혔던 국정원 수사관들이 가끔 집회 현장에 나타나 텔레비전 뉴스 카메라에 잡힌다. 텔레비전을 보던 유가려씨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이런 날은 제대로 잠을 이루기 어렵다. “국정원과 검찰의 증거 조작을 밝히는 게 국익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억울한 사람의 한을 그대로 묻어두는 게 국익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유가려씨는 조국으로 삼고 싶어 건너왔던 한국 사회가 자신의 기대와 다른 것이 슬프다. 중국 연길/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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