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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무라이 요시노리 전 와세다대 교수는 <새우와 일본인>, <순다 생활지> 등 많은 책을 남겼다. 그러나 한국어로 출판된 것은 부인 우쓰미 아이코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소장과 함께 쓴 <적도에 묻히다>뿐이다. 지난 4일 서울 종로구 재동의 골목길에서 우쓰미 소장(앞 왼쪽)과 이영채 게이센여학원대 교수(앞 오른쪽)가 무라이 교수의 책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섰다. 함께 대담을 나눈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왼쪽), 서해성 작가도 두 사람 뒤에서 웃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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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무라이 요시노리를 말한다
대담 장소를 서울 종로구 재동 ‘카페 코’로 정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2011년 여름 한국을 찾은 무라이 요시노리 당시 와세다대 교수, 우쓰미 아이코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소장, 이영채 게이센여학원대 교수와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서해성 작가가 바로 이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지난 4일 늦은 오후 일본에서 막 서울에 도착한 우쓰미 소장과 이영채 교수를 한홍구 교수, 서해성 작가가 반갑게 맞이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무라이 교수는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없었지만, 네 사람의 대화 속에서 그의 네 가지 빛깔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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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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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대동아공영권과 달리
아래로부터 아시아가 어떻게
만날 것인지 고민했던 아시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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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채 게이센여학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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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된 일본, 아시아 깔봤지만
걷고 보고 물어보는 방식을 통해
아시아인들의 풍요로움 깨달아”
미국이 싫었던 안보투쟁·전공투 세대 이영채 무라이 선생이 돌아가신 지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서해성 2년 반 전 여름에 이 방에서 무라이, 우쓰미 선생 내외분과 새우, 오징어 이야기를 나누었죠. 덕분에 그날은 북촌에 새우 떼, 오징어 떼가 그득했습니다. 한홍구 다음에 만날 땐 멸치 이야기를 하자고 했는데, 멸치 대신 무라이 선생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선생이 위중하다는 얘길 듣고 저와 서해성이 도쿄 옆 지바현에 있는 집을 찾아갔죠. 한국 독자들을 위해 무라이 선생이 고민했던 아시아 개념부터 풀어가보죠. 선생은 일제의 대동아공영권과 달리 아래로부터 아시아가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해 선구적으로 고민했던 아시아인이었습니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이웃 나라를 침략했던 일본이 어떻게 아시아와 다시 만날 것인지에 대해 가장 진지한 고민을 하신 분이지요. 부인인 우쓰미 아이코 선생께서 이후 연구를 더 많이 하셨지만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이 된 조선인 포로감시원인 양칠성같이 한국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발굴해 우리 현대사의 영역을 확장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영채 무라이 선생과 우쓰미 선생은 어떻게 처음 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우쓰미 아이코 무라이나 저는 미국 점령하에서 자란 세대입니다. 저희들은 미국이 싫었습니다. 무라이의 원래 전공은 막스 베버였습니다. 종교와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죠.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의 사회와 종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무라이가 인도네시아의 순다에서 1975년부터 2년간 유학을 했는데 그때 동행했습니다. 유학 생활을 통해 대학에서 배운 이론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이를 다 버렸습니다. 선입견을 버리고 현지를 걸어 다니면서 거기 사는 어민, 보통사람들 목소리를 듣고 연구를 다시 한 거죠. 그래서 유학은 갔지만 대학에는 거의 가지 않았습니다. 매일 걸었고, 나비 잡는 걸 좋아해서 곤충을 잡으러 다녔죠. 한홍구 무라이 선생님이 그런 작업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현지에 가서 조사하고 그 땅을 밟지 않았으면 말하지 말라’던 마오쩌둥의 말이 생각났어요. 이영채 당시 생활을 담은 <순다 생활지>(1978년)는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아시아는 뒤떨어진 지역이라 생각했던 이들에게 아시아인들의 생활 속에 얼마나 풍요로움이 넘치는지 보여준 것이죠. 또 미국식 연구 틀에 구애받지 않고 쓴 여행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방식이 충격을 주었습니다. 우쓰미 무라이를 통해 일본 사회는 아시아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일본 기업들이 해외 진출을 시작한 것은 1965년입니다. 유학 뒤에 공동작업을 한 것 중 하나가 일본 다국적기업 인도네시아 진출 현황이었습니다. 1980년대 관광객이 증가하기 전에 기업이 먼저 진출했습니다. 한홍구 한국에선 이런 작업이 1997~98년 무렵에 시작되죠. 우쓰미 선생이나 무라이 선생 세대는 미국 점령하에서 교육을 받고 안보투쟁(일-미 상호방위조약 개정 반대운동)과 전공투(전학공투회의, 60년대 일본 학생운동)를 거친 다음에 유학을 가잖아요. 그럼 보통 좀 큰 것, 구조적인 것에 관심을 갖기 쉬운데 어떻게 새우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됐나요. 우쓰미 선생도 한국사의 큰 흐름에서 보면 툭 떨어져 있는 조선인 비시(BC)급 전범 문제를 연구해 오셨는데요. 우쓰미 전 영어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다큐멘터리 조선인>(일본독서신문출판부, 1965년)을 읽고 역사적 배경을 조금 알고 있었지요. 일본인은 조선이 식민지라는 걸 말로는 알고 있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당시 잘 몰랐습니다. 교사를 그만두고 자이니치 여성에 대한 구술조사를 하다가 일본에 조선인 전범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때는 전범은 전쟁범죄자라고 여겨 깊게 연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요. 무라이는 ‘무라이 재벌’이라는 신흥재벌가계에서 태어났습니다. 차남이라 재벌가 구조에 조금은 답답함을 가졌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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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여름처럼 서울 종로구 재동 ‘카페 코’에 서해성 작가(왼쪽부터), 한홍구 교수, 우쓰미 소장, 이영채 교수가 둘러앉았다. 김성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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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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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조선인 포로 관리인들 보면
중첩된 모순에 숨이 막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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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쓰미 아이코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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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이자 가해자 된 한국이
아시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한국인들도 생각할 때가 되었다”
아시아인의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서해성 한마디 더 거들자면 일본의 농업·바다 양식기술은 세계적입니다. 식민지 경영은 육종학적 발전을 동반해왔습니다. 기술지배와 함께 집약적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지요. 새우 양식기술은 대만, 한국, 동아시아로 수출됩니다. 식민지배 순서와 유사한 배열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기술발전을 외면하자는 게 아니라 그 정치적 배후를 돌아보고 해명하는 데서 아시아학은 출발선을 삼을 수 있습니다. 이영채 무라이 선생은 현지 주민 생활방식이 지속되는 방안이 뭔지 고민해왔습니다. 가령 그렇게 해서 인도네시아 현지 전통어업방식으로 생산한 새우(에코 슈림프·환경 새우)를 민중무역 형태로 수입하고 있습니다. 서해성 가구 하면 한국인에게 떠오르는 게 보르네오잖아요. 대동아전쟁은 이곳에서 나오는 석유를 일본으로 끌어오기 위한 것이기도 했는데 이게 미군에게 끊기면서 전쟁 판도가 달라집니다. 전후에는 나무를 베어냈지요. 한국인이 뒤따라갔습니다. 근래에는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노천탄광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현장에 가보았는데, 보르네오와 칼리만탄에서 원시림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요새는 바이오오일이 문제입니다. 팜오일 열매가 열리는 클라파 사윗을 심느라 광범한 숲에서 일상적으로 방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선진국’의 바이오적 사고가 야기하고 있는 사태라는 걸 잘 새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영채 무라이 선생을 통해서 보면 전후 일본이 아시아와 어떻게 대면해왔는지 알 수 있지요. 근대화한 일본은 아시아를 깔보았지만 아시아 서민들 생활 속에 풍요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라이 선생은 걷고, 보고, 물어보는 연구방식을 통해 새 길을 열었습니다. 우쓰미 무라이는 인도네시아에 가서 삶과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별로 말이 없고 내성적이었는데 인도네시아 사람과 만나면서 해방되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그는 기존 학문체계를 답습하는 게 아니라 이들과 삶이 지속되는 연구를 하고 싶어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사는데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는 구조에 의문을 갖고, 이를 바꾸고 싶어했던 거죠. 한국에 와서도 유명한 사람 만나는 것보다 길에서 만나는 한국 사람이 가장 좋다고 했습니다. 덧붙여 한-일 관계만 생각하면 한국은 피해자지만 한국 기업과 군대가 아시아에 진출하면서 가해자가 되기도 합니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한국인들은 생각할 때가 되었습니다. 차별은 항상 중층적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가해자, 저 사람은 피해자라는 단순구조는 없습니다. 한홍구 짧은 대담을 통해 한국 독자들이 무라이 선생을 얼마나 이해하게 됐을지 염려되는 점도 있지만 먼발치에서 뵙기에 훌륭한 삶을 살았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영채 개인적으로 일본에서 우쓰미, 무라이 선생을 만난 건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무라이 선생은 구체적으로 제시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찾아갔을 때 꼭 듣고 싶은 노래가 있다고 하더군요. 같이 불렀는데. 이때 우셨어요. 우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서해성 함께 부를 노래가 있다는 건 함께 울 이유가 있는 까닭이지요. 함께 도모해야 할 미래 또한 있다는 뜻이지요. 이게 아시아인의 노래거든요.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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