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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이 요시노리가 2006년 12월 동자바주 수라바야의 인근 도시 시도아르조 지역을 방문해 현지 아이들과 즐겁게 얘기를 나누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가스개발회사인 라핀도 브란타스는 이 지역에서 무리한 채굴작업을 벌이다 주변에 있는 루시 화산을 자극해 대량의 진흙 분출 사고를 일으킨 바 있다. 이 사고로 시도아르조 인근 13개 마을이 진흙에 묻혀 3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우쓰미 아이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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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무라이 요시노리와 아시아
▶ 우리에게 아시아는 무엇일까. 한국 경제를 위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고, 삼승(삼성) 스마트폰, 훈다이(현대) 자동차, 엘지 피디피(PDP)를 수입하며, 한국의 공해 산업을 선뜻 받아들이는 얼굴 없는 타자는 아니었을까. 지난 식민 지배의 고통을 피를 토하며 강변하는 한국인들은 어느새 일본보다 더 무자비한 침략자로 변하고 말았다. 새우를 통해 아시아와 일본의 지배-종속관계를 밝혀낸 무라이 요시노리(1943~2013년)는 한국인들에게 지금, 그 자리에 멈춰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라고 말한다.
‘바나나는 언제부터 싸졌지?’
30대 후반 이상이라면 모두 기억하는 사실이겠지만, 한때 한국인들에게 바나나는 생일이 아니면 좀처럼 손댈 수 없는 고급 과일이었다. 1977년 4월21일치 <매일경제>에 실린 봄철 과일 시세를 보면, 16개짜리 바나나 한송이의 가격은 무려 5500원(개당 343원)인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짜장면 한그릇이 200원이었으니 바나나 한개가 짜장면보다 더 비쌌던 셈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동남아시아 바나나에 대한 수입 규제가 완화되면서 가격은 급락하고 보편화되지만, 한국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바나나 너머에 있는 필리핀 민중의 삶에까진 이르지 못하고 있다.
야나가와 시치세이, 아니 ‘양칠성’을 찾다
한국 기업들의 동남아 진출이 증가하면서 한국 사회의 자성이 요구되는 불행한 사건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1월3일 캄보디아에 진출한 의류업체 약진통상에 근무하던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호소하며 벌인 시위에 군대가 발포해 5명이 숨졌다. 그로부터 엿새 뒤인 9일 방글라데시에서 한국 업체 영원무역의 수당 삭감에 저항하던 여성 노동자가 경찰이 쏜 실탄에 맞아 죽었고, 같은 날 새벽 베트남 삼성전자 건설현장에선 현지 노동자에 대한 경비직원의 폭력이 노동자들의 집단저항을 불러왔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피해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아시아 이웃들은 언제부터인가 “가해자 한국”을 외치고 있다. 한국과 아시아의 관계 맺기는 이대로 좋은 것일까?
이영채 게이센여학원대 교수(국제사회학)는 “요즘 같은 상황에서 한국이 아시아 민중들의 연대를 소중히 생각했던 무라이 요시노리의 아시아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인들에겐 생경한 무라이 요시노리(1943~2013)는 걷고, 묻고, 체험하는 방식으로 동남아 민중들의 삶을 연구해 일본의 동남아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23일은 췌장암으로 숨진 그의 1주기다.
한국엔 무라이보다 그의 평생의 반려자였던 조선인 비시(BC)급 전범 연구가 우쓰미 아이코(72)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소장이 더 잘 알려져 있다. 무라이와 우쓰미는 1975년 11월 인도네시아 유학 당시 조선인 포로 감시원으로 전쟁에 동원됐던 양칠성(1919~1949)이라는 인물을 발굴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인 군무원 양칠성은 해방 이후 현지에 남아 인도네시아 무장독립투쟁을 지원하다 네덜란드군에 잡혀 총살돼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으로 모셔져 있다. 무라이 부부가 일본인 ‘야나가와 시치세이’가 사실은 조선인 양칠성이라는 사실을 파악해 유족을 찾아주는 과정은 이명박 정부 시절 민간인 사찰 피해를 본 김종익씨가 번역한 책 <적도에 묻히다>(2012년)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무라이의 아시아학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는 현상을 거대한 이론적인 틀이 아닌 새우, 커피, 초콜릿과 같은 평범한 사물을 통해 분석해 일본과 아시아 국가가 맺고 있는 관계의 본질을 들춰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대표작 <새우와 일본인>(1988년)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바나나와 새우는 별 관계가 없는 식품이다. 그러나 일본인 소비자 입장에서 본다면 이 둘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1950년대 태어난 일본인에게 바나나도 새우도 고급 식품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중략) 왜 (일본인들은) 새우를 이렇게 많이 먹을 수 있게 된 것일까. 새우는 대체 어디서 수입된 것일까. 새우를 잡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일본에 새우를 파는 것으로 인해, 수출하는 쪽에는 어떤 일이 발생하고 있을까.”
무라이의 동남아 연구가 시작된 1970년대 중반은 일본이 경제력을 앞세워 동남아를 석권해 가던 시기와 겹친다. 태평양전쟁 시절 일본의 침략은 총칼을 앞세운 것이었지만, 전후의 침략은 자본을 앞세워 다방면에 걸쳐 이뤄졌다. 그중 하나가 새우였다. 1960년 625t에 불과했던 일본의 새우 수입량은 26년 만인 1986년 무려 21만t으로 세계 1위를 기록한다. 일본의 새우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많은 해안과 산림은 황폐화됐고, 주민들은 새우 가공 농장의 저임금 노동자로 고용됐다. 침략의 수단이 총칼에서 자본으로 바뀌었을 뿐, 일본과 동남아 사이의 지배-종속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일본에서 1960년 625t이었던
새우 수입량 1986년 21만t으로
크게 늘어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왜 새우 많이 먹을 수 있게 됐나’
무라이는 새우를 쫓아갔다
일본 기업들에 이익 남겨주고
현지인들에게는 피해만 안겨준
공적개발원조의 진실도 알렸다
그는 일본 외무성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인물이었다
왜 공정무역 대신 민중무역인가 그에 대한 무라이의 해답은 아시아의 민중이 상품 거래를 통해 연대하는 ‘민중무역’이었다. 지난 25년 동안 일본에서 민중무역을 꾸준히 진행해온 에이티제이(ATJ·Alter Trade Japan)의 쓰루 아키코 인도네시아 현지 경영책임자는 “민중무역이란 단순히 좋은 먹거리를 시중 가격보다 좀 비싸게 구입한다는 의미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에이티제이가 수입한 민중무역 상품을 판매하는 아플라(APLA·Alternative People’s Linkage in Asia)가 만든 동티모르산 커피 안내서를 살펴보자. 첫장을 여니, 제품의 사진과 가격 대신 동티모르 지도와 이 나라의 정치경제 정세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동티모르의 면적은 1만4600㎢로 일본 이와테현과 거의 비슷하고 통화는 달러, 주요 수출품은 포르투갈이 들여온 커피라는 사실이 설명돼 있다. 현지 정세를 설명하는 긴 설명 끝에 이들이 내리는 결론은 “(신생 국가인) 동티모르인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일본인들이 이들의 유일한 수입원인 커피를 사줘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인을 위해 값싸고 좋은 커피를 소비하기 위해 커피를 수입하겠다는 게 아니라 일본의 민중들이 커피를 통해 동티모르 민중들의 자립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쓰루 경영책임자는 “일본 시민들이 가진 지난 전쟁과 전후의 경제착취에 대한 부채의식이 민중무역과 같은 독특한 관계 맺기를 가능케 했다”며 “그런 의미에서 우린 (서구에서 쓰는) 공정무역이라는 용어보다는 민중무역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민중무역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80년대 중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리핀의 사탕수수 산지인 네그로스섬에서 발생한 기아 사태가 직접적인 계기였다. 1985년 세계의 설탕 값이 1파운드에 18센트에서 3분의 1인 6센트로 폭락하자 농장주들은 채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탕수수의 생산을 중단했다. 네그로스엔 전체 경작지의 70%를 상위 3.5%의 지주가 독점하고 있는 등 커다란 토지 분배 문제를 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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