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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를 긴급 진단하기 위해 축구 담당 기자들과 전문가가 지난 8일 오후 한겨레신문사 9층 옥상정원에 모였다. 왼쪽부터 홍재민 <포포투> 기자, 박현철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 김대길 <한국방송> 축구해설위원, 허승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 박종식 기자 @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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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월드컵 기자·전문가 방담
▶ 홍명보와 스콜라리.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이 둘은 영웅이었습니다. 홍명보 감독은 8강 스페인전에서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시키며 활짝 웃었고, 스콜라리 감독은 브라질을 우승시키며 명장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 둘이 이번 브라질월드컵에선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았습니다. 도대체 축구가 무엇이기에 이리 야단일까요. 이번 월드컵과 한국 축구의 현실을 날카로운 분석과 재기발랄한 방담으로 만나보시죠.
우리에게 축구란 무엇인가.
수없이 많은 논란 끝에 끝내 홍명보 감독이 10일 사퇴했다. 전세계인의 축제라는 월드컵을 우리는 누구 하나 즐기지 못했다. 대신 분노하고 짜증내고 땅을 치고 울었다. 국가적 영웅이었던 홍명보 감독은 생채기만 안고 결국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4년 뒤 똑같은 일을 다시 겪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국민들과 언론은 축구협회를 가리켜 ‘축피아’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 침몰사고를 불러일으킨 적폐로 지목한 관피아에 빗댄 말이었다. 두 차례 총리 후보가 낙마한 뒤 정홍원 국무총리를 ‘유임’하기로 가닥을 잡은 것도 축구협회의 ‘홍 감독 유임’ 결정에 우호적이지 않은 여론으로 작용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 한국 국가대표팀은 무엇을 잘못한 걸까. <한겨레>는 브라질월드컵을 현지에서 취재한 박현철, 허승 스포츠부 기자와 홍재민 <포포투> 기자, 대한축구협회에서 이사를 역임한 김대길 <한국방송> 축구해설위원이 지난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 모여 월드컵에서 드러난 한국 축구의 현실을 진단했다. 사회는 김양희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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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팀을 상대로 골을 뽑아낸 알제리의 슬리마니(아래 가운데, 등번호 13)는 수시로 한국 수비진을 위협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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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길 <한국방송> 축구해설위원·전 대한축구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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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협 기술위원회 제 기능 못해
회장·부회장 결재받아야 하는
황보관 국장이 겸임하기 때문
축협 개혁과 체질개선 위해선
대의원제도를 손볼 필요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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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철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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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명 주전만 사진 찍은 한국
23명끼리도 사진 찍던 알제리
주장 구자철 인터뷰하는데
샤워하고 우르르 나가던 선수들
원팀이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기술위원회 조언도 먹히지 않았다? 김대길 이런 측면도 고려해야 한다. 기술위는 대표팀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 예를 들면 조광래 전 감독이 국가대표팀을 맡았을 때, 해외파 선수들 가운데 소속팀 경기에서 잘 뛰지 않는 선수들을 선발하곤 했다. 그래서 당시 기술위는 조 감독이 선발한 선수들의 경기출장 데이터를 정리해 ‘어떻게 이처럼 경기에 뛰지 않는 선수들을 뽑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감독도 그런 문제제기를 받으면 선수 선발을 재고했다. 하지만 이번 기술위는 그런 견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홍재민 협회 내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술위 사람들도 답답했다고 한다. 대표팀에게 기술적인 조언을 해도, 홍 감독의 입장은 ‘저희가 알아서 하겠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기술위는 이번 월드컵에서 브라질 현지에 2명의 분석관을 파견했다. 하지만 그 두 사람도 대표팀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기술위가 제 역할을 못한 이유는 축구계 특유의 선후배 관계도 작용했다.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홍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이회택, 허정무 부회장보다 한참 후배다. 같은 학교 출신은 아니지만 축구계라는 좁은 인적 관계망에서 선후배 사이다. 따라서 황보관 위원장이 협회 수뇌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 즉 선후배 관계가 조직체계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전임 기술위원장이었던 이회택 부회장은 원로급 선배여서 힘이 실렸다면, 이번 황보관 위원장은 협회 수뇌부보다 한참 후배여서 문제였다. 또 홍 감독이 ‘원팀’(하나의 팀)을 강조했는데, 그 원팀은 기술위를 배제하는 팀 안에서만의 원팀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박현철 홍명보 감독이 자꾸 원팀, 원팀 하는데, 가까이 취재하면서 보면 원팀이 아닌 것 같았다. 몇가지 사례가 있다.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선수들이 사진을 찍는다. 우리 대표팀은 11명 주전 선수들이 사진을 찍는데, 우리와 맞붙었던 알제리 선수들은 선발 출장 선수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고, 다시 벤치로 와서 전체 23명이 다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한마디로 팀 전체가 ‘치어 업’을 하더라.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러시아전 이후 훈련을 마친 대표팀 주장 구자철 선수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터뷰가 끝나기도 전에 샤워를 하고 나온 선수들이 우르르 기자회견장 앞을 지나갔다. 일부 기자들이 지나가는 선수들 쪽으로 이동하느라 인터뷰 자리가 어수선해졌다. 결국 주장 인터뷰는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원팀이 이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말로만 원팀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홍재민 결과적으로 홍명보 원맨팀이었다. 이건 어찌 보면 운명적이다. 홍명보 감독 자체가 실패를 몰랐던 사람이었고, 위기 상황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다. 경험이 부족한 면도 영향을 미쳤다. 사회자 경험이 좀 있는 지도자였으면 달랐을까. 박현철 알제리전은 홍 감독도 놀랐던 것 같다. 경기 중에도 계속 홍 감독을 지켜봤는데, 경기 초반 상대가 새 전술을 선보이고 우리 선수들이 허둥대니까 홍 감독도 일어서서 바쁘게 움직였다. 한 골, 두 골을 먹었을 때만 해도 홍 감독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소리내 지시하곤 했다. 하지만 세 골을 먹으니까 아예 앉아버리더라. 그때 기자들 사이에서 ‘야, 홍 감독이 앉았어’라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관람석에서 봐도 선수들의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감독이라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선수들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거나, 선수 교체를 통해 분위기를 바꿔줘야 한다. 하지만 홍 감독은 그냥 주저앉았다. 그러자 우리 팀이 한 골을 넣어 1-3으로 추격하자 홍 감독이 벌떡 일어났다. 그때부터 다시 의지를 보이는가 싶었는데, 다시 한 골을 먹어 1-4가 되자 홍 감독이 다시 벤치에 털썩 앉았다. 감독 본인도 그 상황을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더라. 허승 나는 한국팀이 소속된 H조 대표팀들의 훈련장 분위기를 유심히 봤다. H조 네 팀 모두 언론이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알제리와 벨기에팀의 훈련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특히 알제리는 벨기에와의 첫 경기를 아쉽게 지고서도 훈련장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선수들이 밝은 분위기로 훈련했고, 감독도 선수들을 독려하며 사기를 북돋웠다. 사회자 그런 분위기를 감독이 만들었다는 건가? 허승 감독 앞에서도 선수들이 물병 던지며 장난치는 걸 보면, 그런 분위기를 감독이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벨기에도 첫 경기에서 기대한 만큼 경기력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선수단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차분했다. 반면 한국팀은 러시아와의 첫 경기에서 비겼을 땐 훈련장 분위기가 크게 고조됐지만 알제리에 대패하자 확 가라앉았다. 선수들은 경기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할 수 있어도, 감독이라면 팀 분위기를 다잡고서 다음 경기를 준비해야 한다.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김대길 그게 다 경험의 차이다. 그런 면에서 홍 감독이 선임한 코치들도 아쉬운 면이 있다. 감독의 경험이 부족하면,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코치로 데려와야 하는데 그리하지 않았다. 홍 감독과 런던올림픽부터 호흡을 맞춰온 김태영 수석코치와 박건하 코치는 좋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재목들이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경험은 많지 않다. 홍 감독 본인이 프로팀이나 성인팀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면, 자신보다 나이가 많더라도 경험 많은 사람을 코치로 데려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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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선수(위)가 브라질월드컵 알제리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시도한 슛이 골대를 빗나가자 땅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포르투알레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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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민 <포포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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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감독 준비한 전술에서는
허리에서 공이 배급되지 않아
박주영 고립될 수밖에 없어
가장 안타까운 선수는 이청용
2부서 뛰다 보니 나쁜 습관 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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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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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비기고선 분위기 고조
알제리에 대패하자 확 가라앉아
벨기에와의 첫 경기 지고도
밝게 훈련하던 알제리 인상적
감독이 ‘일희일비’ 다잡았어야
세계 축구의 변화상 보여준 네덜란드-스페인전 사회자 분위기를 바꿔 이번 월드컵 얘기를 좀 해보자. 세 분이 브라질에 다녀왔는데 현지 분위기는 어떤가? 박현철 의외로 브라질 사람 중에서 월드컵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나는 현지 여성들에게 많이 물어봤는데, ‘월드컵’(worldcup)이란 단어도 모르는 사람이 꽤 있었다. 물론 현지에선 포르투갈어로 월드컵을 ‘코파 두 문두’(copa do mundo)라고 부른다. 그래도 매체나 광고에서 숱하게 나오는 월드컵이란 단어를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허승 브라질 사람에게 축구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맞다. 상파울루 시내의 여러 쇼핑몰에 가면, 현지 프로축구팀의 로고가 박힌 상품들이 널려 있다. 심지어 젖병과 젖꼭지 등의 육아용품도 판다. 거의 모든 물건을 다 판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의외로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도 꽤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에게 마라카낭 경기장에 대해 물었다. 그 경기장은 1950년 브라질월드컵 결승전 당시 브라질이 우루과이에 패배해 심장마비 2명, 권총 자살 2명, 실신 67명이 나오는 비극이 발생한 곳이다. 그분에게 한참 질문의 취지와 역사성에 대해 물었는데 대답은 간결했다. ‘여기는 오래된 축구 경기장인데 나는 관심이 없다’가 답변이었다. 홍재민 브라질 사람들은 이번 월드컵에 대해 불만이 많다. 브라질 현지에서 만난 기자들이 ‘자기네 집 앞 도로와 상하수도 시설이 엉망인데, 경기장과 외국인들이 머무는 호텔만 잘 지어놨다’고 불만을 표출했다. 또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는데도 경기장과 훈련장 시설이 완비되지 않는 등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브라질 사람들이 축구를 정말 좋아하고 즐길 줄 안다고 느꼈다. 경기장에서 축구를 볼 때, 한국 사람들은 공이 골대 앞에 가야 탄성이나 환호가 나온다. 하지만 브라질 사람들은 공이 골문 앞에 가지 않아도 빈 공간에 침투하거나 좋은 패스가 나오면 박수가 나온다. 박수나 야유가 나오는 타이밍을 보면 이 사람들이 정말 축구를 볼 줄 안다는 것을 느낀다. 사회자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경기는 무엇인가? 김대길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5-1로 꺾은 경기다. 세계 축구의 전술적 변화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경기였다. 지난 월드컵에서 패스의 정확도와 점유율 높은 전술을 구사하는 스페인의 ‘티키타카’ 축구가 우승을 차지하면서 세계 축구계를 주름잡았다. 그 이후로 티키타카는 한동안 세계 축구의 유행이었다. 그런 스페인을 상대로 네덜란드가 준비를 단단히 했다. 후방에 수비를 5명 두는 ‘파이브백’ 전술로 스페인의 패스축구를 무력화했다. 독일이 홈팀 브라질을 7-1로 누른 준결승전도 인상적이었지만, 이는 핵심 선수가 빠지고 과도한 긴장감이 경기를 망친 사례다. 전술적인 트렌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경기는 아니다. 허승 잉글랜드-우루과이전이 인상적이었다. 잉글랜드가 전반적으로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으나 해결사가 없었다. 반면 우루과이는 수아레스라는 해결사가 있었다. 박현철 한국-알제리전의 전반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내 생에 한번 올까 말까 한 브라질에서, 그것도 직접 보는 월드컵인데, 세상에 이런 경기를 왜 보러 왔을까 싶었다. 한국 축구대표팀 역사상 그 정도로 망가진 경기도 드물 것이다. 도대체 월드컵에서 누가 행복한 건가 사회자 지금까지 축구 얘기를 했지만, 한편으론 도대체 축구가 뭐길래 이렇게 난리인가 싶다. 박현철 축구는 묘하게 애국심을 조장한다. 실제 경기장에 가보면 경기 시작 전 20~30분간 감정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나온다. 그러고 나서 선수들이 입장하고, 애국가가 흘러나오면 나도 모르게 ‘욱하는 감정’이 밀려온다. 국가가 끝나고서 국기를 흔들며 대표팀을 연호하면 어느새 ‘꼭 이겼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경기장에 오면 이런 마음가짐과 행동이 너무 자연스럽다. 흔히 야구가 축구보다 훨씬 상업적이라고 한다. 텔레비전 광고를 하기에도 축구보단 야구가 더 좋다. 하지만 어찌 보면 축구는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야구보다 더 상업적인 면이 있다. 김대길 축구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다. 규칙도 매우 쉽다. 지금 유엔 회원국보다 많은 국가가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돼 있다. 그만큼 축구는 세계적인 스포츠다. 국제축구연맹은 축구로 세계를 교육시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축구로 막대한 자본력을 끌어와 제3세계의 교육에 투자하겠다는 계획이다. 박현철 브라질에 다녀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번 월드컵에서 누가 행복할까. 대표팀이 브라질로 출국하기 전에 감독이나 선수들 모두 즐기고 오겠다고 했다. 기자들도 즐기자고 했다. 사실 월드컵이 세계에서 가장 큰 축제 중 하나 아니냐. 말로는 다들 즐기자, 즐기자고 했지만 경기 끝나고 나서 보면 즐긴 사람이 하나 없다. 손흥민 선수는 펑펑 울었다. 물론 진 것이 억울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손흥민은 정말 최선을 다했고 잘했다. 다음 월드컵을 개최하는 러시아와 홈팀이면서 역사적인 참패를 당한 브라질은 청문회 개최 얘기도 나온다. 도대체 월드컵에서 누가 행복한 건지 모르겠다. 한국 돌아오니까 대표팀은 팬들에게 엿을 맞고, 홍명보 감독은 욕을 먹는다. 기자들은 악에 받쳐서 기사를 쓴다. 이걸 지켜보는 국민들도 짜증나고, 축구협회와 홍 감독도 욕먹느라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가 신명있는 민족이라고 했는데, 이번 월드컵을 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억눌려 있구나, 힘들게 살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월드컵으로 그걸 풀어보려 했는데, 그게 안 되니 억눌려 있는 감정이 분출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리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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