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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처럼 벌면 그냥 개다”
“대한상의는 법정단체로서, 다른 경제단체와는 달리 단순한 이익단체가 아니다. 상의의 목소리는 바르고 옳고 정확해야 한다.” 대한상의(대한상공회의소)의 새로운 역할론을 제시한 박용만 회장(두산그룹 회장)이 지난달 말로 취임 1년을 맞았다. 그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강력 반대하는 정부의 기업소득 환류세제(사내유보금 과세)의 취지에 찬성하는 등 지난 1년 동안 다른 경제단체들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며 신선한 충격을 던져줬다. 박 회장을 지난 15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 20층 회장실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그는 “옛날에는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면 되는 세상이었지만, 요즘은 개처럼 벌면 그냥 개에 불과하다”거나, “(복지재원 마련 등 필요성이 있다면 단기적으로는) 부자 증세도 가능하다”, “(법보다 더 엄격한 수준의) 규범과 관행을 지키지 않는 기업(인)은 사회적으로 왕따를 시켜야 한다”는 등 다른 재벌 총수들에게서는 듣기 힘든 메가톤급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하지만 자신을 보수-진보의 이분법적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 싫다며, 그냥 ‘합리주의자’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글 곽정수 선임기자 jskwak@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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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두산 회장이자 상의 회장, 박용만의 색다른 이야기
다른 재벌 총수들에게선 듣기 힘든 ‘메가톤급 발언’
▶ 박용만(59) 대한 상공회의소 회장은 국내 최장수 기업으로 118년의 역사를 가진 두산그룹의 3세 경영인이다. 그의 부친인 박두병 전 회장(1973년 작고)과, 형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에 이어 한집안에서 세번째로 상의 회장을 맡는 진기록을 갖고 있다. 박 회장이 지난 8월 말로 상의 회장에 취임한 지 1년을 맞았다. 그는 ‘상의 역할=회원 기업의 이익 대변’이라는 종래의 고정틀을 깨고 상의의 새로운 역할론을 제시해 지난 1년간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차별화된 모습을 선보였다.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를 사절했던 박 회장이 취임 1년을 계기로 <한겨레>와 만나, 속내를 털어놨다.
“에너지 한방울도 안 나는 우리나라에서 전기값이 세계에서 가장 싼 것은 문제라고 하니까, 누가 반론을 제기해요. 캐나다가 제일 싸고, 우리나라가 두번째라는 거예요. 속에서 ××놈 하고 욕이 나올라 합디다.”
“재벌 회장들의 잇단 사법처리에 대해 상의가 선처해달라는 논평을 내지 않는다고 일부에선 자기도 재벌이면서 왜 편을 안 드느냐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엄연히 법치국가이고 사법체계가 가동되는 나라입니다. 그것을 믿고 지켜봐야지, 밖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성숙한 사회가 아니에요.”
“정치권과 대화를 정례화하려고 노력했는데, 세월호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한번만 하고 중단됐어요. 주변에선 대화가 어려울 거라고 하는데, 입장 차이가 있으니까 모이자는 것 아니에요?”
“신선하다.” “의외다.” “튄다.” “저 사람 뭐냐.” “저 ×× 또라이다.”
지난달 취임 1주년을 맞았던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두산그룹 회장)은 지난 15일 서울 남대문 상의 회장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동안 자신에게 쏟아졌던 주변의 다양한 반응을 이렇게 나열했다.
박 회장은 “지난 1년간 진짜 바빴다”고 비명을 지른다. 박 회장이 회장 취임 직전인 지난해 5월 이후 1년간 출장 횟수만 총 26회, 비행 횟수는 68회다. 비행 거리는 무려 37만여㎞로, 지구 10바퀴를 돈 셈이다. 미국·중국·독일 등 박근혜 대통령의 순방외교 때마다 경제사절단에 빠짐없이 참여했다. 박 회장은 인터뷰 다음날인 16일 국제상업회의소(ICC) 집행위원회 참석차 프랑스로 출국했다. 이어 오는 20일부터 시작되는 박 대통령의 캐나다 국빈방문에 현지에서 합류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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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15일 서울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 20층 회장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도중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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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 적극 찬성하고
산업전기료 인상 반대 않는 등
재벌과 다른 목소리 내 와
“저 ×× 또라이” 소리도 들어 “전에는 재벌이 감방 다녀오면
수고하셨다고 인사했다
요즘에는 모두 부끄러워한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
개처럼 벌면 그냥 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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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 회장을 누군가는 ‘진보적인 재벌’이라고 하지만 자신은 “합리적인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 경제에서부터 재벌, 증세, 종교까지 다양한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했다. 지난 15일 서울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 20층 회장실에서 박용만 회장(가운데)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곽정수 선임기자(왼쪽 앞), 정리를 맡은 윤형중 기자(오른쪽 앞)와 이형섭 기자의 모습.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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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다 더 엄격한 규범과 관행
만들어서 이를 지켜야 한다
우리 기업들 성장하느라 바빠
그런 걸 만들 기회가 없었다” “총수 맘대로 운영하던 기업
대다수가 쓰러지고 도태됐다
젊은 사람들 답답하겠지만
우리나라 많이 바뀌고 있다
사회적 대타협도 가능하다” 규제완화로 서비스 창업 쉽게 해줘야 박근혜 대통령은 9월 초 제2차 규제개혁장관회의를 열고 재차 규제완화 드라이브를 걸었다. 규제완화를 통해 투자 확대를 하고, 이를 경제활성화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회장은 국내 투자는 이미 과잉이고, 이제는 3%대 성장률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고 정부와 다른 얘기를 하면서도 규제완화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3%대 성장률에 적응하려면 규제완화를 통해 창업을 늘려서 일자리도 늘리고 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특히 서비스업의 창업이 필요하다. 서비스업의 진입을 쉽게 해주고, 대신 일탈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엄벌을 가하면 된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규범과 관행에 맡기는데, 우린 법으로만 규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경영계가 요구하는 규제완화 목록에 창업 관련 사안들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재벌 총수들의 사익편취 수단으로 악용되는 계열사간 일감 몰아주기 관련 규제도 지속적으로 완화 내지 폐지 압력을 받고 있다. 박 회장은 “기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계열사간 내부거래(수직계열화)는 규제 대상에서 빼줘야 한다. 대신 총수 일가 지분이 많은 회사에 일감을 몰아주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한다. 다만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을 이해해줘야 한다.” 박 회장은 장기적으로 보면 총수가 전횡하는 기업은 도태된다고 말했다. “총수의 직관에 의해 투자를 비합리적으로 하고, 총수의 사익을 챙기는 기업은 재무구조가 나빠져 쓰러지고, 살아남더라도 건강하지 못해 경기위축이 되면 결국 도태된다. 외환위기 때 30대그룹 중에서 17개가 쓰러졌다. 젊은 사람들 입장에선 너무 답답하겠지만 나이 든 사람들이 볼 때는 정말 빨리 변하는 것이다.” 박 회장의 언행은 파격적이다. 솔직하고 직설적이다. 다른 재벌 총수들에게 볼 수 있는 권위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직원들이나 기자들에게도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감 있게 다가간다. 평소 자신의 생각을 수시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박 회장은 자신과 관련된 사안에서도 거리낌이 없다. 두산이 2007년 미국의 소형 건설장비 생산업체인 밥캣을 인수했을 때의 일이다. 박 회장은 현지에서 전체 직원들을 모아놓고 인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처음에는 과거 법조계에 취직했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아 다른 말만 하고 나오려는데, 미국인 인사담당자가 말하는 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인터넷에 ‘용만 팍’ 하고 치면 그 사건 내용이 다 나오는데 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뒤돌아서서 직원들을 ‘잠깐’ 하고 붙잡았다. 그리고 몇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정말 부끄럽고, 사건 이후 두산이 투명하게 변한 게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제야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라.” 그의 언행은 보수적 색채가 강한 다른 재벌 총수들과 비교하면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하다. 하지만 박 회장은 자신을 진보, 보수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평가하는 것을 마다한다. “나는 진보, 보수에 관심이 없다. 나는 진보적인 게 아니라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박 회장은 합리적 사고의 기반을 두산의 인적 구조에서 찾는다. “두산의 전체 임직원 4만3000여명 중에서 절반은 외국인이다. 두산 외에도 이처럼 외국인 비중이 높은 기업이 많지만 이들 대부분은 상층부는 한국인, 하층부는 외국인들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두산은 최고경영층을 포함해 간부층에도 외국인이 다수 섞여 있다. (종래의 한국 기업과 같은) 우리 방식대로 하면 경영이 불가능하다. 두산은 신입사원 때부터 여름에 2주간 휴가를 보낸다. 크리스마스부터 연말까지도 모두 휴가다. 같은 부서의 외국인들은 다 휴가 가는데 한국 사람만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사제도도 일방적 평가는 안 되고, 100% 피드백을 줘서 동의를 받게 돼 있다.” 박 회장은 임직원에게 늘 하는 얘기가 있다고 말한다. “의사결정을 하고, 논쟁을 해결하려면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느냐는 물음이다. (사람들은) 더 알면 해결할 수 있는 것을 더 알려 하지 않고 자기가 선호하는 주장만 한다. 그러니 의사결정이 안 된다. 나는 ‘회장님 틀렸습니다’ 하고 쓴소리를 하는 직원보다 내가 여러 가지를 다 볼 수 있도록 정보를 주는 직원을 중용한다. 우리나라의 소통 문화, 토론 방식을 바꿔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 보러 새벽부터 기다려 박 회장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지난 8월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해 서울 광화문에서 시복식을 집전할 때는 새벽 3시 집에서 나와 4시30분쯤 행사장 가장 앞자리에 가족들과 앉아 오전 10시에 행사가 시작될 때까지 5시간 이상 기다렸다. 시복식이 끝난 뒤에는 “교황님을 뵙고 참회와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라는 메시지를 에스엔에스에 올렸다. 교황이 청와대 연설에서 “공동선과 진보와 발전을 단순히 경제적 개념으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 가난한 사람들과 취약계층,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각별히 배려하라”고 강조하는 것을 보고 실천의 문제를 고민했다. 박 회장에게 종교는 어떤 의미냐고 물어봤다. “나 자신의 완성이다. 하느님이 만들어주고 의도하신 내가 있는데, 그대로 살려면 신앙의 가이드를 받아야지. 사람들은 욕심, 야망, 편법, 부정, 허위가 자신을 크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런 것들 때문에 (본래의) 자기보다 더 조그맣게 산다. 신앙의 기본은 자신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했으면 된 것이다. 그다음에는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과욕이다. 뉴 밀레니엄 시대에 기업을 운영하는 것도 신앙과 다르지 않다.” 자신만의 합리성과 깊은 신앙심이 몸에 배어 있는 듯이 보이는 박 회장이지만 <한겨레>와의 인터뷰에는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낀 것 같다. 일부 질문에 답할 때는 “미치겠다. 이런 식으로 말하다간 내가 완전히 왕따 될 텐데”라고 한숨을 쉬었다. 또 다른 민감한 질문들에는 끝내 “이 자리에서 다 말할 수 없는 점을 이해해 달라. 따로 술 한잔 하자”며 넘어갔다. 곽정수 선임기자, 이형섭 윤형중 기자 jskwak@hani.co.kr 박 대통령의 강공 선회, 그 내막은? [정치토크 돌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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