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 범죄의 기원, 이순봉의 흔적을 찾아
오사카; 어떤 범죄의 기원
자이니치 이순봉 부녀의 치부와 파국
피살된 강서구 재력가 송아무개(당시 67살)씨는 ‘동해상사’ 등을 운영하던 부유한 재일동포 이순봉(사망 당시 87살)씨와 딸 초지(71)씨의 재산관리인이었다. 송씨는 2000년대 소송을 통해 관리하던 이순봉씨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획득했다. 이순봉씨가 2004년 병으로 숨진 뒤 재산을 관리하던 초지씨는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27억엔(한화 약 259억원)의 상속세를 탈세한 사실이 드러나 2008년 3월 체포됐다. 위 사진은 당시 일본 방송이 보도한 초지씨의 체포 당시 모습이다. 이후 초지씨는 2012년까지 형사재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초지씨가 한국의 부동산을 지키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는 추측이 나온다. 송씨는 갑자기 거부가 됐고 그 부가 뇌물 범죄를 낳았다. 범죄를 낳은 부의 뿌리를 좇았다. 지금은 송씨 가족의 것이 된 부를 만든 이순봉씨와 딸 초지씨의 삶을 오사카에서 추적했다. 김형식 서울시의원의 살인교사 혐의 재판 쟁점과 직접 관련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소설가·저널리스트 톰 울프의 표현을 빌리면, 사건의 ‘정서적 실체’(emotional reality)를 보여주고 싶었다. 법률가들의 ‘실체적 진실’이 멈춘 곳 너머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오사카/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교도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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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밤 9시께 오사카시 이쿠노구를 관통하는 히라노강 근처 주택가 야경. 강의 오른편이 모모다니이고 왼편이 나카가와니시다. 많은 재일동포들이 천변 주변에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재일한국인이 밀집해 사는 이 지역을 이카이노라 부른다. 쓰루하시, 모모다니, 이마자토를 합쳐 부르는 옛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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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이쿠노구의 역사적 공간
피살된 강서구 재력가 송씨에게
한국의 부동산 관리를 맡겼던
이순봉·이초지씨 집도 이곳이다 1917년 장성서 태어난 이순봉씨
1930년대 일본 건너와 돈 모으다
1970년 8개 부동산·대금업 회사
설립하고 한국에 있는 땅을 매입
송씨 죽은 빌딩 터도 그즈음 사 돈 이야기만 나오면 표변하던 ‘미나미의 호랑이’ 이순봉씨의 초기 일본 생활은 흐릿하다. 학교는 다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송씨의 친척들도 잘 모른다. “한국말도 잘하고 일본말도 잘”(송씨 사문서위조 혐의 형사재판 기록)하는 것으로 묘사된 오아무개씨와 일본에서 결혼한 시점도 분명치 않다. 고학으로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이순봉씨의 지인 사이에 알려져 있다. <한겨레>는 이순봉씨가 졸업생인지, 전공학과는 무엇인지 와세다대학에 이메일로 질의했다. 와세다대학 홍보실은 지난 18일 답변 메일에서 “교우회 명부를 확인해보았으나 이순봉씨의 이름은 없다”며 “다만 졸업생 이름이 전부 교우회 명부에 오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조건을 달았다. 이순봉씨와 1960년대부터 알고 지냈던 지인은 송씨의 사문서위조 혐의 형사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이순봉은 밀항을 한 사람이기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했다기보다 나중에 돈이 많아지자 명예학위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부인 오씨 이야기로는 ‘결혼했을 때 대학교도 나왔다고 했는데 거짓말이었다고 첫날밤에 고백을 했다. 모든 것을 속은 상태에서 시작을 했는데 그래도 자리를 잡아서 안정이 되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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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5일 이쿠노구의 코리아타운을 찾았다. 한류붐 이후 이곳을 찾는 일본인 관광객이 많이 늘었다. 한국 가수와 배우들의 사진 등을 파는 한류숍이 많다. ‘조센이치바’라는 옛날 이름보다 요새 ‘코리아타운’으로 더 많이 불린다. 이순봉씨와 초지씨의 사무실과 자택 모두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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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한국인 이순봉·이초지 부녀가 갖고 있던 ‘순봉산업’ 명의의 땅을 관리하다가 마술처럼 이를 자신의 것으로 소유권 이전등기를 해버린 송아무개씨의 복잡하고 이상한 재산 형성 과정을 커버스토리로 보도한 지난 8월2일치 <한겨레> 토요판 1면. 송씨는 지난 3월 자신의 빌딩에서 둔기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됐고, 살인 용의자 팽아무개(44)씨는 김형식 서울시의원이 살인을 교사했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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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이 다 송씨에게 갔는데도
정당한 대응을 하지 않았을까
탈세사건으로 수사·재판받느라
소유권 지킬 겨를 없었을 것 이순봉은 2004년 숨질 당시
약 60억엔 현금을 골판지 상자에
담아 유산으로 남겼지만
2008년 검찰 등은 탈세혐의로
자택 압수하고 딸 이초지 체포 2000년부터 이순봉씨와 숨진 재력가 송씨의 삶이 급격히 얽히기 시작했다. 이순봉씨는 여러번 사기당할 뻔한 끝에 8촌 친척인 송씨의 부인 이씨를 1995년 부동산 재산관리인으로 고용했다. 송씨가 부인을 도왔다. 그러다 갑자기 송씨가 이초지씨로부터 부동산을 샀다며 2002년 소유권이전등기 소송을 제기했다. 무변론으로 송씨가 승소했다. 2004년 송씨는 위임장과 매매계약서를 위조했다는 사문서위조 혐의로 고발당했다. 한국 검찰은 오사카부경찰본부에 사법공조를 요청했다. 오사카부경찰본부 형사부가 한국 외교부의 요청을 받고 2005년 딸 초지씨를 찾아가 이순봉씨가 송씨에게 부동산을 정말 증여했느냐고 물었다. 송씨가 법정에 제출한 위임장 사본도 보여줬다. 이에 대해 초지씨는 “(송씨가 제출한) 모든 매매계약서, 영수증, 위임장을 확인했으나 전혀 본 적이 없는 서면뿐이며 나나 아버지가 작성한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오사카경찰은 이와 같은 사정청취보고서를 한국 검찰에 제출했다. 검찰은 2006년 “송씨가 문서를 위조했다”며 기소했고 2009년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은 송씨에게 사문서위조 등의 혐의로 징역 8년, 송씨 부인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판사 출신인 법무법인 세종의 이홍철 변호사가 송씨의 변호를 맡았다. 그런데 유죄가 무죄로 뒤집어졌다. 서울고법 2010년 6월 2심 판결을 통해 송씨는 부자가 됐다. 당시 쟁점은 송씨가 법정에 제출한 매매계약서, 위임장 등이 위조됐는지 여부였다. 1심 재판부가 ‘위조’라고 판단한 사실들을 2심 재판부는 모두 뒤집었다. 1심 재판부는 위임장에 기재된 부동산의 면적이 잘못 적힌 것을 근거로 위조됐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달리 기재된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볼 수도 있다”며 송씨가 문서를 위조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쟁점마다 이처럼 판단이 정반대였다. 민단도 모르고 총련도 모르는 ‘호랑이의 흔적’ 2심 재판부가 판결의 근거로 삼은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이순봉씨와 초지씨의 ‘태도’였다. 당시 강형주(사법연수원 13기)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백아무개씨가 2002년 9월26일경 일본에 가 (이순봉씨의 부인) 오아무개씨와 초지씨에게 이 사건 부동산의 소유권이 송씨에게 이전된 사실을 알리고 2002년 11월경에는 이순봉씨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으며 그 후 이아무개씨 등도 일본에 가 이순봉씨의 가족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음에도 이전에 이아무개(과거 재산관리인)의 배신행위에 대해 즉각 고소를 하고 한국에 들어와 검찰에서 진술까지 했던 이순봉씨가 사망하기까지 이 사건 부동산을 회복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나 문책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강 부장판사는 “공시지가로만 300억원이 넘는 이 사건 부동산을 송씨 등에 의해 빼앗긴 사람들의 반응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강 부장판사는 인천지법원장을 지내다 최근 법원행정처 차장에 임명됐다. <한겨레>가 만난 송씨 부인의 친척들은 “당시 초지씨가 일본에서 다른 형사사건으로 대응할 정신이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송씨의 위임장 및 매매계약서 위조 혐의가 1·2심에서 치열하게 다퉈지던 2008~2013년 초지씨는 일본에서 탈세 사건으로 검찰 수사 및 법원 재판을 받고 있었다. 이순봉씨가 2004년 숨질 당시 모두 8개의 회사와 약 60억엔의 골판지 상자에 담긴 현금을 유산으로 넘겼다. 오사카 검찰이 어떻게 이를 인지했는지는 보도나 판결문에 명확히 나와 있지 않다. 2008년 3월 오사카 검찰과 국세국은 탈세 혐의로 모모다니의 초지씨 자택을 압수수색하고 초지씨를 체포했다. <아사히신문> <교도통신> 등 일본의 신문·방송에서 떠들썩하게 보도됐다. “사상 최고액의 탈세” “헤이세이의 탈세왕” 등의 일본 뉴스가 잇따랐다. 한국에서는 당시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오사카지방재판소 판결문을 종합하면, 이순봉씨가 요통으로 입원한 1996년 이후 초지씨가 아버지의 지시를 받고 실질적으로 재산을 관리했다. 이순봉씨는 자산의 대부분을 1998년까지 한국의 금융기관에 가명계좌로 숨겨 보관했다. 1997년 금융위기가 닥쳤다. 이순봉씨는 이후 한국과 일본의 금융기관에 보유하던 예금계좌를 조금씩 해약해 모두 현금화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돈을 모두 골판지 상자에 넣어 초지씨의 모모다니 자택 차고에 보관했다. 2010년 오사카검찰은 초지씨를 탈세 혐의로 기소했고 초지씨는 2011년 5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6개월에 벌금 5억엔을 선고받았다. 초지씨는 항소했으나 2012년 9월 2심에서도 유죄가 인정됐다. 초지씨가 검찰 수사를 받고 1·2심 유죄 판결을 받던 2008~2012년은 송씨의 사문서위조 혐의 재판 1심·2심·파기환송심 등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다. 송씨 부인의 친척들은 “초지씨가 당시 탈세 혐의 수사를 받고 있어 한국의 부동산에 대해 적극적으로 소유권을 지키지 못했다. 한국의 부동산을 소유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상속세 탈세액이 더 커질 것이라고 우려했다”고 주장했다. ‘미나미의 호랑이’의 흔적은 9월3~5일 오사카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 많은 재일한국인들이 종종 자존을 위해 일본 정부와 싸웠고 때로 이념 때문에 서로 다퉜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재일조선인연맹’이 만들어졌으나 남과 북이 갈린 것처럼 민단과 총련으로 갈렸다. 6·25 전쟁 때 재일한국인들도 입장이 갈렸다. 그러나 이순봉씨는 정치 활동은 물론 조선인 모임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난 4일 쓰루하시 근처의 오사카민단서지부 사무실을 찾아 이순봉씨 및 그의 자녀들의 연락처를 물었으나 현정웅 지부장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라고 답했다. 그는 재일동포 2세로 오사카에서 오래 살았다. 오사카 출신으로 재일동포 3세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오사카부본부의 간부에게 이순봉씨에 대해 문의했으나 그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답했다. 나가호리바시역 근처에 위치한 오사카한국상공회의소에 방문해 장철남 사무국장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장 사무국장도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2007년 오사카부에 사는 재일한국인은 13만6000여명이다. 민단과 총련의 이념적 거리는 멀어 보이지만, 두 사무실은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서로 역사와 삶을 공유하는 이 커뮤니티의 누구도 ‘이순봉’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3일 오전 11시께 초지씨가 살던 이쿠노구 나카가와니시의 자택을 찾아갔으나 우편물만 쌓여 있다. 이웃집 일본인 거주자에게 행방을 물었으나 “(탈세)수사와 재판을 받은 2년 전부터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답했다. 오사카검찰과 국세국이 2008년 합동으로 압수수색했던 ‘동해상사’ 사무실은 벽이 헐려 외부 공사 중이었다. 공사하는 인부들에게 말을 걸어봤지만 누구도 이순봉씨를 알지 못했다. 오사카지방법원 판결문, 한국 법원의 송씨 판결문, 주변 취재 등을 통해 확보한 모든 주소지에 찾아갔으나 사람이 없거나 “이순봉을 모른다”는 답을 들었다. 2004년 사법공조 당시 이순봉씨와 초지씨를 직접 조사했던 오사카경찰청을 찾아 추가 설명과 자료를 요청했으나 “개인정보라 답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초지씨는 2심에서 항소가 기각돼 2012년 9월 2년6개월의 징역형이 확정됐다. 인터넷 검색만으로는 초지씨가 상고했는지, 아니면 포기하고 복역 중인지 명확치 않았다.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초지씨의 현 상태에 대해 문의했으나 “우리 쪽에서 답할 게 없다. 오사카검찰에 문의하라”고만 답했다. 초지씨가 상고심을 포기하고 형의 집행단계로 넘어갔다는 취지로 해석된다. 오사카지방검찰청에 초지씨가 현재 복역 중인지, 잔여 형기가 얼만지 문의했으나 “개인정보라 알려줄 수 없다”고 답을 거절했다. 초지씨가 만약 상고를 포기했다면 2015년 3월까지 복역할 것으로 추정된다. 혐오하기엔 차별받았네, 옹호하기엔 지독했네 5일 밤 이쿠노구를 가로지르는 히라노강은 고요했다. 히라노강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이내 공간에 ‘미나미의 호랑이’의 모든 과거가 있었지만, 지금 누구도 기억하지 못했다. 차별사회에서 정치나 공동체 활동에 눈감고 부동산업과 대부업으로 오로지 돈만 번 한 자이니치가 형성한 부는, 집단적으로 차별받아온 가난한 호남 출신이었으나 범죄 전과가 많고 이상한 소송을 통해 벼락부자가 된 사내에게 와서 죄를 낳았다. 차별이 뒤틀린 부를 낳았고, 왜곡된 부가 한국에서 죄를 낳았다. 이순봉씨는 마냥 혐오하기엔 부당한 차별에 견딘 삶을 살았고, 그저 옹호하기엔 지나치게 돈에 집착한 사내였다. ‘미나미의 호랑이’의 삶은 아이러니했다. 5일 밤 9시 반, 미유키도리를 빠져나오는 골목에 셔터가 내려진 한류 상품 가게 앞에는 사람이 없었다. 주말인 6일 토요일엔 다시, 이곳을 ‘조센이치바’가 아니라 ‘코리아타운’이라고 부르는 젊은 맛집 관광객들로 거리가 북적거릴 것이었다. 다행히 재특회는 오지 않았다. 6일 오사카 최고기온은 32.6℃, 습도는 56%였다. ※참고문헌: 오사카지방재판소 이초지 탈세 판결문, <재일한인타운의 사회-공간적 재구성과 정체성의 정치: 오사카 이쿠노쿠를 사례로>(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회생활학과 임승연 석사논문), <피와 뼈> 1~3권(양석일 지음·김석희 옮김, 자유포럼), 김길호 소설집 <이쿠노 아리랑>(제주문화·2006) 오사카/글·사진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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