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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 장군(가운데)의 모습이 찍힌 유일한 사진이다. 1895년 2월28일(음력) 서울의 일본 영사관에서 신문을 받은 전봉준이 재판을 받기 위해 법무아문으로 이송되는 과정을 일본인 무라카미가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전봉준은 1855년 12월3일 고창군 당촌 마을에서 출생했고, 1895년 3월30일 새벽 2시 사형당했다. 그의 나이 마흔한살이었다. 그의 주검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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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전봉준 장군 초혼인터뷰
120년 전 한반도 역사의 ‘파리 코뮌’
우금티 고개서 전봉준 ‘초혼 인터뷰’
▶ 갑오년인 올해는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육십갑자로 두번째 지난 해(120년)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국가적인 기념행사나 언론의 집중 조명은 특별한 게 없었습니다. 갑오동학농민혁명을 가능한 한 쉽고 대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보았습니다. 전봉준 장군의 영혼을 불러내어 그와 인터뷰를 시도해보았습니다. 그가 살아 있다면 우리 사회를 지켜보며 어떤 의견을 밝힐까요. 11월 초는 120년 전 2차 농민 봉기가 막 시작되던 시기입니다.
7일 자정을 두어시간 넘긴 새벽 충남 공주 주미산 자락 우금티 고개.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은 풍요로웠고,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은 휘이이 소리를 내며 억새잎을 비벼대고 있었다. 이곳에서 120년 전 농민군은 ‘외세를 타도하고 부정부패 관리들을 몰아내자’고 외치며 정부와 일본 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스러져갔다. 우거진 나무 대신 수북이 쌓인 농민군의 주검으로 산을 이뤘을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시렸다.
그때였다. 먼발치에서 한 사내가 억새밭을 헤치며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성인 남성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키의 이 사내는 인기척을 느낀 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뒤를 돌아다보았다. “거기 누구시오?” 사내가 소리치자 내가 답했다. “저는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답사하고 있는 기자입니다.”
사내는 성큼성큼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허름한 흰 저고리를 걸친 사내의 외양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는 상투를 틀어 단정했고 부릅뜬 눈은 달빛처럼 밝았다. “잠깐 앉으시오.” 사내와 나는 억새밭 옆 작은 바위에 마주보며 앉았다. 사내가 말을 이어갔다.
“짐작했겠지만 나는 전봉준이라고 하오. 놀라지 마시오. 그냥 영혼일 뿐이오. 해마다 이맘때면 옛 동지들의 모습이 떠올라 이곳을 다녀가곤 한다오. 서로 진심이 통했는지 내 모습이 당신에게 보인 모양이오.”
사내의 말투는 인자한 시골 서당 훈장님처럼 부드러웠다. 오싹했던 느낌은 금세 사라졌다. 그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사내는 손사래를 쳤다. “지금 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소. 이미 후손들이 연구도 많이 해왔으니 동학농민군에 대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오. 같이 산책이나 하다 날 밝으면 헤어지는 게 어떻소?” 나는 계속 설득했다. “학자들은 잘 알지 모르나 일반 사람들은 올해가 갑오년인지도 잘 모르고 삽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좋소. 생각해보니 우리 후손들께서 두꺼운 책을 보지 않으면 동학농민혁명을 접할 기회가 없는 현실인 것 같소. 한번쯤은 쉽게 설명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네. 어려운 얘기는 가급적 빼고 뭇 대중이 궁금해하는 것 위주로 물어보면 답해주겠소.” 그렇게 인터뷰가 성사됐다. 다음은 전봉준 장군과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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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은 일본의 침략 의도가 본격화하자 재봉기해 관·일본 연합군에 맞서 싸웠다. 전봉준 장군(가운데)이 1894년 9월(음력) 2차 봉기를 해 삼례에서 농민군을 이끌고 행진하던 장면을 상상하여 그린 기록화.(이의주 화백, 1984) 패랭이를 쓴 전봉준이 실제 말을 타고 행진했는지는 알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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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이라 못 부른다면 유감일세
백성은 하늘이라 하지 않았소
부패한 민씨 정권의 뜻보다
더 높은 게 백성의 뜻 아니겠소 2차봉기 때 1만여 농민군 이끌고
우금티로 진격했는데 계속 졌소
퇴각 때 보니 500명만 남았더군
아, 가슴이 답답해지는구려
내가 이래서 여길 떠나지 못하오 설마설마 청나라에 군사요청까지 할 줄이야 4월27일 전봉준과 농민 부대는 전주성을 함락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관군과 농민군은 전주성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양쪽 모두 사상자가 계속 발생하면서 둘은 협정을 맺고 전투를 중단했다. 그러면서 농민군은 폐정개혁안 폐정개혁안을 조정에 전달해 달라고 요구했고 5월8일 전주성 점령 10여일 만에 스스로 성을 나왔다. 7월6일 김학진 전라감사는 전주에서 전봉준과 회담을 하고 전라도 지역 집강소(농민자치기관) 통치를 용인했다. 행정권을 부여받은 농민군은 사회개혁에 착수했다. -전주성을 점령한 뒤 한양으로 북진하지 않고 스스로 관군에 성을 내준 연유가 궁금합니다. “전주성을 점령하긴 했지만 관군의 공격이 계속되어 농민군의 피해도 막심했다네. 마침 그때 조정이 청나라에 지원군 파병을 요청했고 일본군도 조선에 군대를 진주시킨 것을 알게 됐소. 이건 아니다 싶었지. 우리는 그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려고 봉기한 것이지 국가의 위기를 초래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네. 고종께서 농민군이 귀화해 생업에 종사하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해 우리는 감격하여 일단 전주성을 나오기로 결정했소. 그때가 농번기라 전투가 지속되는 것에 농민들이 걱정도 많았고.” -그래도 아무 성과 없이 철수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물론이오. 새로 전라감사로 김학진이 부임했는데 나중에 우리와 대화를 했소. 우리는 전라도 각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해 고을을 개혁하겠다고 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소. 미약하나마 호남 일대를 근거지로 우리가 꿈꾸어온 새 세상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네.”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내자 일본은 1885년 청·일 양국 군대의 철병을 약속한 톈진조약 위반이라며 반발했고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왔다. 전주화약이 성사되자 조선은 청과 일본군 모두에게 철군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엉뚱하게 조선에서 청과 일본 사이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고, 둘은 전쟁을 일으켰다. 이것이 청일전쟁이다. -조정이 청나라에 군사 요청까지 할 것이라고 예상하셨습니까? “(길게 한숨을 쉬며) 설마설마했는데 결국 그런 일이 벌어지더군.”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파견 와 있던 원세개(위안스카이. 후에 중화민국 총통이 됨)에게 민영준(1894년 당시 통위영의 통위사. 통위영은 군사 관청의 하나. 통위사는 최고책임자)이 원군을 청하며 보낸 편지를 제가 읽었습니다. 농민군을 ‘습성이 사납고 성질이 교활하다’고 묘사했더군요. “세도의 유지에 급급해 외세의 개입까지 불러온 민씨 정권이오. 판단력이 제대로 없었던 게지.” -일각에서는 농민들의 봉기 탓에 조선 땅에 청나라와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는데요. “(표정이 일그러지며) 헛소리들 하지 말라고 하시오! 위정자들의 오판으로 벌어진 일을 왜 우리 농민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거요! 얼마 전에 ‘일청전쟁 선전조칙 초안’이 발굴되었더구먼. 신문에도 나왔던걸. 이토 히로부미(1894년 당시 일본 총리)는 청나라뿐 아니라 조선도 선전포고 대상에 포함하고 있다가 나중에 뺐소. 청일전쟁은 조선 침략을 위해 일본이 치밀하게 계획한 전략이오.” (▶<한겨레21> 573호. ‘일본, 1894년 조선전쟁 계획했다’) -목소리가 커지시는 걸 보니 화가 많이 나시나 봅니다. “결례했다면 미안하오.” -아닙니다. 충분히 이해됩니다. 집강소를 통해 전라도 일대의 자치와 개혁이 제법 자리잡아가고 있는데도 9월 2차 봉기를 일으킨 이유가 궁금합니다. “일본을 더 이상 가만둬선 안 되겠다고 판단했소. 일본은 군대를 도성까지 끌어들여 밤중에 고종을 위협한데다 그 의중이 의심스러운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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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봉기 최대 전적지였던 공주 우금티에서의 전투 장면을 상상해 그린 기록화. 이의주 화백.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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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선비들은 불편했을 거요
여러분이 극진히도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도 젊은 시절엔
동학 농민군 진압에 나섰잖소 파리코뮌이 2개월이었다면
우리는 10개월간 전라도 전역에
집강소를 설치해 통치를 했소
과거 합격한 사대부 관리보다
고을을 훨씬 잘 다스렸다오 무슨 종교봉기로 오해하진 마시오 -‘척양척왜’라는 구호가 지금의 시대와는 좀 안 맞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반외세의 구호를 외친 건 무조건 외세를 배척하자는 게 아니오. 이 땅을 침탈하려는 외세를 배척하자는 의미일세. 120년 전 조선의 개항장에서는 일본 상인이 조선 상인을 상대로 사기치고 폭력을 휘두르는 일이 많았지만 강화도 조약의 치외법권, 영사 재판권 조항 때문에 우리가 손을 쓸 수가 없었소. 이런 것을 바로잡자는 것이었지. 지금의 한국 사회에도 그런 문제들이 많지 않소?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같은 것들 말이오. 그나저나 아직 멀었소? 자네, 묻는 게 많구먼.” -죄송합니다.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라서 욕심이 많아지네요. 곧 끝내겠습니다.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은 군사정부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한 것이라고 자처했는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합니다. “동학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사람이 한울이다’ 아니겠소. 그들 정부가 정말 사람을 귀하게 여겼다고 할 수 있소? 답은 거기서 찾는 게 좋을 거외다.” -동학은 농민혁명 과정에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나는 동학을 상당히 좋아했소. 하늘을 공경하고 신분이 아닌 사람 그 자체를 우선하는 게 마음에 들었소. 그렇다고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이 종교적인 이유에서만은 아니오. 농민군에는 일반 사람들이 훨씬 많았지. 황톳재 제일 높은 봉우리에 후손들이 탑을 세우고 동학혁명기념탑이라고 세웠더군. 고맙기는 한데 후손들이 이걸 무슨 종교봉기로 이해할 수 있으니 명칭은 좀 고민이 필요하지 않나 싶소만.” -120년이 지난 지금 동학혁명이 갖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농민들이 봉기를 하게 된 것은 조정이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대한 감시를 등한시하고 농민들의 신음 소리를 외면한 탓이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제대로 감시되고 서민들이 일한 만큼 제대로 그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있다고 보시오? 후손들이 새로 맞은 갑오년에 이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하오.” -알겠습니다. 혹시 박근혜 대통령께서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올해를 갑오경장의 해라고 표현한 것은 아십니까? “갑오개혁은 농민들의 폐정개혁 요구가 없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 후손들께서 1987년에 6월항쟁을 벌인 결과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지 않았소? 1987년을 헌법 개정의 해가 아니라 6월항쟁의 해로 기억하듯 1894년을 동학농민혁명의 해로 기억해주었으면 하오.” 동이 서서히 트기 시작했다. 까맣게만 보이던 억새잎이 부드러운 갈색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온 것 같소. 오랫동안 내 이야기를 들어주어 고맙소.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해도 되오?”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교수형 당할 때가 마흔하나였는데 슬하에 아들 둘과 딸 둘이 있었소. 다들 어떻게 됐는지, 후손들은 잘 지내는지 소식을 못 듣고 있소. 좀 알아봐주시게나.”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네. 언젠가 또 만날 기회가 있기를 바라겠소.” 사내의 모습이 사라지자 산속 어딘가에서 ‘가보세(갑오년을 비유) 가보세 을미(을미년)적 을미적 병신(병신년) 되면 못 가보리’ 하는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전봉준의 혼을 불러낸 가상의 ‘초혼 인터뷰’는 학계의 연구자료들을 종합해 구성했으며 전문가의 검증과 감수를 마쳤음을 밝힙니다)
<감수>(가나다순)
배항섭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신복룡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이이화 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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