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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에 연루돼 총살된 제주도의 대표적 사회주의 정치인 이신호(1901~48)의 유일한 사진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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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 ‘4·3 불량위패’ 공격받는 이신호
4·3 특별법에 대한 반격, 재심사 논란
그 주인공인 남로당 핵심 간부 이신호
제주4·3사건에 연루돼 총살된 제주도의 대표적 사회주의 정치인 이신호(1901~48)의 유일한 사진 한 장이다. 가족들은 잊혀지길 원하는 그의 이름을 낯선 사람들이 불러 깨운다. 그는 제주도의 남로당 간부, 정부가 지정한 4·3 희생자다. 군인과 경찰로 추정되는 총탄에 스러진 48년 그의 삶을 어떤 이들은 ‘4·3사건 불량 위패’라며 정의한다. 보수단체는 희생자 1만4231명 가운데 일부가 가해자에서 희생자로 둔갑됐기 때문에 재심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해 초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희생자 재심사 여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논란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불량 위패’로 불리는 희생자 103명 가운데 한 사람을 들여다봤다. 시대와 역사라는 큰 자락에서 이신호를 뽑아내 발자취를 따라갔다. 제주도라는 공간적 배경과 한반도 정세, 세계사적 맥락을 짚었다.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을 하던 이신호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꿈꿨지만 좌절했다. 그는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월1일 기념행사를 지휘한 혐의로 투옥된다. 남로당의 세대교체 과정에서 급진적 무장투쟁 계열에 의해 밀려났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인식·평가함과 동시에 과거로 걸어들어가 그 속에 놓인 사건을 인식·평가하는 것도 균형적인 역사감각일 것이다.
▶ 제주도 남서쪽 끝에는 모슬포 항구가 있다. 특산품인 방어와 인근 마라도 관광으로 유명한 지역이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다.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인 1947~48년 그곳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이 살았다. 4·3의 주요 인물들이다. 무장투쟁을 지휘한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본명 이승진), 사회주의자였지만 무장투쟁에 부정적인 남로당 간부 이신호, ‘빨갱이’들을 잡아 죽이기를 주저했던 모슬포지서장 문형순. 이신호를 중심으로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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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이 진행 중이던 1948년 7~8월께 토벌대가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미군이 찍었다. 가운데 갈옷을 입은 주민은 중산간마을 거주자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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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건립된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기념관에는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 백비(白碑)가 바닥에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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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불량위패와 희생자 재심사 논란
그 가운데 빠지지 않는 이름이
남로당 부위원장 출신 이신호 미군정 치하 어수선한 시대상황
남로당 주도한 1947년 3·1절 대회
이신호는 대정국민학교서 연설
그날 제주서 예측하지 못한 사고
경찰의 발포와 대대적인 총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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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제59군정중대는 1945년 11월 제주도에 상륙해 제주농업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1948년 5월1일 성조기 게양대 사이로 막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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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남로당 내 무장투쟁론자였던 김달삼(1925~50?)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왼쪽)과 남로당원 명부에 오른 대정면 주민들의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이들의 목숨을 살린 문형순(1897~1966) 모슬포지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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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옥후 활동 안하고 집에서 지내
무장투쟁 찬성하지 않았지만
지서 다녀온 뒤 집에서 총살
지금도 자녀들은 인터뷰 거절 남로당원이면 희생자 못되나
모슬포엔 이신호의 묘비와
남로당원 명부 거짓으로 꾸며
주민들 목숨 살린 모슬포지서장
문형순의 공덕비가 공존한다 이신호와 함께 끌려간 고춘언의 증언 이신호와 남로당 대정면책 이운방(1910~2013) 등은 집회 및 불법 파업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1947년 3월17일 미군정에 검거됐다. 이신호는 그해 4월30일 미군정 제주지방심리원(법원)에서 벌금 5000원에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목포에서 옥살이를 했다. 판결문을 보면, 이신호는 “남로당 대정면위원회 위원장 겸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좌익극렬분자”로 소개된다. 그의 직함이 남로당 제주도당 부위원장인지, 남로당 대정면 위원장인지, 또는 대정면 부위원장인지 기록물마다 다르다. 출옥 후 이신호는 공개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주로 집에서 지냈다. 일제 때부터 해온 주류 도매업이 생계수단이었다. 그가 출옥한 이듬해인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의 오름마다 봉화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남로당은 제주도 11개 경찰지서를 습격했다. 경찰관 4명, 우익 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 사망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신호는 이도일이 하는 한남소주 공장의 주류 도매권을 갖고 있었어. 가끔 순사들이 찾아오면 술도 같이 하는 편이었고. 우리 집과 가까워서 가끔 찾아갔는데 가 보면 수염도 자르지 않고 책 읽으면서 지내고 있데. 같이 이야기해보면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어. 그 사건은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했지. 그러다 초사흗날(1948년 4월3일) 폭탄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병원에 가서 입원해 있었어.”(이운방, <4·3사건의 진상>) 대정면은 4·3사건의 요주의 지역이었다. 투쟁을 지휘한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1925~50?)이 대정중학교 사회 교사였기 때문이다. 이신호를 비롯한 주민들은 모슬포지서에 수차례 불려갔다. 이신호가 숨지기 얼마 전 함께 지서에 끌려간 고춘언(90)씨를 지난 5일 대정읍 자택에서 만났다. 청력이 약한 고씨에게 글로 질문하고 입말로 대답을 들었다. “서북청년단(월남한 이북 청년들이 1946년 만든 우익단체)이 갑자기 막 잡아가고. 집에 있으니까 나오라고 했어. 그래서 갔는데 내 앞에 삼십명이 막 맞았어. 앞에 놈은 몽둥이로 맞았어. ‘너 산에 갔다 왔지?’ 물으면서. 내 차례가 되어서 (서북청년단원이) 팍 차니까 내가 ‘아!’ 했거든. 높은 특공대장이 ‘취조 중지!’ 하고 집합을 했어. 특공대장이 경감이라. ‘이신호가 누구요. 이리 오라’ 하길래 이신호가 포승줄에 묶여서 ‘못 가겠수다’ 했지. ‘당신 이신호가 맞죠? 이름 많이 들었소. 입법의원에 선출이 됐다던데. (1946년 8월24일 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에 관한 미군정 법령 제118호가 발표돼 전국에서 90명이 선출됐다. 이신호는 선출 직후 사퇴했다.) ‘당신 같은 사람, 대한민국 위해 노력합시다’ 하더라고. 회유하면서 담배도 주었어. 다음날 집에 보내줬어.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총살이 되었어.” 남한만의 단독선거 윤곽이 드러난 1948년 2월 전후로 미군정과 좌파는 치열하게 대립했다. 그해 1월 조직 명단이 노출돼 치명타를 입은 남로당 제주도당은 1·22 검거 사건 등을 겪으며 세대교체와 함께 노선 변화의 기로에 서게 됐다. 위기설을 앞세운 강경파가 4·3사건이 일어나기 전 당 조직을 장악했다. 일제 때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했던 장년층에서 젊고 급진적인 신진세력으로 교체됐다. 신진세력의 리더는 23살 청년 김달삼. 본명은 이승진으로 그는 장인 강문석이 쓰던 가명 김달삼을 이어받았다. 1947년 3·1절 당시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이던 김달삼은 이후 제주도당 조직부 차장, 조직부장으로 급부상했다. 무장투쟁에 대해 당 지도부 내에서조차 시기상조론과 강행론이 팽팽했다. 무장투쟁은 제주 조천읍 신촌리에서 결정됐다. 이른바 ‘신촌회의’다. 신촌회의에 참석하고 무장투쟁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피신해 도쿄에 살던 이삼룡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믐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19명이 민가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등 7명인데 우린 가진 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김달삼은 20대 나이지만 조직부장이니까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안세훈,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이미 징역살이를 하거나 피신한 상태였다. (중략) 아무튼 우리 지식과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중략) 김달삼은 내가 군사총책을 맡겠다며 날짜를 통보했다. 사건 발발 10일 전쯤에 날짜가 결정됐다.”(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당시 대정면에는 일제 때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이신호의 동료들이 사라진 뒤였다. 남로당 대정면책 이운방은 4·3사건 이후 3개월쯤 고향에 있다가 송악산 부근 갈못해변에서 발동선을 타고 부산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운방의 이웃집에 살며 이신호 등에게 사회주의 영향을 준 오대진(1898~1979)은 4·3 당시 충남 강경으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49년 일본으로 떠났다. “아버지에 대한 고문이 심했어요. 어머님이 아버님에게 식사 가지고 가라고 하면 제 몫이었어요. 가서 보면 고문이 말이 아니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일본으로 나가자고 할 때 아버님은 지은 죄도 없는데 어딜 가느냐고 집에 있었어요.”(1993년 6월 제주4·3연구소 기관지 <4·3 장정> 6호에 실린 이신호의 차녀 발언) 사회주의는 제주 주류였다 1948년 남로당 활동은 미군정에서 ‘사실상’ 비합법화되고 지하운동으로 유지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 남로당 또한 표면적으로는 합법정당이라는 사실이다.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한 미국은 어떤 정치집단도 제약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는 모양새를 유지했다. 1948년 1월23일 서울에 들어온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남북한 선거 협의 대상으로 남한 6명, 북한 4명을 지명하고 이 가운데 남로당 지도자 허헌, 박헌영을 포함시켰다. 제주도에서 남로당원 명단이 드러나 1948년 1월 대거 검거된 ‘1·22 검거 사건’ 발생 1주일 만인 1월30일. 김영배 제주경찰감찰청장과 <제주신보> 기자 일문일답을 들여다본다. 기자: 피검거자의 수는? 경찰의 방침 여하는? 김영배 청장: 이자들은 일부 불온분자의 선동에 현혹되어 부화뇌동한 것으로 개전의 정이 현저한 자에 대해 경찰이 아량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 경찰은 남로당에 가입한 자를 탄압하는 게 아니고 그들의 비합법적 행동에 철퇴를 내리는 것이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 조직된 좌파 정당은 조선공산당(1945년 9월), 조선인민당(1945년 11월), 남조선신민당(1946년 2월) 등 3개 정당이다. 조선공산당은 박헌영, 인민당은 여운형, 신민당은 백남운이 주도했다. 1946년 11월 좌파 3당의 합당으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됐다. <독립신문> 등은 11월23일 열린 남로당 결당식에 대의원 558명 외에 미군정 최고책임자 존 하지 중장의 대리 법펠로 소좌, 미군방첩대(CIC) 관계자, 미국 신문기자와 국내 취재진이 모였다고 보도했다. 제주는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 운동의 뿌리가 강하게 이어졌다. 4·3특별법 및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는 4·3사건의 시작을 1947년 3월1일로 보고 있는데, 이즈음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보고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47년 3월25~26일. 두 건의 방첩대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의 우익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독립당 제주도지부는 조직도 빈약하고 자금도 충분치 못하다. 각 당은 섬 전체에 단지 1000명의 회원이 있을 뿐이다. 두 당은 좌익 인사들의 심한 반대로 정치적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주도 좌익에 대한 여러 보고서에 따르면 좌익 인사들은 제주도 인구의 60~80%에 이르고 있다.” 당시 제주도민은 28만여명이다. 선거 결과 또한 제주도는 다른 지역과 달랐다. 1946년 8월24일 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에 관한 미군정 법령 제118호가 발표됐다. 입법의원 90명 가운데 절반은 민선의원이었고 나머지는 미군정 최고책임자 존 하지 중장이 임명했다. 1946년 10월31일 민선 입법의원 선거가 열렸다. “입법의원 선거에 우익이 승리.” <유피(UP)통신>을 인용한 <한성일보>의 관련 기사다. 한국민주당 15명, 대한독립촉성회 14명, 무소속 12명, 한국독립당 2명, 인민위원회 2명. 인민위원회를 제외한 우익의 승리였다. 그런데 이 두명의 인민위원회가 모두 제주 지역이다. 당시 남제주군의 면 대표 14명이 이신호를 선출했으나 그는 사퇴해버렸다. 인민위원회는 당시 공식 정당은 아니고, 주민들이 구성한 단체다. 제주도에서 남로당은 1946년 12월 결성돼 입법의원 선거 당시 출마하지 못했다. 제주도의 사회주의 성향은 일제 때부터 이어졌다. 1932년 제주 해녀들이 일본인 도사(도지사)의 차량을 포위하고, 500여명이 세화주재소를 포위하자 일본은 배후세력을 캐기 시작했다. 배후세력으로 제주도 야체이카(공산당 조직의 기본단위인 세포의 러시아어)가 지목됐다. 당시 야체이카 조직 40여명이 구속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신호는 당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첨예한 이념 갈등, 새겨지지 않은 비석 2008년 건립된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기념관에는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이 바닥에 누워 있다. 백비(白碑)다. 이름 짓지 못한 역사적 비석 앞에서 안내문을 읽어본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러온 제주 4·3은 아직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2003년 정부가 채택한 진상조사보고서도 이념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은 단어인 ‘사건’으로 적혔다. 4·3사건 피해 규모는 2만5000~3만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 인구의 약 10%다. 4·3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의 가해자별 통계를 보면, 경찰·군인·우익단체 등의 토벌대(84·3%), 남로당 무장대(12.3%), 알 수 없음(3.4%) 차례다. 제주는 세계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4·3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독일과 일본에 공동 대항한 미·소 양국 간의 협력이 종료되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 대립이 시작되는 배경 속에 발생했다. 국내적으로는 한시적 미군정하의 생소한 좌우 이데올로기 및 통일국가에 대한 의견 대립이 소용돌이쳤고, 가장 약한 고리인 제주에서 건국을 앞두고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혈연공동체 안에서 보복이 일어나고 악순환이 거듭되며 피해가 확대됐다. 역사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인데, 가해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같은 섬 안에서 4·3을 바라보는 시각, 역사관이 다르다. 양신하 대정읍지편찬위원장은 “부모님이 토벌대에 의해 돌아가신 유족은 군인·경찰 위패가 있어서 4·3평화공원에 가기 힘들고, 무장대에 의해 돌아가신 유족은 남로당원 위패 때문에 평화공원에 가기 꺼려진다”고 설명했다. 4·3특별법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제정됐고 노무현 정부 때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는 등 활기를 띠었다. 역사와의 화해가 강조됐다. 진압작전에 참전한 군인과 경찰을 희생자로 볼 수 있는지 논란이 되자, 4·3위원회는 2006년 4월21일 법제처에 질의했다. 법제처는 “특별법에서 제주 4·3사건을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희생자를 주민에 한정하여 규율하고 있지 않다. 희생자를 가능한 한 넓게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며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군인 및 경찰도 해방 전후 혼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로 포함하는 것이 동법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회신했다. 4·3위원회는 토벌에 참여한 대한청년단 등 국가유공자 519명, 경찰 91명, 군인 28명을 희생자로 추가로 인정했다. 반면 헌법재판소는 2001년 4·3특별법 위헌확인 심판 청구를 각하하며 “①무장유격대에 가담한 자 중에서 수괴급 공산무장병력 지휘관 또는 중간간부로서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자 ②모험적 도발을 직간접적으로 지도 또는 사주함으로써 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③기타 무장유격대와 협력한 진압 군경 및 동인들의 가족 ④제헌선거 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⑤경찰 등의 가옥과 경찰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자”를 희생자 제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2002년 3월 4·3위원회는 헌재의 기준을 좁혀 “①제주 4·3 발발에 직접적인 책임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②군경의 진압에 주도적 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을 제외하되, 행위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빨갱이’ 목숨 살려준 지서장은 어쩔 텐가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교집합 부분을 분절하여 구분할 수 있을까. 제외 기준이 남로당원 또는 경찰 등의 직위가 될 수 있을까.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으되 무장투쟁에 반대했던 남로당원, 경찰·군인이었으나 학살에 동의하지 않거나 상부 지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살육에 참여해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은 자들은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모슬포에는 이신호의 쓸쓸한 묘비도, 남로당원 명부에 오른 대정면 주민들의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이들의 목숨을 살린 모슬포지서장 문형순의 공덕비도 공존한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인식·평가함과 동시에 과거로 걸어 들어가 그 속에 놓인 사건을 인식·평가하는 것도 균형적인 역사감각일 것이다. 시대 상황과 함께 개인들의 삶을 조망하는 것 또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하나의 길이다. 개인들의 역사가 모여 시대와 역사를 이룬다. 논란이 일고 있는 103명의 불량 위패 명단에 대한 판단 또한 종합적이고 균형적 고찰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 103개 위패에는 103명의 저마다 다른 삶이 있다. 인간을 판단하는 데 잣대 몇 가지 쓰인 종이 한 장으로 심판하는 것은 너무 가볍다. 글 서귀포 대정읍/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사진 제주도청·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제주4·3평화재단 제공,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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