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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북한송환요구자가 한겨레 옥상에서 자신의 상황을 증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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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 ‘북송 희망’ 김련희씨 이야기
남쪽 오자마자 송환 요청한 김련희씨
대한민국은 언제까지 잡아둘 것인가
“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에요. 저를 조국으로 돌려보내주세요.” 북한이탈주민 김련희(46)씨는 자신의 북한 송환을 도와달라고 했다. 북한이탈주민은 북한 정권이 싫어 남한의 보호를 요청한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김씨는 단 한번도 자신을 탈북자라고 여겨본 적도, 남한에 살고 싶다고 요청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2011년 9월 입국 직후 실수로 남한에 들어왔으니 고향인 평양으로 돌려보내달라고 부탁했는데 국가정보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위조여권을 구해 중국행을 시도하고 밀항을 알아보고 선양의 북한영사관에 전화를 해 구조를 요청했다. 분단의 역사가 쌓아온 한국 사회의 금기를 넘은 걸까. 그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했고 ‘간첩’이 되어 있었다. 그의 비극은 언제 끝날 수 있을까. 김련희씨가 지난달 8일 오후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에서 북에 남은 가족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짓고 있다.
“남한에 억류돼 있는 저를 고향으로 보내주세요”
▶ 정부는 지난달 23일 북쪽에 억류중인 남한 주민(김국기씨 등 4명)을 남쪽으로 송환해 달라고 밝혔습니다. ‘북한이 우리 정부와 아무런 협의 없이 부당한 조처를 한 것은 국제적 관례와 인도주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남쪽에서도 자신이 억류돼 있는 북한 주민이라며 송환을 주장하는 탈북자가 있습니다. 김련희씨가 그 주인공인데요. 그의 주장을 2개월간 검증한 뒤 여러분께 전합니다. 남북 당국간 협의하에 ‘본인 의사에 반해 남한에 들어온 탈북자의 송환 제도’를 검토하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2013년 7월21일 저녁 북한이탈주민 김련희(46)씨는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찾았다.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 북한 선수들이 참가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구에서 올라왔다. 자신을 관리하는 경북 경산경찰서 보안계 형사 두명에게 함께 가달라고 부탁했지만 형사들은 주말이라 함께 가기 어려워했다.
“너무 꿈만 같은 거예요. 공화국 국적을 버리지 않은 진짜 조선민주주의공화국 공민(국민의 개념)을 만나는 거잖아요. 저는 단 하루도 제가 조선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어요.”
경기장에 들어서니 남쪽 지붕 아래 D출입구 인근에 200석쯤 되어 보이는 한 블록이 북한 응원석이었다. 김씨는 조용히 가서 앉았다. 김씨와 몇몇 중국 국적의 사람들만이 북한 응원석에 앉았고 6500여 관중의 압도적인 다수는 남한 대표팀을 응원했다.
저녁 여섯시를 조금 넘기자 북한 여자축구 대표팀이 남한 여자축구 대표팀과 함께 경기장에 입장했다. 남한의 애국가가 나온 뒤 북한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1947년 김일성 전 주석이 애국가로 선정한 노래였다. 남한에 울려퍼지는 ‘조국의 애국가’에 김씨의 심장이 요동쳤다. 김씨는 크게 따라 불렀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역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로운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이날 경기는 2 대 1로 북한 대표팀이 이겼다. 북한 선수들은 운동장 한바퀴를 돈 뒤 김씨가 앉아 있던 북한 응원석 앞으로 와 인사를 했다. “만세! 만세!” 김씨는 발을 동동 굴렀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조국의 선수들’이 있었다. 김씨는 이들과 함께 평양으로 따라가고 싶었다. 그렇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듯 아팠다. 이날 밤 대구로 돌아가는 열차 안에서 내내 흐느껴 울었다. 김련희씨의 기억에는 그게 전부였다.
전화번호 4150
김련희씨가 지난달 25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다시 찾았다. 검경 수사 결과, 월드컵경기장은 그가 간첩 범죄를 실행한 장소가 되어 있다. 2년 전 그라운드를 메웠던 함성이 사라진 자리에 회한의 감정이 북받쳤다. 김씨에게 조국이 어디라고 생각하는지 묻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에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입니다. 김일성 주석님은 제 친부모 같으신 분, 저의 육체와 영혼과 같은 분입니다. 제가 비록 지금은 남한에 억류돼 살지만 조국으로 돌아가는 날만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다.”
김씨를 처음 만난 건 지난 5월이었다. 기자의 휴대전화 창에 낯선 이의 전화번호가 떴다. ‘010-××××-4150’이라는 번호였다. 4150은 김씨에게 많은 뜻을 담고 있었다. 김일성 전 주석의 생일이 4월15일이다. 북에서는 태양절로 부르는 국가 기념일이다. 그리고 며칠 뒤인 5월22일, 서울역 매표소 앞에서 김씨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동네에서 흔히 볼 법한 40대 주부 같은 둥그스름한 얼굴에는 다소 수척한 기운이 묻어 있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지난해 7월19일 구치소에 수감됐다가 올해 4월 풀려난 지 얼마 안 되었다. 김씨는 괴로운 마음에 구치소 안에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제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는 남한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게 아니라 억류돼 있는 거예요.”
지난 2년 동안 분단의 비극, 탈북자 제도의 허점, 논쟁적인 간첩 수사가 뒤엉켜 김씨의 인생에는 큰 생채기가 나 있었다.
김련희씨는 2011년 9월 남한에 들어온 북한이탈주민이다. 공개적으로 북한 송환을 주장하는 첫 북한이탈주민이기도 하다. 그는 1969년 평양에서 삼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93년 김책공업대학 의사인 남편 이아무개씨와 결혼해 딸(20)을 하나 두고 평양에서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주부로 살아왔다. 비교적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남편은 저를 너무 깍듯하게 대했고, 딸 금란(가명)이도 착하고 바르게 크고 있었어요. 저는 김책공업대학 양복사로 일하고 있었고요. 남한 사람들은 북한 인민들이 모두 못 먹고 힘들게 사는 것처럼만 생각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에요. 물질적으로 조금 부족해도 사람의 행복은 그런 데서만 오는 게 아니거든요. 평양에서 단란하게 가정을 꾸리며 행복하게 잘 살았어요.”
그가 남한으로 오게 된 건 일종의 ‘사고’에 가까웠다. 2011년 5월20일 김씨는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로 친척 방문 여행을 나왔다.
“제가 2010년 말부터 간복수(간질환의 일종으로 복부에 물이 차는 것) 증상으로 김책공업대학 병원에 여섯달 동안 입원했어요. 어느 정도 치료는 받았는데 완치는 안 됐어요. 2011년에 중국 방문 허가증을 받았어요. 친척이 중국에 있으면 심사를 거쳐 허가증을 받을 수 있어요. 아무래도 중국 병원은 조국(북한)보다는 나을 거라 생각해서 치료도 받을 겸 친척도 볼 겸 해서 중국으로 나왔어요.”
큰아버지가 중국으로 귀화한 조선족이었다. 김씨는 큰아버지 가족 방문 목적의 두달짜리 여권을 받았다. 첫 해외여행이었다. 첫달은 친척집에 머무르며 병 치료를 받으려 했지만 생각보다 병원비가 만만치 않아 치료를 포기했다고 한다. 웨이하이의 친척 언니 집에 한달여를 머물다 치료를 포기하고 평양으로 돌아간다고 말한 뒤 집을 나왔다.
김씨는 선양으로 이동해 나머지 한달을 식당에서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중국에서 한달 일해 번 돈도 북으로 돌아가면 큰돈이 된다고 한다. 김씨는 조선족 사장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서빙 등의 일을 하던 중 우연히 ‘탈북 브로커’를 만나게 됐다.
“뭣하러 중국에서 돈 버느라 고생하느냐는 거예요. 남한에 가서 몇 달이면 더 큰돈을 벌 수 있다면서 자신이 데려다줄 테니 남한으로 가라는 거예요.”
김씨의 마음이 흔들렸다. 남한으로 가는 건 불법이지만 몰래 건너갔다 몇 달 뒤 중국으로 다시 나와 북한으로 돌아가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브로커도 남한에서 여섯달만 머무르면 여권이 나온다고 꼬드겼다. 2011년 7월말 김씨는 10여명의 북한 동포와 함께 ‘탈북자 그룹’에 속했다. 탈출 비용은 남한에서 정착지원금이 나오면 계산하기로 했다. 브로커에게 북한 여권을 내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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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초 김련희씨는 ‘북한에 있는 어머니가 위독하니 평양으로 어서 돌아오라’는 연락을 중국 거주 친척을 통해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지난달 8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인터뷰 도중 이 이야기를 꺼냈다. 차분하게 말하다가도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금세 눈물을 쏟아냈다. 강재훈 선임 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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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초 김련희씨는 ‘북한에 있는 어머니가 위독하니 평양으로 어서 돌아오라’는 연락을 중국 거주 친척을 통해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지난달 8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인터뷰 도중 이 이야기를 꺼냈다. 차분하게 말하다가도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금세 눈물을 쏟아냈다. 강재훈 선임 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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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초 김련희씨는 ‘북한에 있는 어머니가 위독하니 평양으로 어서 돌아오라’는 연락을 중국 거주 친척을 통해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지난달 8일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인터뷰 도중 이 이야기를 꺼냈다. 차분하게 말하다가도 가족 이야기가 나오면 금세 눈물을 쏟아냈다. 강재훈 선임 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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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가서 몇달 일해 돈 벌라”는
탈북 브로커 말에 속아넘어가
여권 돌려받지 못하고 발 묶여
도망칠 형편 못 돼 남한에 와 국정원 합동신문센터 오자마자
바로 북송 요청했지만 거절당해
받아줬다면 남한 떠나기 위해
그가 북쪽과 접촉할 일도 없었고
간첩죄 처벌 받을 일도 없었을 것 희망하지 않았던 남한행 중국 국경을 넘어서기 전까지는 숨어 지내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브로커의 감시하에 정해진 곳에만 머물러 있어야 했다. 8월 중순까지 중국 국경을 넘지 못한 채 어느 한 도시에 머물러 있었다. 김씨는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탈북자 동료 ㅈ씨에게 정말 몇 개월이면 남한에서 나와 북으로 돌아갈 수 있는지 물었다. ㅈ씨는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브로커에게 탈북하지 않겠다고 뒤늦게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번 빼앗긴 여권은 돌려받을 수가 없었어요. 나 하나 도망쳐서 북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면 다행이지만 중간에 공안에 붙잡히기라도 하면 나머지 탈북자들은 위험에 처해지기 때문에 그것도 걱정이었고요. 결국 하는 수 없이 제가 일단 남한으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남한은 형제국가이니까 제가 사정을 설명하면 다 이해하고 북송시켜줄 것으로 생각했어요.” 김씨는 라오스와 타이를 거쳐 2011년 9월16일 인천공항을 통해 남한으로 입국했다. 김씨는 곧바로 탈북자들의 정치적 목적 등이 있는지를 심사하는 국가정보원 합동신문센터로 보내졌다. 김씨는 이곳에서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북송시켜달라고 요구했다. 국정원은 거절했다. “제가 아무리 부탁해도 불가능하다고만 했어요. 합동신문센터에 들어온 탈북자를 북송시킨 전례가 없고 제가 북에 돌아가면 죽임당할 게 뻔한데 그걸 알면서도 보내줄 순 없다고만 했어요. 저는 상관없으니 보내달라고 했는데 안 된대요. 그래서 제가 ‘당신들 북으로 간첩 보내는 길이 있을 거 아니냐. 그쪽으로 몰래 보내달라’고까지 말해봤지만 안 됐어요. 단식투쟁도 해보고 독방에서 한달 동안 안 나가겠다고 버텨보고도 했는데 안 됐어요.” 국정원은 김련희씨에게 ‘보호동의서’(대한민국 국민 자격을 부여받고 탈북자 정착 지원을 받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지 않으면 하나원(남한 정착 교육시설)에 갈 수 없고 북송도 안 되고 합동신문센터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김씨는 보호동의서를 쓰고 남한 사회에 나오기로 했다. 곧 여권이 나올 것이니 그때 중국으로 가면 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2012년 1월26일 김련희씨는 하나원을 나왔다. 경북 경산시의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았다. 김씨는 평양에서 양복사로 일했기 때문에 섬유산업이 발달된 대구 인근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국정원이 추천했다고 한다. 그는 바람대로 여권을 발급받아 중국으로 나갈 수 있었을까. 그가 맞닥뜨린 상황은 그러나 더욱 꼬여만 갔다. 2년 뒤 김련희씨는 ‘간첩’이 되어 있었다. 자살 기도 ‘탈북자 간첩’의 주인공 2014년 11월 한 언론에 위장 탈북 여성이 간첩 신분이 드러나자 대구구치소 등에서 다섯차례 자살 기도를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위장 탈북 간첩으로 소개된 여성은 바로 김련희씨였다. 검찰과 경북경찰청 보안수사대는 ‘김씨가 수사기관에 자신의 간첩 혐의가 드러나자 자살 기도를 했다’고 설명했다. ‘간첩 김련희’는 재판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2014년 12월 대구지방법원이 국가보안법 위반(잠입·탈출, 회합·통신 등)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하자, 김씨가 항소했지만 극도로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보였다. 지난 4월 대구고등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김씨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고, 김씨는 풀려났다.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어한 조금 특이한 탈북자에 불과했던 김씨는 왜 간첩으로 변해버린 것일까. 김씨가 겪은 비극은 중국 선양의 북한영사관에 전화를 건 것에서 시작됐다. “하나원에서 나온 뒤 여권 발급을 신청했는데 경산시가 발급이 불가하다고 통보했어요. 왜냐고 물었더니 국정원에서 거절했다는 거예요. 지인에게 알아보니 여권 발급기관은 국정원이 아닌데 무조건 국정원에다만 문의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국정원에 물어보니 ‘저는 차단됐으니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대체 뭔 소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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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련희 사건’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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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좀 구출해달라” 도움 호소
신원특이자 분류돼 여권도 안 나와
강제추방되려나 싶어 간첩 행세
집과 구치소 등서 수차례 자살기도 북송 요청 탈북자 관련법 규정 없어
남쪽으로 잘못 떠내려온 북한 어선
국정원이 조사한 뒤 북송시키듯
북송을 요구하는 탈북자는
인도주의 관례 따라 보내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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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오후 김련희씨는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을 다시 찾았다. 2013년 7월21일 김씨는 이곳에서 남북 여자 축구 경기를 보았다. ‘조국의 동포’를 눈앞에서 지켜보며 김씨가 눈물 흘렸던 이날에 대해 남한의 수사당국은 탈북자 정보가 담긴 유에스비(USB)가 북쪽에 건네진 날이라고 판단했다. 김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유죄 판결을 받고 지난 4월까지 구치소에 있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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