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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오달수.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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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 ‘천만요정’ 오달수 인터뷰
올해 ‘삼천만 영화’의 주역이 된 그가
추석에 들려주는 연기와 인생 이야기
올해 한국 영화계는 동원 관객 1천만명을 넘어선 영화 세 편을 만들어내는 초유의 기록을 썼다. 전후 격변 시대를 산 아버지 세대의 삶을 그린 <국제시장>이 올해 초 1천만명을 훌쩍 넘은 관객을 모았고, 일제 강점기 독립군들의 친일파 암살작전을 다룬 <암살>과 부패한 재벌 권력에 맞선 광역수사대 형사의 활약이 펼쳐진 <베테랑>이 나란히 관객수 1천만명을 넘었다. 이들 ‘천만영화’에 담긴 앞 세대의 회한과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아픔, 현실을 넘어선 정의 실현과 응징은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카타르시스를 선사했음이 틀림없다. 그 환희의 순간들을 모두 함께한 한 명의 배우가 있다. 덕수(황정민)의 오랜 친구이자, 하와이피스톨(하정우)의 조력자, 서도철(황정민)의 상관이었던 오달수(47)다. 그는 2002년 데뷔 이후 50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해 ‘명품조연’으로 불리는, 올해 초엔 누적 동원관객 1억명을 넘어서 ‘천만요정’이 된 배우다. 조만간 첫 단독주연의 영화도 개봉한다. 추석 연휴를 일주일 앞둔 지난 19일, 그를 만나 영화 데뷔 이전 오랜 세월 몸담았던 연극 무대와 영화,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나는 비극엔 안 어울려…슬퍼도 ‘페이소스’랄까”
▶ 관객몰이를 하며 흥행하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엔 몇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좋은 시나리오와 유명 배우, 확실한 배급망 같은. 특히 출연 배우가 누구인지는 영화의 흥망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지금까지 ‘천만영화’에 무려 7번이나 출연한 배우 오달수는 단지 운이 좋았던 걸까요? 실제로 만난 배우 오달수는 우리가 그동안 봐왔던 영화 속 캐릭터들보다, 더 차분하고 진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 ‘반전 캐릭터’ 속에 관객을 홀리는 마력 같은 것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흙먼지 날리는 누런 하늘. 버려진 야적장에 홀로 선 주인공 ‘선우’(이병헌) 앞에 낡은 차 한 대가 다가와 선다. ‘명구’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천천히 손잡이를 돌려 운전석 창문을 연다. 영화가 시작되고 1시간이 조금 넘은 시간. 2시간짜리 영화의 한가운데에 러시아 무기 밀매상 명구가 있다.
“어디다 쓸 거요? 돈 아무리 많이 줘도 우린 거 확실하지 않으면 물건 못 주지.”
특유의 억양. 명구는 이어 뒷좌석 외국인과 러시아 말로 실없는 승강이를 벌인다. 그가 쓰는 러시아어엔 한국의 경상도 사투리가 섞였다. 명구는 잠시 뒤 걸려온 전화에 한눈을 팔다 야적장 한곳에 세워진 중장비에 차를 들이박는다. 당황한 표정의 선우. 명구는 왼손과 오른발에 깁스를 한 채 선우를 자신의 보스에게 데려가고 보스와 러시아인 동료, 명구는 선우가 쏜 총에 허망하게 죽는다. 선우가 쏜 총 한 발이 정확히 명구의 미간을 뚫고, 명구가 선우를 향해 쏜 다연발총은 모두 빗나간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명구의 출연 시간은 채 10분이 되지 않는다. 시종일관 잔혹한 폭력과 살인, 복수로 일관된 누아르 영화에서 유일하게 코믹한 상황이 이 10분 동안 펼쳐진다.
명구를 연기한 배우 오달수(47)의 별명은 ‘요정’이다. <암살>의 최동훈 감독은 전작 <도둑들> 촬영 뒤 “관객과 맞서는 것이 아니라 일순간 관객을 무장 해제시키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요정 같은 존재”라며 오달수를 치켜세웠다. 요정은 최근엔 ‘천만요정’으로 거듭났다. 올해 1천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한국 영화 세 편에 모두 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개봉한 <국제시장>에선 덕수(황정민)의 오랜 친구 ‘달구’가, 지난 7월 개봉한 <암살>에선 하와이피스톨(하정우)의 조력자 ‘영감’이, 8월에 개봉한 <베테랑>에선 서도철(황정민)의 상관 ‘오팀장’이 오달수였다.
그의 ‘천만영화’ 출연은 도합 7번째다. 역대 한국 천만영화 13편 중 <국제시장>, <괴물>, <도둑들>, <7번방의 선물>, <베테랑>, <암살>, <변호인>이 모두 오달수의 출연작이다. 다음으로 천만영화 출연작이 많은 배우는 3편씩을 찍은 류승룡, 정진영 정도다. 지금까지 오달수의 출연작이 동원한 관객은 1억5천만명에 육박한다. 흥행 성적만으로 가히 독보적이다. ‘싫어하는 사람이 없는, 누구나 좋아하는 배우’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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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서울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Hu:)’에서 만난 배우 오달수(47)의 다양한 표정. 그는 4시간 남짓한 인터뷰 시간 동안 시종일관 차분하고 진지한 태도로 신중히, 단어를 골라가며 느리게 말했다. 이따금 영화 속 캐릭터의 모습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의 성격에 대해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리는 편”이라 했다. 현실 속 오달수는 영화 속 달구(<국제시장>)와, 영감(<암살>)과, 오팀장(<베테랑>)과는 다른 새로운 캐릭터였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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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 예능프로 섭외 다 거절
사전계약서엔 “오락프로 안한다”
‘암살’과 ‘베테랑’이 흥행대결 해
홍보활동 아예 말라는 주문 받기도 연출가 이윤택 선생은 나보고
“악할수록 연민이 가야 한다”
연애할 때 멋있어보이려 하자
“사람은 꼬라지대로 연기해야”
난 하회탈 같아 비극엔 안 맞아 첫 주연작 ‘대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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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요정’ 오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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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입장에선 아무 편견도 없어
말 나온 김에 나의 정치성향은
“운전수의 급격한 우회전은
승객들을 좌편향시킨다는 것” 결혼 위해 주유소 취업 1년 빼곤
21살 때부터 연극밖에 안 했다
어딘가에 우직한 무한애정 줬고,
그래서 배신당하지 않았는데
청년실업자들에게 그 말 하고파 연극배우가 위대해 보였다 -이전엔 연극에 전혀 관심이 없지 않았나? “그랬다. 그런데 연습할 때 조명기 달고 있던, 나랑 편의점에서 같이 물 사먹던 사람이 최종 리허설 때 보면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주 커 보이는 사람으로 무대에 서 있더라. 연극을 하겠다고 덤벼들지 않아도 그렇게 접하다 보면 자연스레 위대해 보인다. 특히 여럿이 함께 단체로 만드는 수공업적 작업이 남루해 보이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희곡이 나오고 무대가 만들어지고 포스터가 찍혀 나오고 연기를 하고. 극장이란 빈 공간이 꽉 찬 느낌, 수공업적인 창조랄까.” -그러다 출연까지 한 건가? “어느 날 이윤택 선생이 ‘배역 하나가 펑크 났다’며 날 불러 맡긴 게 연극 <오구>의 ‘문상객 1번’이었다. 공연 시작 5분 뒤 등장해서 끝날 때까지 2시간 동안 마당에 앉아 화투 치고 앉아 있는 역할이다. ‘쓰리고다’ 이런 대사 하면서.” -직접 출연하니 어떻던가? “관객석과 무대의 구분이 없는 마당극이었다. 문상객으로 앉아 있는 내 바로 뒤에 관객이 있었다. 패닉이 되더라. 정말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근데 이게 세계적 연극이 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연극이 됐다. 나중엔 독일, 일본으로 순회공연도 다녔다. 고생스러웠지만 계속하다 보니 인이 배고 그러다 연극에 젖어든 거다. 그 뒤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연극만 했다.” 오달수는 연극배우가 된 3년 뒤인 1993년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에서 첫 주연을 맡는 등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여러 차례 <오구>에 출연했다. <오구>는 그의 데뷔작이자, 연기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애착을 갖고 출연한 작품이었다. <오구>의 출연진은 20여명인데, 문상객 1번으로 시작한 그는 나중엔 주인공 격인 상가의 맏상제 역까지 맡았다. 오달수가 맏상제였을 때 상대역인 노모가 배우 강부자였다. -애초 연극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나. 우연히 시작한 일인데 ‘계속해야 하나’ 그런 회의가 없었나?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연극하겠다고 찾아온 사람들도 보통 1년 버티면 많이 버틴다고 한다. 많이들 왔다 나간다. 너무 힘들어서 스님이 된 친구도 있었다.” -뭐가 힘든가? 수입이 적은 것? “다 힘들다. 쌀은 사야 하니 관객을 모으기 위해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는 게 첫 번째 부담이고, 다음이 돈이 안 된다는 거. 우리나라에 신극이 들어온 게 1920~30년대인데 199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신극이 들어온 이후로 올해가 가장 힘들다’는 얘기를 해마다 한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재미있을 수 있나? “극장 안에서 같이 굶고, 같이 고생하고, 같이 포스터 붙이고, 같이 밤새우고. 그래도 좋다고 날짜 지난 포스터 둘둘 말고 야구공 만들어서 극장 안에서 야구 하고. 재미있다. 정이랄까. 날 포함해 연극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인간이 그리워서, 외로워서, 그런 사람들 많을 거다. 얼마나 좋나? 앞에 수많은 관객들 앉아 있고, 옆엔 매일 부대끼는 식구들, 동료들 있고.” -연극을 그만둔 적은 없었나? “딱 한 번, 결혼을 해야 했을 때. 아내는 이윤택 선생에게 연기 배우겠다고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온 극단 동료였다. 3년 연애해서 결혼했는데, 처갓집에서 연극하는 사람한테는 딸 못 주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만두고 1년 동안 주유소에서 일했다. 1년 뒤 처갓집에 ‘난 연극배우 아니다. 주유소 직원이다. 결혼시켜달라’고 했더니 시켜주시더라. 주유소는 그 뒤 3개월 만에 그만뒀다. 스물아홉살 때였다. 그때 조광화라는 극작가 겸 연출가가 <남자충동>이란 연극을 하는데 같이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를 해왔다. 바로 짐 싸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생활은 어땠나? “힘들었다. 결혼 생활도 얼마 못 갔다.(웃음) 6년 살다 이혼했다.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겠나. 아내는 연극 그만두고 나름 직장도 다니고 돈도 잘 벌었는데…. 지금은 아이 문제로 의논할 일 있으면 만나고 아이랑 여행 간다든지 하는 건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인 딸은 부산에서 할머니와 고모들이 돌봐주고 있다. 아무튼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골치가 아파졌다. 양육 문제도 신경이 쓰이고 또 정말 외로워지기도 했고. 서울에 그야말로 혼자 남겨졌으니.” -연극은 어땠나? 어떤 작품들에 출연했나? “<남자충동>이 굉장한 인기를 끌어서 그때 출연했던 배우들이 다 잘됐다. 프로필에 <남자충동>이 쓰여 있으면 그거 보고 캐스팅했다. 출연작이 ‘문제작’이라 할 작품들이 많았다. 운이 좋았다. 1999년엔 <흉가에 볕 들어라>란 작품에서 주연을 했는데 센세이셔널한 극이었고, 2001년엔 <인류 최초의 키스>란 작품을 했다.” -영화에선 주로 이상하거나 코믹한 역을 많이 맡았다. 연극에서는 어땠나? “임팩트 있는 역할. 어떻게든 관객한테 기억이 되는 역을 많이 했던 것 같다. <흉가에…>에선 30년 동안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인물이다. 아침에 눈뜨면 내가 여기 왜 왔지? 그러면서. 흉가에 운명적으로 묶여 헤어나오지 못하는 일종의 광인. <인류…>는 청송보호감호소 이야기인데, 미친 척해서 감호소를 빠져나가려는 사람이었다. 자기 똥도 먹는.” 함민복·김수영 시인 좋아해 오달수는 부산 연희단거리패 시절 딱 한 번 연극 연출을 한 적이 있다. 공연용이 아닌, 단원들 훈련용으로 만든 작품이었는데 이때 단원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자주 가던 술집 구석방에서 단원들이 오달수 몰래 신발까지 숨겨놓고 술을 마신 것이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그냥 가려던 오달수가 이상한 느낌에 방문을 열었고, 숨죽이고 있던 단원들과 마주쳤다. 다시는 연출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그는 이때 심한 외로움을 느꼈다고 했다. 그와 어울려 보이지 않았던 ‘외로움’, ‘고독’ 같은 것들이 뚜렷이 느껴졌다. -시구를 인용하며 말씀하시는 걸 보니 확실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좋아하는 시인이 있나? “함민복 시인을 좋아한다. 강화도에 사는. 가장 존경하는 시인은, 이분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김수영 시인이다. 함민복 시인이 김수영 문학상을 받아서 더 좋았다. 김수영은 너무 인간적인 사람 같다. 산문에 보면 그런 게 있다. ‘나는 네가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그런 바보 같은 순간이 있다’. ‘나의 가족’이란 시는 감동 그 자체다.” -언제 주로 그런 문학작품들을 보셨나? “아버님께서 많이 보셔서 집에 책이 많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라는, <설국>을 쓴 일본의 소설가부터 시작해 쇼펜하우어니 헤르만 헤세니… 고교 때 뜻도 모르면서 읽었다. 쇼펜하우어 같은 염세주의자들은 죽겠다고 산속에 권총 한 자루 들고 들어가서 늙어 죽지 않나. 지나고 보면 그런 것들이 감성의 자양분이 된 거 같다.” -본인이 맡은 배역은 아니지만 인상적이어서 외우고 있는 대사 같은 게 있을까? “승룡이(류승룡)가 <7번방의 선물>에서 ‘내 딸로 태어나줘서 고맙다’ 하지 않나. 그러면 딸이 그런다. ‘내 아버지여서 고맙다’고. 시나리오에서 그 대사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이 들면 점점 약해지는 것 같다.” -20년 뒤에도 배우를 하고 있을까? 맡고 싶은 배역이 있다면? “살아나 있으면 다행이다.(웃음) 지금이야 개성 있는 역할도 하고 액션도 할 수 있지만 그땐 원하든 원치 않든 프레임 자체가 아주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 안에서 뭐든 하고 있을 것이다.” -명절이다. 요즈음 명절에 가장 힘든 이들이 청년실업자들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덕담 한마디 하신다면? “난 스물한살 때부터 결혼 승낙받기 위한 1년 빼고는 연극밖에 안 했다. 바보 같지만 우직했던 거다. 돌이켜보니 어딘가에 무한 애정을 줬고 그래서 배신당하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 청년들이 취업 때문에 너무 고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언가 자기가 꼭 하고 싶은 것에 무한 애정을 쏟으면 언젠가는 그걸 고마워할 날이 오리라는 게 내 지론이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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