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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26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언론회관 프레스룸에서 열린 친북반국가행위 인명사전 편찬 관련 기자회견 모습. 한 참가자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단이 빠진 것은 잘못이라며 고영주(왼쪽 둘째)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에게 항의하다 제지당하고 있다. 항의를 주도한 이들은 ‘빨갱이 감별사’인 고영주 위원장을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몰아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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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한홍구가 쓰는 ‘고영주의 역사’
60대 중반을 넘긴 남성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최근 우리 사회는 두 명의 스타 탄생을 보았다. 김영만과 고영주, 한 분은 많은 사람들, 특히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종이접기로 위로와 추억을 선물했다면, 또다른 분은 말 잘하기로 소문난 의원들이 어안이 벙벙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로 말의 전당 국회를 들었다 놓으며 망언의 역사를 다시 썼다.
앞의 글에서 김의겸 기자는 고영주가 노무현 대통령을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본 것에 빗대어 고영주를 ‘변형된 출세주의자’로 불렀다. 좌절된 출세욕이 고영주의 막가파식 행동양식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있는 분석이지만, 또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고영주가 2006년 고검장 승진에 탈락하여 옷을 벗은 뒤 보여준 일련의 행동은 단순한 불만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사명감의 발로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검찰공화국이 되면서 차관급인 검사장 자리가 무려 55개로 늘어났다. 검사장으로 옷을 벗는 사람들의 수가 매해 십수명은 된다는 이야기다. 그중 장관이나 의원은 아니더라도 나름 물 좋은 자리를 맡게 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퇴임 후 고영주가 맡은 공직은 사학분쟁조정위원회(위원), 방송문화진흥회(감사, 이사, 이사장),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위원) 등이다. 보는 입장에 따라서 물 좋은 자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고영주가 누구의 추천으로 어떤 경로를 거쳐 이런 자리에 임명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전직 검사장급들이 돌아가며 맡는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수많은 공안검사들 중에서도 유독 고영주만이 아스팔트 우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선에서 고군분투해왔다. 그가 맡은 자리는 ‘전관예우’ 차원에서 맡았다기보다는 자칭 ‘애국세력’들에 의해 공안 칼잡이로 격전지에 파견되거나 본인이 자청해서 뛰어든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엄청난 사명감
흥미있는 점은 그가 이런 활동을 통해 사법시험 기수를 중시하는 풍토와 상관없이 이명박 정권 이후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청와대 민정수석 등의 후보자 물망에 꾸준히 올랐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동아일보>에 따르면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검찰총장 인선을 하면서 고영주(사시 18회), 차동민(22회), 박한철(23회), 안창호(23회), 남기춘(25회) 등 전직 검찰간부에게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검증 동의 요청서를 보냈지만 안창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고사했다고 한다. ‘변형된 출세주의자’ 고영주가 검찰총장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영주처럼 척 보면 공산주의자인지 판별할 수 있는 독심술을 갖지 못한 처지인지라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일 큰 이유는 청문회 통과를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튼실한 로펌에서 7년쯤 변호사로 있으면서 벌어들였을 막대한 수임료가 공개된다면 청문회는 통과 못한 채 망신만 당하는 상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저쪽 동네에는 미운 놈 장관 추천하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다 있을까. 고영주가 맡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황교안이 맡은 법무장관이나 총리에 비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청문회라는 번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대는 현역으로 마쳤고, 학위는 서울공대 졸업 학사학위가 끝이니 표절 논란에 걸릴 일도 없는 고영주가 인사검증을 마다했다면 돈 문제나 위장전입 같은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나, 아니면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 임명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보고 들러리 서기 싫다고 검증을 거부한 것일 수도 있다.
2006년 고검장 승진 탈락 뒤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을 보면
불만 표출 넘은 사명감의 발로?
사분위, 방문진, 세월호 특조위 등
간 곳마다 진보-보수 대립 최전선
이명박 정권 이후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청와대 민정수석 물망
실제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검증
동의 요청서를 보냈지만 고사
청문회 통과 자신 없어서였을까 고영주가 걸어온 길을 볼 때 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엄청난 사명감일 것이다. 고영주 스스로가 보기에 ‘애국진영’에 자신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은 없다. 그것은 밖에서 보아도 마찬가지다. 청문회 때문에 임명직에 나갈 수 없는 자들은 왕왕 선출직인 국회의원에 도전하는데, 고영주가 검사 옷을 벗은 뒤 고향 보령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국회의원이 되면 그저 300분의 1일 뿐인데, ‘애국진영’ 내에서는 가장 헌신적으로 모든 문제에 최일선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는 자신을 대신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변형된 출세주의자’ 고영주는 또 한편으로는 자나 깨나 “소는 누가 키우나” 걱정하고 있다. 고영주 주연의 막장드라마가 순기능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공안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공안검사들은 자나 깨나 나라걱정만 하는 애국자들이다. 주관적으로 말이다. 어떤 재치있는 사람은 20세기 전반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비교하여 한국은 매국노들이 나라를 망치고, 일본은 애국자들이 나라를 망쳤다고 한 바 있다. 지금 백발의 공안검사의 각별한 나라사랑이 나라의 각별한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고영주는 자신이 “남보다 국가적 위험을 먼저 인식”한다면서 자신에게 거슬리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 세상이 많이 변하여 이런 낙인찍기는 예전같이 효과적이지는 않다. 같은 검찰 출신의 새누리당 강경파 의원으로 고영주를 변호하던 박민식조차 우상호 의원이 친북용공이라면 대한민국 국민 수백만이 친북용공이란 말이냐며 반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과거 공안사건에서 수사관들은 피의자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전제해놓고 심문을 하곤 했다. “너 공산주의자지?” 이런 질문은 빨갱이로 몰린 수십만이 죽어간 한국 사회에서 치명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밀실에서는 훨씬 더한 얘기도, 훨씬 더한 질문도 마구 퍼부어지곤 했다. 간첩사건으로 고생한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너 공산주의자지?”라는 질문에 아주 편안하게 그렇다고 답하게 될 때가 있다고 한다. “너 이 자식, 김일성 몇번 만났어?” 같은 황당한 질문을 매타작과 더불어 한 이틀 받다 보면 “너 공산주의자지?” 같은 질문이 현실적으로 들려 안도감을 갖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뇌구조가 형성된 공안검사들이 자신의 독심술에 대해 엄청난 자기확신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박근혜 정권이 이런 사람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크나큰 비극이다. 그는 ‘공산주의’란 말을 좋아했다 예나 지금이나 공안검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이겠지만, 1960년대만 해도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인혁당사건의 기소를 거부하기도 했고, 유신 말기에는 대검 공안부장 박준양이 도시산업선교회 목사들이나 관련 여성노동자들을 불순세력으로 조사하라는 박정희의 지시에 대해,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호소하는 사람들을 불순세력으로 잡아들일 수 없다고 맞서기도 했다. 1980년 광주학살을 거치면서 공안 수요가 폭증하여 공안부가 각광을 받게 되었지만, 과거 검찰이 보여준 최소한도의 양심과 자존심은 사라져버렸다. 1986년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나 1987년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는 검찰이 청와대를 등에 업은 경찰에게 밀릴 정도로 체면이 실추되기까지 했다. 그러니 군사독재 시절의 검찰이 군이나 안기부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시작되면서 군과 안기부와 보안사의 힘이 약화되자 검찰이 체제 수호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고영주는 대한민국이 검찰공화국이 되고, 검찰 내에서 공안부의 위상이 막강하던 시절 공안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대검 공안기획관을 지냈다. 이 무렵, 고영주는 공안 내부에서 최고의 기획통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초임 공안검사 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영화 <변호인>의 모델이 된 부림사건의 검사였으며, 1982년 3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서도 담당 검사였다. 부산 미문화원 사건 당시 아직 미성년자였던 의예과 학생으로 고영주에게 취조를 당한 ‘가슴 따뜻한 달동네 의사’ 최충언은 고영주에게서 ‘참 무식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그가 좋아하는 단어는 공산주의였다. 북유럽식의 사회민주주의를 말해도 민주주의는 빼고 사회주의란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다름없다는 논리였다. 19살인 내가 느낀 바로는 요샛말로 하면 ‘완전 초딩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공안검사 고영주는 스스로 부림사건 피의자들로부터 “‘생산력’과 ‘생산관계’니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회과학 용어도 처음 들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처음 공안검사를 시작했을 때는 미성년자였던 어린 대학생 피의자로부터 검사가 저렇게 무식할 수 있는가 소리를 들었던 고영주였지만, 경기고 출신의 자존심 강한 엘리트답게 학습능력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단 학습능력과 사고방식의 과감한 단순성은 별개의 것이다.) 1985년 11월 대학생들이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을 점거했을 때 검찰은 관련 학생 191명을 모두 구속했다. 과거에는 적극 가담자와 단순 가담자를 선별하여 적극 가담자는 구속하고 단순 가담자는 즉심에 넘기는 것이 관례였는데, 김원치·고영주 등이 ‘공모 공동정범’ 이론을 제시하며 전원 구속의 강경방침을 주도했다고 한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면이 형성되면서 야당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때 고영주는 ‘북한 형법’이라는 신무기를 개발해 북한 형법이 있는 한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만들어낸 것으로 검찰 내에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후 고영주는 야당이 국가보안법의 대체 법안으로 ‘민주질서보호법안’을 제출했을 때도 국회 토론회에 나가 이 법안은 “도저히 안보형사법으로서의 기능을 기대할 수 없는 부실한 내용”이라며 국가보안법 폐지 절대 불가의 입장을 고수하여 야당과 대립했다고 한다. 부림사건과 관련하여 고영주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부림사건 피의자 중에 한 사람인 이상록이 “지금은 우리가 검사님한테 조사받고 있지만 공산주의 사회가 오면 우리가 검사님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상록이 계속하여 “검사와 변호사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전파하려고 했던 사람들인데, 이것이 고문을 받고 겁에 질린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이겠습니까? 너무나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도저히 고문을 받았거나, 강압적 경찰 조사에 주눅이 든 피의자라고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부림사건’ 핵심 고호석의 증언 부림사건의 핵심인 고호석은 고영주가 “당사자가 죽었다고 멋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분개했다. 고영주는 처음에 부림사건 피의자가 공산주의 세상이 오면 검사가 심판받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주장할 때는 그런 발언을 한 인물을 특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부림사건 관련자들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냐고 반발하자 2006년 세상을 떠난 이상록이 그랬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고호석은 고영주가 “고인이 돌아가신 것을 악용해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고 그의 비열함을 규탄했다. 고영주는 대법원에서 부림사건 재심 무죄가 확정된 뒤에도 여전히 “부림사건은 공산주의 운동이며 오늘날 종북세력의 뿌리”라면서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사법부가 좌경화된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안검사들이 피의자를 직접 구타했다는 증언이 아주 드물게 나오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고 고영주에게는 이런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영주가 고문을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절절한 호소를 묵살했다는 증언은 여기저기 나온다. 부림사건에서의 고문이 문제가 되자 고영주는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고문당했다는 말들이 나왔지만 수사중엔 고문당했다는 얘기를 단 한번도 꺼낸 적이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고영주가 ‘공산주의자였지만 전향했다’고 칭한 김문수는 1986년 5월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사건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죽도록 고문을 당했다. 그는 “전기고문, 고춧가루 물 고문, 전기봉 고문과 심한 구타로 수사를 받는 동안 앉지도 못하고 소변도 못 볼 지경으로 전신이 망가져 검찰에 송치된 뒤 고영주, 정진규 검사에게 고문 흔적을 보여주며 이를 호소했으나 무시당했고 3차례에 걸친 고문 흔적 증거보전 신청도 서울형사지법과 대법원에 의해 모두 기각당했다”고 밝혔다. 검사를 평가할 때 다른 무엇보다도 수사능력이 중요하다. 과연 고영주는 뛰어난 수사검사였을까. 고영주가 처리한 사건 중 꼭 기억해야 할 일로 1986년 이돈명 변호사를 구속하여 8개월간 징역을 살린 일이 있다. 당시 수배중이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 이부영을 숨겨준 혐의로 구속된 것인데, 실제로 이부영을 숨겨준 것은 나중에 국가정보원장이 된 고영구 변호사였다.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이 당시 건강이 안 좋았는데 이돈명 변호사는 후배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자신이 이부영을 숨겨주었다고 나서서 옥고를 치른 것이다. 이 사건은 고영주의 구형 논고문이 <월간조선>에 실릴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고영주는 자신의 수사능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겠지만, 복잡하지 않은 사실관계를 밝혀내지도 못하고 환갑이 훨씬 넘은 원로 변호사를 구속하였으니 수사 면에서나 도덕 면에서나 씻을 수 없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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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주 당시 서울지검 형사2부 부장검사가 1998년 7월8일 포르말린 통조림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문화방송(MBC) 뉴스데스크 1998년 7월8일 방송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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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울지검 형사2부장으로 전보
주목받지 못하는 걸 못 견뎠을까
그가 수사한 ‘포르말린 통조림’은
터무니없는 가짜 사건으로 드러나 한총련을 베었던 그 칼로
전교조를 찌르고 통진당을 베고
공영방송과 세월호를 겨누고
‘종북인사’ 이름 새기라 하는
아스팔트 위의 ‘공안 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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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비시(MBC)공동대책위원회 위원들이 지난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율촌빌딩 방송문화진흥회 앞에서 최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를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한 발언으로 물의를 빚고 있는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의 퇴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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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14일 이계철(왼쪽) 방송통신위원장으로부터 방송문화진흥회 감사 임명장을 받는 고영주 변호사.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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