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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물고기다. 수십 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오랫동안 한국인의 쓰린 속을 달래고 밥상에 윤기를 더해왔다. 그 명태가 한국 바다에서 말라버렸다. 동해에서 자취(1981년 16만t→ 2007~2013년 1t 이하→ 2016년 6t)를 감춘 뒤에도 명태는 한국인들이 한해 가장 많이 먹고 가장 많이 수입하는 생선이다. 그 명태들이 거저 우리 밥상에 오르진 않는다. 한국인이 먹는 명태를 잡기 위해 명태를 먹지 않던 가난한 나라의 선원노동자들이 한국인이 타지 않는 원양어선을 타고 러시아 베링해로 간다.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송입-송출의 사슬에 묶여 그들의 삶과 노동은 깎이고 파인다. 2014년 12월1일 사조 오룡501호가 러시아 베링해에서 명태를 잡다 침몰했다. 사망·실종자 53명 중 42명이 외국인이었다. 침몰 뒤 3년이 꽉 찼다. 그사이 ‘갑’ 사조산업은 필리핀·인도네시아 유족들을 ‘을’로 삼아 ‘비밀해결합의서’를 체결했다. 6개월 뒤 사조를 상대로 ‘제대로 된 손해배상’을 요구한 유족들의 소송은 각하되거나 기각됐다. 사조가 합의서에 넣은 ‘조항 하나’가 끝까지 발목을 잡았다. 한국인의 ‘국민생선’ 명태는 그렇게 온다. ‘목숨값 1천만원짜리’ 이주 어선원들의 가난과 죽음의 바닷길을 따라 명태는 우리 밥상 위에 도착한다. ※다음 자료를 참고했다. 오룡501호 침몰사건 검찰 공소장, 사망자·실종자 가족의 손해배상 소장, 법원의 손배소 판결문, 사조-유족 ‘비밀해결합의서’, 전국원양산업노조-한국원양산업협회 ‘2014년 외국인 어선원 단체협약서’, 듀런·에포크 송출계약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무크타르 시체검안서, 공익법센터 어필과 국제이주기구의 ‘이주 어선원 인권 실태조사’ 보고서(‘바다에 붙잡히다’), 조사팀의 생존자·사망자 가족 현지 인터뷰(2015년 11월~2016년 2월) 녹취록. 비밀해결합의서와 유족 현지 인터뷰는 처음 공개된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출처 123r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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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명태가 오는 길
명태잡이 어선 사조 오룡501호 침몰 3주기
우리의 밥상을 차리는 ‘1천만원짜리 목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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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물고기다. 수십 가지 이름으로 불리며 오랫동안 한국인의 쓰린 속을 달래고 밥상에 윤기를 더해왔다. 그 명태가 한국 바다에서 말라버렸다. 동해에서 자취(1981년 16만t→ 2007~2013년 1t 이하→ 2016년 6t)를 감춘 뒤에도 명태는 한국인들이 한해 가장 많이 먹고 가장 많이 수입하는 생선이다. 그 명태들이 거저 우리 밥상에 오르진 않는다. 한국인이 먹는 명태를 잡기 위해 명태를 먹지 않던 가난한 나라의 선원노동자들이 한국인이 타지 않는 원양어선을 타고 러시아 베링해로 간다.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송입-송출의 사슬에 묶여 그들의 삶과 노동은 깎이고 파인다. 2014년 12월1일 사조 오룡501호가 러시아 베링해에서 명태를 잡다 침몰했다. 사망·실종자 53명 중 42명이 외국인이었다. 침몰 뒤 3년이 꽉 찼다. 그사이 ‘갑’ 사조산업은 필리핀·인도네시아 유족들을 ‘을’로 삼아 ‘비밀해결합의서’를 체결했다. 6개월 뒤 사조를 상대로 ‘제대로 된 손해배상’을 요구한 유족들의 소송은 각하되거나 기각됐다. 사조가 합의서에 넣은 ‘조항 하나’가 끝까지 발목을 잡았다. 한국인의 ‘국민생선’ 명태는 그렇게 온다. ‘목숨값 1천만원짜리’ 이주 어선원들의 가난과 죽음의 바닷길을 따라 명태는 우리 밥상 위에 도착한다. ※다음 자료를 참고했다. 오룡501호 침몰사건 검찰 공소장, 사망자·실종자 가족의 손해배상 소장, 법원의 손배소 판결문, 사조-유족 ‘비밀해결합의서’, 전국원양산업노조-한국원양산업협회 ‘2014년 외국인 어선원 단체협약서’, 듀런·에포크 송출계약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무크타르 시체검안서, 공익법센터 어필과 국제이주기구의 ‘이주 어선원 인권 실태조사’ 보고서(‘바다에 붙잡히다’), 조사팀의 생존자·사망자 가족 현지 인터뷰(2015년 11월~2016년 2월) 녹취록. 비밀해결합의서와 유족 현지 인터뷰는 처음 공개된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출처 123rf.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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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일은 사조 오룡501호 침몰 3년째가 되는 날입니다. 오룡호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고 가장 많이 수입하는 생선’ 명태를 잡는 어선이었습니다. 동해에서 사라진 명태를 찾아 러시아 베링해로 나아갔던 그 배의 선원 60명 중 48명이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가족의 생활을 짊어지고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온 그들은 한국인이 가기 꺼려하는 원양의 바다에서 한국인들의 ‘국민 생선’을 잡다 사망했습니다. 오룡호 출항 전과 후, 침몰 전과 후, 그 돌이킬 수 없는 항로를 따라가며 죽어서도 서러운 그들의 머나먼 길을 밟았습니다
러시아 베링해로 향하는 원양어선
한국인이 외면한 일 찾아서 떠나온
멀고 가난한 나라의 이주 어선원들
일부는 계약서 배와 다른 배 승선 2014년 7월 오룡호 타고 부산 출항
망망한 바다 위에 붙잡혀 감내하는
이해할 수 없는 고용의 복잡한 사슬
세 달치 월급 이탈보증금으로 보류
한국 선원 최저임금의 3분의 1 급여 뱃일은 4D로 불렸다. 3D(Dirty·Difficult·Dangerous)한데 멀기(Distant)까지 했다. 명태를 잡기 위해 바다 위의 4D를 감내하는 한국인은 드물었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명태를 잡기 위해 명태를 먹지 않고 살아왔던 가난한 외국인들이 한국 배를 탔다. 한국 원양어선원이 되기 위해 듀런은 다단계로 꼬인 고용 절차를 거쳤다. 한국 선사들은 노동력을 모집(현지 송출업체)하고 수입(한국 송입업체)하는 외주 대행업체를 뒀다. 송출·송입업체 사이에 제3의 브로커가 끼어들기도 했다. 단계가 쪼개질수록 노동의 값이 깎이고 가족의 삶이 흔들렸다. 듀런의 첫 3개월치 월급은 ‘이탈보증금’ 명목으로 지급 보류될 예정이었다. 송출회사는 그 돈을 ‘리드 머니’라고 표현했다. 계약기간 동안 도망가지 않으면 계약 종료 뒤 귀국한 다음에야 입금되는 돈이었다. 인도네시아 송출업체는 송출비용을 별도로 뗐다. 무크타르는 송출업체(코인도)에서 빌리는 방식으로 300만루피아(24만원)를 냈다. 헤루는 누나에게 250만루피아를 빌렸다. 계약 뒤 마닐라에서 일주일 교육을 받은 듀런은 7월9일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날 오후 부산에 도착한 그는 다음날 승선할 배로 안내됐다. ‘이탈 방지’를 이유로 원양 이주 어선원들의 한국 체류 기간은 최소화됐다. 육지를 밟을 땐 한국 송입업체 직원들이 따라다녔다. 듀런의 눈앞에 정박한 배는 계약서에서 외운 포세도니아가 아니었다. 그는 오룡501호(사조산업) 갑판에 발을 디뎠다. 그해 3월 남태평양 미드웨이 해역으로 조업 나갔던 오룡501호는 7월2일 부산 감천항에 귀항해 있었다. 선장은 본래 오룡503호(건조 1966년·무게 1555t)를 운항했다. 사조는 미드웨이 출항 전 48년 된 오룡503호를 폐선하고 선장과 선원들을 501호로 옮겨 태웠다. 9명의 필수승선 인원 중 자격기준(선박직원법)을 충족한 사람은 2명뿐이었다. 선장과 2등 항해사, 기관장, 1등 기관사가 기준에 못 미쳤고 2등·3등 기관사와 통신장은 아예 승선하지 않았다. 사조는 타인의 항해사 면허증과 선원수첩을 도용해 선장 승선 허가를 받아냈다. 부산지방해양수산청 공무원들은 승무원 명부와 선원수첩의 직책을 수정해 자격을 갖춘 것처럼 꾸몄다. 인도네시아 테갈에서 4950㎞를 날아온 헤루와 자카르타를 떠나 5125㎞를 올라온 무크타르가 오룡501호에 올랐다. 그들은 필리핀 루손섬 타기그 출신 로얼 알제세라(당시 30)를 그 배에서 만나 동료가 됐다. 오룡501호도 36살 된 늙은 배였다. 듀런보다 2살 적었고 헤루보다는 13살이 많았다. 1978년 스페인 선사가 건조해 아르헨티나 해역에서 조업했다. 2010년 사조산업이 인수해 러시아 국적선(사조-러시아 법인 합작선)으로 운영했다. 인수 당시 선박 흔들림을 보완하기 위해 철제 보강재 140t을 씌웠다. 선미 피시폰드(fish pond·어획물 선별 및 보관 창고)는 2배 확장했다. 명태를 한번에 2.2t씩 운반선으로 옮길 수 있는 인양하중 3t의 하역설비를 2011년 새로 설치했다. 무게 1753t과 기관출력 3238㎾로 개조된 오룡호는 2014년 2월 한국 국적선으로 등록(트롤)됐다. 사조는 하역설비 안전하중 3t을 0.9t으로 속여 한국선급에 검사를 신청(2014년 1월29일)했다. 2월28일 한국선급이 검사증서를 발급했다. 세월호 참사 47일 전이었다. 로얼이 501호에 승선했을 때 에포크와 재회했다. 로얼과 에포크는 503호를 타고 러시아~부산~하와이를 오갔다. 503호 계약 종료 뒤 에포크가 필리핀 송출업체(벤허)와 새로 계약한 배는 오양105호(사조오양)였다. 듀런과 에포크처럼 승선 당일 엉뚱한 배로 보내지는 경우가 잦았다. 계약대로 이행됐다면 타지 않았을 배가 그들을 회항할 수 없는 ‘그날 그 바다’로 데려갔다. 인도네시아 선원 36명(러시아에서 1명 하선), 필리핀 선원 13명, 한국 선원 11명이 2014년 7월10일 부산 감천항에서 러시아 베링해로 명태를 잡으러 출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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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서베링해에서 조업 중 침몰(2014년 12월1일)한 사조 오룡501호의 생존 선원 6명과 사망 선원 21명의 시신을 태운 러시아 운반선 오딘호가 2014년 12월26일 오전 부산 감천항(사하구)으로 입항했다. 사망 선원들의 관이 배에서 내려지고 있다. 부산/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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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501호에서 실종된 필리핀 선원 듀런의 사진을 아내가 지갑(왼쪽)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그의 품엔 남편이 한국 배를 타러 떠날 때(2014년 7월) 뱃속에 있던 아기가 안겨 있다. 공익법센터 어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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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니 32명, 필 10명, 한 11명 희생
필리핀 유족들 마닐라로 불러모아
1천만원에 일괄합의 서명받은 사조
합의서 “완전히 최종적·영구적 해방” “사인 안 하면 시신 못 받을까봐”
유족 손배소 각하·기각…대법 상고
고리의 사채 쓰며 생활고 시달려
고인 아내 “왜 하필 그 배였어요 이튿날 유족들은 개별 송출회사 사무실로 찾아가 ‘갑’ 사조가 내민 합의서에 ‘을’로서 서명했다. 듀런 아내는 12월23일 팔콘 사무실에서 “비밀해결합의서”에 사인했다. “(보상) 갑은 을에게 위로금으로서 미화 1만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한다. (책임의 부인) 을은 본 합의서의 어떤 조항도 갑 측에서 불법행위 또는 책임을 인정한다고 해석할 수 없다고 합의한다. (클레임의 포기) 을은 … 501 오룡호의 침몰 및 고인의 사망에서 발생하는 관련이 있는 모든 청구 및 권리로부터 갑과 그의 대리인 또는 대표자를 완전히, 최종적으로 그리고 영구히 해방시키고 면제하기로 약속한다. (소송) 을은 … 어느 국가에서도 민사 또는 형사 소송, 중재 또는 기타 소송에도 착수하거나 참여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 소송에 착수하거나 참여한 경우 갑이 보상금을 지급할 의무는 즉시 취소되며, 을은 ㉮ 이자를 더한 보상금을 갑에게 환불하고 ㉯ … 갑에게 발생한 모든 비용을 지불하고 ㉰ … 법원이 재정한 모든 손해배상액을 지불해야 한다. (비밀유지) 을은 본 합의서의 조건, 합의에 이르게 된 사실이나 상황, … 등을 …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하여서는 안 된다.” 팔콘이 듀런의 아내에게 사조의 ‘보상금’을 송금했다. 달러가 페소로 송금되는 틈에 일부가 증발했다. 아내가 실제로 받은 금액은 43만페소(8544달러)였다. 남편의 석달치 월급(이탈보증금)으로 팔콘은 3만3천페소(655달러)를 보냈다. 계약서상 최소 월급(수당 없는 250달러×3)보다도 100달러가 적었다. 에포크 아내는 ‘호텔 회의’ 이튿날 벤허 사무실에서 사인했다. ‘목숨값 1천만원’으로 사조의 책임 면탈을 확정짓는 합의서에 유족들은 동의했다. “사인하지 않으면 남편 시신을 받을 수 없다”는 벤허 쪽의 말에 동요했다. 정말 그럴까 싶으면서도 아내는 “그 말이 위협으로” 들렸다. 아내는 “하루라도 빨리 남편의 장례를 치러주고 싶은 마음에 사인”했다. “1만달러를 현금으로” 받은 뒤 아내가 사조 쪽에 말했다.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 인도네시아의 무크타르 아내는 텔레비전 뉴스를 본 남편 친구의 전화로 소식을 접했다. 침몰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필리핀 쪽과 달리 사조는 인도네시아 유족을 직접 접촉하지 않았다. 송출회사로부터 침몰 소식을 먼저 전달받은 유족은 없었다. 유족이 직접 전화해야 송출회사(코인도)는 사실을 확인해줬다. 항의하는 무크타르 아내에게 코인도는 “사망 여부가 최종 확인되지 않아 연락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송출회사가 유족들을 자카르타로 불렀다. 헤루의 아버지는 사조로부터 1억8500만루피아(1500여만원)를 받는다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미지급 임금 1250만루피아(100만원)과 장례비용 2500만루피아(201만원)가 더해졌다. 보험금 1억5천만루피아(1209만원)를 ‘다행히’ 받았지만 아들의 최저임금으로 계산할 때보다 900만원이 적었다. 거칠고 아득한 일터에 불안해할 때마다 자신을 달래던 듀런의 말을 아내는 잊지 못했다. “괜찮아. 안 죽어. 죽더라도 걱정하지 마. 보험에 가입돼 있대. 우리 식구들 괜찮아.” 원양 이주 어선원은 죽어서도 차별받았다. 선주들은 한국인 승선 평균임금(2014년 해수부 고시 302만9천원)이 아니라 이주 어선원 최저임금으로 보상금을 산정하고 보험(송출국)에 가입했다. 대법원은 이주 어선원 재해보상에도 한국인 승선 평균임금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결(2013두5821·2016년 12월 선고)했으나 현실은 법으로부터 멀었다. 재해보상 기능을 하지 못하는 송출국 보험금조차 유족 다수는 수령하지 못했다. 듀런의 아내가 보험금을 받기 위해 팔콘에 전화했을 때 담당자는 “1~4년은 걸린다”고 답했다. 최종 사망 판정을 받지 못한 실종자여서 보험금 수령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듀런 아내의 전화를 더는 받지 않았다. 법과 제도에 서툰 이주노동자와 가족들이 법과 제도에 세련된 사람들 앞에서 항변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검안한 무크타르의 주검은 169㎝였다. 얼굴과 가슴과 왼쪽 어깨에 표피 박탈이 있었다. 양쪽 다리에선 멍이 발견됐다. 한국 검찰은 12월4일 무크타르의 시신을 “유족에게 인도하라”고 사건 지휘했다. 그의 주검은 2015년 1월8일 인도네시아에 도착했다. 에포크는 사망 두달이 찬 2015년 1월31일에야 필리핀의 아내 품으로 돌아갔다. 12일 전 해수부는 “사측 주관으로 외국인 선원 보상이 2014년 12월23일 완료됐다”고 발표(‘원양어선 안전관리 개선 대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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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13일 이른 아침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아야진항에서 오랜만에 소량의 명태가 잡혔다. 동해에서 모습을 감춘 명태는 2007년 이후 1t 미만(2016년 6t)으로 잡혔다. 고성/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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