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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복싱협회(WBA) 여자 페더급 챔피언인 최현미가 17일 오후 서울 노원구 서울기술과학대학교 특설링에서 열린 타이틀 방어전에서 도전자 태국 사이눔도이 피타클론에게 왼손 공격을 시도하고 있다. 최현미는 5회 TKO승으로 5차 방어에 성공 했다. 영상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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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에세이 ‘이사람’] 여성 챔피언 최현미
‘가짜 전적’ 논란 뒤 후원없어 챔피언 박탈위기
5차 방어전 성공 후 첫 소감 “난 가짜 아니다”
지난 5월 최현미의 프로 데뷔전이 허위라는 기사가 났다. 18살에 세계권투협회(WBA) 여자 세계챔피언에 올랐고, 새터민 복서로 유명세를 타면서 한국판 ‘밀리언달러 베이비’로 불린 그였다. 2008년 6월 챔피언 결정전을 치르기 전, 중국에서 치렀다는 프로 데뷔전이 아예 열리지 않은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탈북자가 중국에서 시합을 하는 건 위험한 일인데 어떻게’라는 의심이 먼저 퍼졌고, 결국 가짜 전적은 들통이 났다. 당시 심양섭 WBA 부회장이 프로 챔피언 타이틀 매치를 성사시키기 위해 무리수를 뒀다는 지적이 나왔다. 포털 사이트에서 최현미의 이름을 누르면 ‘가짜 전적’, ‘가짜 챔피언 파문’ 같은 연관 단어가 따라 검색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즈음 그는 누리집에 글을 썼다. “운동선수는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난 가짜가 아니다.”
# 가짜 전적 파문 딛고 어렵게 성사된 타이틀 방어전
4월에 방어전을 치렀으니, 6개월 안에 다시 방어전을 해야 했다. 방어전을 못 하면 챔피언 벨트는 반납해야 한다. 요즘 흥행이 안 되는 복싱에 돈을 대려는 스폰서는, 거의 없다. 한번에 1억2천~1억3천만원까지 드는 방어전이다. 그래서 늘 버겁다.
그의 아버지 최영춘씨를 만난 건 시합이 열리기 이틀 전이었다. 7호선 공릉역 근처 한 국회의원 사무실에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7월, 9월, 다시 10월. 예정된 경기가 잇달아 취소됐다. 아버지는 딸이 시합을 못하게 됐다고 이곳 저곳에 사정을 하고 다녔다. 청와대에 편지도 썼다. 그러다 찾아온 곳이 지하철 앞 국회의원 사무실이었다. 최현미가 심촌이라 부르는 동부은성 체육관의 양혜철씨도 아버지 옆에 있었다. 최은미에게 아버지는 매니저고 양씨는 프로모터인 셈이다. 둘 다 난생 처음 해보는 일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핸드폰 배경에 깐 딸의 사진을 보고 웃었다. “우리 현미가 몸을 다 만들었습니다. 꼭 이깁니다.” 의원은 새터민들의 축제로 최현미 방어전을 만들고 싶었다고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그냥 고마웠다.
# 얼굴만 집중 공격하다가 복부 공격으로 승부수
“현미야!”
5차 방어전이 열린 날, 링에서 선수 입장 사인을 받은 고모가 복도에서 외쳤다. 집에서 엄마가 가져온 챔피언 벨트를 옆에 들고.
녹색 반짝이 가운을 머리끝까지 내려쓴 최현미가 링에 올랐다. 이렇게 때리고 맞는 주먹질은 11살 때부터 했으니 이제 딱 10년째다. 천신만고 끝에 성사된 최현미의 5차 방어전은 17일 오후 서울 공릉동 서울과학기술대 체육관에서 열렸다. 성사조차 어려울 것 같은 방어전은 한국방송에서 생중계까지 되는 주목을 받았다. 여자 권투 경기가 공중파를 통해 생중계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1, 2라운드 내내 얼굴만 보고. 얼굴만 쳤다. 최현미가 허리를 쓰며 왼 주먹으로 던지는 쨉이 상대 얼굴에 꽤 잘 먹혔다. 3라운드, 상대가 얼굴 공격에 혼이 나 복부 경계를 느슨하게 할 때쯤 최현미는 복부만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상대 선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이용훈 관장과 간신히 세운 작전이다. 5라운드 19초. 붉은 유니폼의 태국 선수가 비틀거렸다. 심판은 경기를 끝냈다. 도전자는 주먹을 내렸고, 최현미는 티케이오(TKO)로 이겼다. # “고향이 평양이라는 이유로 챔피언이 묻히는 게 안타까워” 링 위에서 그는 춤을 췄다. 타이틀 방어를 자축하는 세레머니였다. 인기 여성 그룹 ‘카라’가 링 위에 오른 듯 그의 몸놀림은 현란했고, 카메라 플래시가 이곳저곳에서 번득거렸다. 가쁜 숨을 참고 마이크를 잡고 자기의 이름을 말했다. “제 이름은 최현미입니다. 높을 최, 드러날 현, 아름다울 미입니다.” 평양에서 온, 새터민 챔피언이 아닌 그냥 챔피언 최현미로 기억해달라는 뜻이었다. “ 여자가 복싱으로 세계 챔피언이 되는 건 진짜 힘든 건데 평양이 고향이라는 이유로.” 이 부분에서 그는 한 번 숨을 참는다. “챔피언이 묻히는 게 안타까워요.” 카메라를 든 취재진들은 그에게 “5월의 논란 이후 첫 경기였는데….”라며 소감을 물었다. 꽃다발을 안은 채 “죄송하다”고 먼저 답했다. “하지만, 운동선수는요.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거든요. 거짓된 챔피언이 아닌 진짜 챔피언이란 걸 오늘 보신 분들은 알 거예요.” 그가 환한 얼굴로 다시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글·영상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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