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투구 하고 있어요" 날씨 리포터 생활 9년째. 아직도 마이크가 겁나고, 두렵다. “매일 반복하다 보면, 느슨해지잖아요. 아무리 1분이지만, 대충 방송하면 신뢰를 얻을 수 없어요.” 유진씨다. 영상갈무리/조소영피디
[영상에세이 이사람] 봄을 기다리는 라디오 기상캐스터
그 방은 창문이 없다. 바깥을 볼 수 없다. 혹시 고시원에 살아본 일이 있다면 ‘맞아. 딱 그 크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집에서 머리를 말리지 못하고 나온 그가 기상청 방재 시스템에 접속한 시각은 새벽 5시50분. ‘윙’ 소리를 내는 컴퓨터는 두 번 부팅을 해야 켜졌다. 방송국 파업으로 5시 뉴스가 빠지지 않았다면, 시계는 4시50분을 가리켰을 것이다. 라디오 스피커로 아직 음악이 길게 새나왔다. 때 묻은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자그작 자그작’ 방에 퍼졌다. 젖은 머리 그녀는 6시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들어갈 날씨 원고를 혼자 준비했다.
# 새벽 5시50분. 새벽 별을 느끼는 기상리포터
“맑아요. 별도 보이잖아요. 서울 하늘에서 이렇게 넓은 면적에서 별 볼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요. 좋아요.”
크고 환한 보름달을 구름이 옅게 덮었다. 지난 9일 서울 동작구 기상청 주차장에서 처음 만났을 때, 라디오 기상리포터인 유진(34)씨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늘을 올려다봤다. 차에서 내리면 하늘부터 보고, 날씨를 느끼는 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과도 같다.
“하늘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해요. 내가 날씨를 느낀 다음에 방송을 하는 것과 기록이나 정보만으로 하늘이 맑고 어쩌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르거든요. 그래서 새벽 별은 이렇게 한 번씩 봐줘야 해요. 누구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김포 집에서 새벽 다섯시쯤 나선다. 밥이랑 계란, 장조림 정도만 먹고 나온다. 기상청 1층 라디오 방송실은 조용했다. 맨 끝방엔 유일하게 24시간 근무하는 한 야근자가 외투를 꺼내 들어가는 중이었고, 다른 방 주인들은 아직 출근 전인 듯했다. 유진씨는 세 번째 방의 문을 열었다. 2003년 라디오 리포터로 입사해 2004년부터 그 방에서 날씨를 전했으니, 자그마치 9년째다.
# 새벽 날씨 리포터가 꿈이었던 소녀
“날씨 리포터가 제 꿈이었어요. 저녁 9시 뉴스가 간판이듯 날씨의 세계에서 메인은 새벽이죠. 꿈을 이룬 겁니다.”
강원도 원통이 고향인 유진씨는 TV에 나오는 이익선 기상캐스터가 참 예뻐 보였다. 군인이던 아버지는 “우리 둘째가 여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창시절부터 큰 서점에 털썩 주저앉아 날씨에 관한 책을 들춰봤다. 대학도 지구과학과를 찾아갔다. 기상리포터가 되기 위해 경험을 쌓겠다고 방송 아카데미보다 먼저 찾아간 곳은 동대문 두산타워였다. 거기 안내 데스크에서 처음 마이크를 잡았다. “핸드폰 주인 찾아가세요, 손님을 찾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이크에 대고 소리를 쳤다. 신청곡도 틀고, 상가 언니들 생일 땐 축하 사연도 읽고, 노래도 불렀다. 무서운 것 없이 신나게 마이크 잡고 놀던 때였다.
“그 땐 방송실 문 앞에 가게 아르바이트생들이 딸기 우유랑 토스트를 놓고 가는 날도 있었어요.”
꿈을 이룬 지금도 유진씨가 생각하는 가장 즐거운 추억이 있던 시절이었다.
기상청 리포터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방송 사이사이 밖으로 나와 하늘을 살핀다. “새벽반이 힘든 것도 있는데 그 새벽 공기의 힘이 있어요.” 유진씨는 아무나 맡는 새벽 공기가 아니라고 말했다. 영상갈무리/ 조소영피디
# 따뜻한 날씨, 라디오만의 방식으로 읽는다
“추위가 점점 문밖으로 나가고 있는데요, 아이고. 기어나가고 있습니다. 아주 느리게 풀리는 참 지겨운 추위입니다. 목도리 꼬-옥 두르고 나가야겠습니다.”
그날 유진씨의 날씨 리포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쉽게, 와 닿게, 인간적인 온기를 담아 원고를 쓰고, 소곤소곤 읽는다. 신출내기 시절부터 익혀 확립한 그의 날씨 방송 수칙이다.
“쉽게 누구나 딱 알 수 있게. 아, 오늘 날씨 눈이 얼마나 오겠구나, 비가 얼마나 오겠구나,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이 되고, 이해가 되도록 하는 거죠.”
라디오 리포터로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한 선배가 “강수량이 5밀리미터”라고 읽지 않고, “바지 끝단이 살짝 젖을 정도로 비가 오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건 색감이나 그래픽 없이 목소리로만 날씨를 전하는 라디오만의 방식이다. 스튜디오 조명을 받고, 단정한 옷을 입고, 기압골과 자료화면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날씨를 전하는 방송용 특수 효과는 라디오에 없다. 눈보라가 아무리 몰아치는 날에도 바람소리 하나 안 들어간다. 라디오 날씨 리포터는 오로지 목소리로 그날의 상태를 모두 설명해야 한다.
“방송 기상캐스터가 환한 미소로 날씨를 전달한다고 하면 저는 날씨에 따뜻함을 담아 전달하고 싶지요. 날씨가 덥거나 추운 것에 상관없이 느낄 수 있는 사람의 냄새 말이예요.”
방송 3분 전쯤 스튜디오서 전화가 걸려온다. “예! 48초요. 알겠습니다” 1분에 맞춰 열 줄 원고를 써놨는데 순식간에 한두 줄이 더해지고, 또 사라지고 한다. 프로그램이 길거나 짧아지는 것에 따라 날씨가 그 사이를 메웠다.
# 목 풀다 3중 추돌, 더워서 방송사고
그의 목소리는 실크처럼 부드럽고, 야들야들하다. 그 새벽에 밤새 잠들어 칼칼해진 목소리를 어떻게 풀까? 왠지 ‘따뜻한 차 한잔 마시구요…’라고 할 것 같았다. 돌아온 대답이 의외다. “저요, 차 타고 올 때 노래를 세게 불러요.” 그는 거미의 <기억상실>을 주로 부른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악-’ 고음이 천정을 치고 탁 올라가는 순간 목이 ‘스윽’ 풀린다. 노래에 취하면 눈을 감는 못된 버릇도 있다. 한번은 강변북로에서 3중 추돌사고를 낸 적도 있다. “다친 사람은 없었는데 휴, 돈은 엄청나게 깨졌죠. 왠지 노래가 잘 되더라구요~ 흑흑.”
방송하는 동안 책상 아래로 초시계를 숨긴다. 혹여 ‘핏’ 하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갈까 염려해서다. “사실 안 봐도 아는데, 불안해서요.” 유진씨가 대답한다. 영상 갈무리/ 조소영 피디
날씨를 오래했는데, 날씨 탓에 웃어넘길 수 없는 방송사고도 한두번 있었다. 3년 전 여름이었다. 새벽 방송을 기다리다가 후텁지근한 방에서 책상에 앉은 채로 꾸벅 졸았다. 전화기가 세차게 울려 깨보니, 수화기 너머 조연출이 “왜 안 나와!”라고 다급하게 호통을 쳤다. 라디오에선 진행자인 손석희 성신여대 교수가 ‘유진씨’를 부르다 지쳐 직접 날씨를 읽고 있었다. “졸, 졸았어요.” 후끈한 방안에서 그는 혼자 얼어붙었다. 끼어들 틈도 없었다. 인터뷰 도중 손 교수는 “유진 리포터가…. 허허허…. 졸았답니다”라고 웃었다. “새벽부터, 많이 피곤했겠지요. 허허허….” 그 방송을 듣고 기상청의 한 간부는 “아니, 우리 방송실이 그렇게 덥단 말야?”라며 호통을 치는 대신 아이스크림 박스를 내려보냈다. “그 후에 에어컨이 들어왔어요. 어쩌면 방송사고 덕분일 수도 있는 거죠. 으힛.” 아픈 기억도 밝게 소화하는 재주를 가졌다. 유진씨가 씩 웃었다.
# 그의 부재가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든다
“어느 날 방송국에 갔는데, 엔지니어분이 ‘유진씨, 멘트 좋던데! 어젠 비가 쏟아졌지만 오늘은 햇볕이 쏟아진다고? 허허.’ 그럴 때 기분 좋죠.”
원고 좋았다는 말을 들을 때도 유진씨는 환하게 웃었다. 한번 전파를 타면, 목소리는 번개처럼 사라진다. 누군가 그 짧은 순간 말을 기억할 때 고마운 거다. 일부러 라디오 날씨를 찾아 듣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9년 동안 날씨를 전한 ‘유진’이란 평범한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은 것처럼. “완전히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방송은 아니잖아요. 소박한 반응도 좋고, 반응이 아예 없어도 상관없어요.”
그래도 그의 부재는 가끔 사람들의 일상을 파고든다. 사정이 생겨 방송을 빠진 어느 날. 라디오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유진 리포터 오늘 안 나오나요? 날씨 들으면서 옷 입는데…”
“그거요. 제가 있어서 막 좋다. 그런 것은 아니고, 제가 빠진 날, 오히려 저의 부재에 대해, 그냥 정보의 부재겠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내 자리가 필요하구나 생각이 들 때 값진 거죠.”
# 1분짜리 날씨 이야기에 담긴 건 ‘인생’
언젠가 목소리가 늙고, 더 방송을 못 하게 될 날도 올 것이다. 리포터는 공채로 뽑지만, 계약직이다.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다. 언제까지 마이크 앞에 설까? 기한을 모르는 일이다.
유진씨에게 새벽에 날씨 전하는 꿈을 이뤘으니 “지금이 호시절이냐”고 물었다. 그는 한 선배로부터 들은 날씨 이야기로 대답을 대신했다. “눈이 쏟아지다가도, 봄이 오고, 장대비가 쏟아지다가도, 어느새 가을이 오잖아요. 어떤 날씨가 될지 모르지만…. 기압골이 지나고 해가 보일지, 눈이 올지 모르지만…. 날씨는 돌고 돌잖아요.”
날씨가 돌고 도는 것처럼 인생도 돌고 도는 것이다. 돌고 돌다 보면 좋은 날도 흐린 날도 있다. 1분짜리 날씨 이야기 안에 인생이 들어 있었다.
영상·글 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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