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방황하는 칼날
세월호가 침몰한 날 집에 들어가니 아내가 티브이 뉴스를 보며 울고 있었다. 다섯살 아이가 부모를 잃고 혼자 살아남은 모습이 방송 카메라에 잡혀 있었다. 거꾸로 수학여행 보낸 아이를 잃고 울부짖는 부모들의 모습도 보였다. 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사고 관련 뉴스에 달린 댓글을 보지 말았어야 했다. 속에서 뭐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타인의 불행에 일부러 위악을 부리는 행패들이 마구 자행되고 있었다.
이 사태를 보며 자연스레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한 편을 떠올렸다. 이정호가 연출하고 정재영, 이성민이 주연을 맡은 <방황하는 칼날>이다. 이 영화에서 정재영은 고등학생 아이들에게 성폭행당해 죽은 딸의 복수에 나서는 중년 남자 이상현으로 나온다. 나는 이 영화에서 정재영의 표정이 좋았다. 특히 후반부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정재영이 보여준 표정은 올해 나온 한국 영화들 가운데 가장 좋은 연기였다고 생각한다. 딸을 죽인 아이와 대로변에서 마주친 이상현은 형사들이 포위해 엽총을 버리라고 종용하는 가운데 기어이 총을 들고 아이에게 다가선다. 그는 잘못했다고 빌며 자수하겠다는 아이가 목숨을 애걸하는 가운데 왜 그랬느냐고 거세게 묻는다. 그는 아이의 악행의 이유를 알고 싶었고 심판하려 한다.
더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이 장면에서 이상현을 연기하는 정재영이 보여준 표정은 딸에게 잘해주지 못한 죄책감과 자기 가족을 죽인 어린 타인에게 느끼는 당혹감을 드러낸다. 죽이고 싶지만 죽일 수 없는 입장, 아버지로서의 입장과 어른으로서의 입장이 교차하면서 그는 결국 자신을 벌하는 방법을 택한다. 자신에 대한 반성이 전제되지 않는 직선적이고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배우 정재영의 얼굴에는 이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절망이 새겨져 있다. 이성민과 서준영이 연기하는 형사들은 그런 이상현의 쓰디쓴 고통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천진한 악마처럼 보이는 살인범 아이의 모습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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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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