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산다
얼마 전 한국영화학회 심포지엄에 토론자로 참가했다. 학회 주제는 천만관객 영화에 관한 것이었다.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의 정서구조를 분석하거나 빛의 속도로 천만관객을 동원하는 것이 가능한 현재의 유통배급구조를 논하는 자리였다. 학회에 참석하러 가는 차 안에서 나는 문자를 받았다. 박정범 감독의 <산다>가 개봉한 후 이틀 동안 기록한 관객 수치였다. 처음엔 40여개 관에서 개봉한 이 영화의 극장 당 평균 관객 숫자인 줄 알았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삼인삼색 장편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화제작이었던 이 영화는 해외 20여개 영화제에서 초청받았고 남우주연상을 포함해 수상도 여러 번 했다. 2시간45분의 상영시간에 발목 잡힐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일줄이야 몰랐다. 그러니 천만 관객현상을 논하는 학회 자리가 내겐 심드렁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브라질에서 전체 극장에서 한 영화가 차지하는 상영 비율을 30% 이내로 제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광역배급의 기원지인 미국에서도 그 정도 비율이다. 천만 관객의 정서구조를 아무리 분석해봐야 유통배급구조의 문제를 비껴가는 한 다 허깨비다. 사방에서 곧잘 벤처, 벤처 하지만 영화계야말로 벤처 정신이 필요한 곳이다. 젊은 감독이나 제작자들의 가난한 영화들이 틀어질 수 있는 극장은 고작 전국 40여 개에 불과하고 그것도 수백편의 영화가 퐁당 퐁당 상영으로 일 년 내내 채워진다. 게토화된 이곳이 시장으로 성립할 수 있는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영화나 재미있게 잘 만들라고 하는 비아냥도 있음을 잘 안다. 내가 아는 상식에선 예술은 지루함에서 시작한다는 명제도 있다. 지루하고, 불편하고, 답을 주지 않고, 질문만 던지고,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진한 여운만 남기는 영화들 말이다. 영화역사 교과서의 상당수는 이런 영화들을 기리며 채워진다. 오락의 숙명에 순응하는 척 하면서도 자기 기세를 놓치지 않는 영화들이었다. 이런 영화들이 또 때로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는 것이 영화계의 묘미다. 칸 영화제가 칸 영화제일 수 있는 것은 거기 상영된 영화들이 파리에서 환영받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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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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