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5.17 19:21
수정 : 2016.05.17 19:21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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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타 보이즈'. 씨지브이아트하우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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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국제영화제가 중반을 넘어섰던 5월5일 저녁 6시 전주 고사동 영화의 거리 야외상영장 옆 지프 스테이지 텐트에선 시상식이 열렸다. 시상식은 훈훈하게 시작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인 김승수 전주 시장이 무대에 올라 축사를 했다. 똑같은 주제의 발언인데도 매번 다른 수식을 쓰는 달변가로서 그는 다시 한 번 영화 표현의 자유를 강조했다. “영화가 중요한 게 아니라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 사회에서 발언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영화가 표현해주는 것입니다. 영화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전주 시민들에게도 영화 표현의 자유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봄날의 꿈처럼 잠시 치러지고 사라지는 영화제지만 올해만큼 표현의 자유를 위한 해방구 같은 느낌을 준 적은 없었다. 영화제에서 상영된다고 했을 때 과연 틀 수 있을까 영화계와 언론이 기우했던 최승호 감독의 국정원 간첩조작사건에 관한 다큐멘터리 <자백>은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두 개의 상을 받았다.
그러나 훈훈한 분위기 덕분에 스태프들의 긴장이 풀어졌는지 시상식이 중반을 넘어서자 기술적으로 사소한 실수들이 잇달았다. 수석 프로그래머를 맡고 있는 필자는 뒤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서너 차례 실수가 있고서야 수상자들의 기쁨에 찬 연설이 주는 울림 덕분에 장내는 비로소 안정된 분위기를 찾았다. 다소 멍한 기분으로 시상식장 입구 근처에 서 있는데 올해 한국경쟁부문 심사위원이자 <방자전> <인간중독>을 연출했던 김대우 감독이 슬그머니 내 옆에 와 있었다. 그는 경호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담배를 피워물며 내게 느물느물 말을 걸었다. “허무하신가?” 정곡을 찔린 심정이었다. “진짜 허무한데.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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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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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계속 맛있게 피우며 김대우 감독이 말을 이었다. “올해 대상 받은 한국 영화 말이야. <델타 보이즈>…” 혹시 그가 불만을 말하려나 싶어 나는 제작진을 대신해 변명하듯 말했다. “괜찮지 않아? 제작비 250만원으로 찍었다는데. 감독과 배우들이 몇 년간 친하게 지내면서 의기투합해 만든 거야.” 김대우 감독이 감상적인 표정으로 되받았다. “난 울컥했어.” “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고.” “감독님이 어때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내 옛날 생각이 나더라구.” “무슨 소리야?” “개울가에 있다가 강을 지나서 바다에 와 있는 느낌. 영화 한 편 만드는 데 100억이 드는 산업에서 영화 외적인 문제들을 결정하느라 시간을 거의 다 보내는데. <델타 보이즈>를 보니까 맞아, 나도 언젠가 저렇게 개울가에서 영화만 생각하며 기쁘게 찍었던 시절이 있었지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야.” 갑자기 내 마음에 훈풍이 불었다. “그 영화 만든 친구들 이따가 껴안아주고 싶어. 나한테 큰 기운을 줬어. 나도 더 열심히 해야지.” 말을 마치고 김대우 감독은 담배를 끄며 나를 향해 씩 웃었다. “그러니 당신은 너무 허무해하지 않아도 돼.” 그는 휘파람을 부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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