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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라이 충칭모델 탈법적 진행…구멍 난 상황
왕양, 우칸사건 진보적 해결…광둥모델 배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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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이후 중국 사회의 불만은 계속 고조돼 왔지만, 이번에는 농민, 농민공, 지식인들 모두 매우 분명하게 문제를 인식하고 공평과 공정,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시위 당시 농민들이 거의 동조하지 않던 것과 비교하면, 현재는 중국 각 지역, 각 계층에서 변화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20여년 동안 중국의 도시화 과정에서 농민의 토지를 빼앗는 일이 점점 늘었고, 전국적인 문제가 됐다. 토지는 농민의 생명이다. 농민은 토지를 빼았겨도 도시민의 대우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토지는 생사존망의 문제다. 따라서 최근 최대 규모의 집단시위는 모두 농촌에서 일어났다. 인터넷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인터넷이 생겨 이곳저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쉽게 전파돼 서로를 자극한다. 지방 관리들도 이를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중국 정부가 1989년 천안문 시위를 진압했던 방식으로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광범위한 항의를 진압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원인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중국 정부는 민간의 항의를 위협하고 사람들을 체포하고 소규모로 폭력을 쓰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현재 지방 정부가 처음에는 일부 폭력을 동원하지만 나중에는 보상금 등을 주고 있다.따라서 수천명이 한꺼번에 일어나면 일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원인들이 합해져 최근 시위가 점점 늘고 규모도 커지고 있다.” -중국은 변화의 전환점에 도달했는가? “중국은 너무 광대하고 지역마다 발전 상황도 달라, 일부 지방은 먼저 전환점에 도달하고, 일부 지역에선 늦게 도달한다. 따라서 중국이란 거대한 국가에선 매년 전환점에 도달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89년 이후 일부 분야에서 중국 정부는 좋은 성과를 내왔다. 예를 들면 경제발전, 도시발전, 농촌의 사회보장제도, 빈곤층 지원, 농업세 면제 등은 성과다. 하지만, 일부 진보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들이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고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고 있다. 민중은 너무 오래 기다렸는데 해결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많은 이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됐다. 예를 들면 부정부패, 지방관리들의 권력 남용, 환경오염 등이 사회 공평과 연결돼 있다. 농민들은 악취나는 물과 오염된 공기 속에서 생활하지만 관리들은 그런 곳에 살지 않는다. 도시화로 인구가 밀집되면서 중국의 보통 민중, 농민공, 농촌과 소도시의 주민, 대도시의 보통 민중들도 고관들의 생활을 다 잘 알게 되었다. 불공평에 대한 감각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시진핑 시대가 다가오면서 중국의 민중부터 지식인까지 중국이 변화하지 않으면 더이상 버틸 수 없다는 변화의 요구를 절실하게 제기하고 있다. 당신은 시진핑 체제가 중국모델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 올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시진핑과 태자당은 실제로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태자당을 하나로 묶는 것은 상황을 너무 일반화하는 것이다. 모두 고관 가정 출신이고 동문이나 친구 관계로 얽혀 있지만, 그 안의 차이는 크다. 일부 태자당은 사회의 불공평에 불만을 가지고 있고, 민주, 법제, 자유, 사회평등을 갈망한다. 시진핑의 부친(시중쉰 전 부총리)은 다른 사람을 박해하지 않고 그 자신이 박해를 받았다. 시진핑도 부친의 정치적 이유 때문에 오랫동안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고, 고관 자제로서의 이점을 누리지 않았다. 시진핑은 빈곤한 산시지역에 가서 중국의 가장 밑바닥 사회를 이해했고, 중국 인민들이 얼마나 불쌍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그들의 고통을 알게 됐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덩샤오핑도 문화대혁명 시기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장시성의 빈곤한 지역으로 보내지지 않았다면 중국 백성들의 생활이 어떤지 잊었을 것이다. 시진핑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중국 백성들이 얼마나 가련한지를 알게 됐다. 아울러 시진핑의 20년간의 지방간부 경력을 보면 두가지 특징이 있다. 그가 오래 일했던 푸젠과 저장성의 많은 사람들은 시진핑이 민영기업을 중시했다고 말한다. 푸젠과 저장은 광둥과 함께 중국 민영기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시진핑의 부친은 광둥에서 서기를 했다. 시진핑과 그의 부친은 중국에서 민영기업이 가장 발달한 곳에서 당서기를 했다. 시진핑이 저장, 푸젠성과 상하이시 서기로 일하면서 민영경제에 타격을 입힌 증거가 없다는 것은 중국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가 저장과 푸젠성에서 타인을 정치적으로 박해한 적이 없다는 것도 중요하다.” -중국의 개혁과 관련해 ‘충칭모델’ ‘광둥모델’ ‘신민주주의론’ 등이 주목받고 있다. 왕리쥔 사건을 계기로 ‘충칭모델’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긴 했지만,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중국내에서 신좌파의 영향력이 매우 커졌고, 충칭모델을 중국을 구원할 대안으로 기대하는 이들도 많았다. 충칭모델을 어떻게 평가하나? “충칭의 ‘범죄와의 전쟁’은 중국의 법률을 완전히 무시한 채 진행됐다. 문화대혁명식 방법으로, 먼저 사람들을 잡아들인 뒤 증거를 찾아내고, 증거를 찾지 못해도 사람을 계속 가둬두는 식으로 진행됐다. 왕리쥔 사건이 우연한 계기로 일어났을 수는 있지만 근본적 원인을 보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왕리쥔 사건은 이미 (중국 지도부의) 중상층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최상층까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지만, 현재로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충칭모델은 왕리쥔 사건 이후 완전히 붕괴됐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배에 구멍이 나 물이 세는 상황이 됐다.” -광둥성 우칸 농민들의 봉기와 이들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왕양 광둥성 당서기의 ‘광둥모델’이 주목받았다. 우칸 농민들의 각성, 그리고 이를 처리하는 광둥모델이 중국 사회의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하는가? “적어도 왕양은 중국모델이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는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고 있다. 그는 광둥에 부임한 뒤 광둥의 경제모델을 전환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2008년 금융위기로 전세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조건이 악화됐다. 나는 광둥에 가서 왕양에게 중국모델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5차례 이상 강의를 한 적이 있고 그의 생각도 들었다. 광둥성은 이미 오래 전에 인구 1억이 넘었는데, 외지 유입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광둥은 오염,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개발하는 문제, 농민공 문제 등 중국모델의 문제가 가장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곳이다. 왕양이 우칸 사건을 처리한 방식은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도 대규모로 무장경찰을 동원해 사람들을 잡아들이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칸의 해법이 중국의 여러지방 정부에 긍정적 의미를 주기를 희망한다. 중국 지방의 위기와 충돌을 합법적으로, 민중이 참여하는 방법으로 해결해야지, 민중을 적으로 삼으면 안된다. 민주는 한걸음 한걸음씩 온다, 관리들이 우칸에서 긍정적 교훈을 얻고, 최고위층도 우칸 해법에서 경험을 얻어 이를 공산당 중앙당교(공산당 간부 교육 기관)의 교재로 삼아야 한다.” -장무성이 제기한 신민주주의론은 ‘좌우초월’을 내세워 일부 개혁파들의 지지도 받고 있고, 류위안 인민해방군 상장 등 태자당내 유력자들의 지지도 받고 있다. 이런 정치 개혁 주장의 의미는? “1940년대의 신민주주의에는 몇가지 중요한 역사적 조건이 있었다. 이미 65년이 지나 조건이 달라졌다. 예를 들면 당시 중국은 완전한 농민사회였고, 90%가 농민이었지만, 현재 중국은 이미 글로벌 경제가 들어온 상황이다. 신민주주의 전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65년 전의 내용으로 오늘 중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고, 내일의 틀로 삼을 수는 더더욱 없다. 하지만 신민주주의에 좋은 내용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 공산당은 정권을 잡기 위해 민주당과 연합정부를 수립했다. 이런 구상은 좋다. 문제는 현재 공산당이 민주당과 함께 민주정부를 세울 수 있는가? 현재 중국의 민주당파는 원래 의미의 민주당이 아니며, 주요 지도자는 모두 공산당에 속해 있다. 민주당파는 1949년 이후 공산당의 돈을 받아왔고, 민주당파의 간부들은 공산당이 파견한 이들이다. 공산당과 민주당파가 분리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신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는가? 그들이 이 부분을 개방할 수 있다면 중국은 신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되는 것이다. (민주당이) 민간 후원금을 받고 자체 당 재정을 가질 수 있고, 자기 당의 정책 건의를 할 수 있다면 이는 오랫동안 요구해온 일 아닌가.” -당신은 1978년부터 1989년 천안문 시위 유혈진압 이전까지 중국 개혁개방의 초기단계를 중시한다. 당시를 다양한 개혁 실험이 진행되고, 민주, 평등의 요구가 분출했고, 다원적 개방성이 있었던 시대로 묘사하고 있다. 후야오방과 자오쯔양, 완리, 시중쉰의 ‘인민에게 빚을 갚으려 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당신은 1980년대의 경험이 앞으로 중국의 개혁에서 중요하게 참고해야 할 모델이라고 보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 시기를 그리워한다. 당시 중국 사회는 막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에서 벗어났고, 공산당 지도자와 간부, 지식인, 도시와 농촌 주민들 절대 다수가 기본적인 합의(컨센서스)를 가지고 있었다. 즉 마오쩌둥식으로는 안되고 반드시 새로운 길로 걸어나가야 한다는 합의가 있었고, 이 때문에 개방이 이뤄질 수 있었다. 이 합의는 당시 중국의 매우 귀중한 자산이었다. 1982~1984년 중국 사회는 매우 역동적이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은 문제를 토론하고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 미친 듯 번역이 이뤄져 외부의 사상과 정책, 제도를 소개했다. 최근 몇년 동안 일부 사람들은 마오쩌둥의 방법을 가져와 오늘 중국이 부딪친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한다. 1989년 6.4 사건(천안문 민주화시위 유혈진압) 이후 문혁과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통제됐고, 많은 이들은 문혁을 비판하는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됐다. 따라서 시진핑 시대의 지도자들이 1980년대 민간과 공산당, 민간과 정부간의 합의들을 충분히 고려하고, 이런 중요한 유산을 계승해 발전시키길 희망한다.” -당신은 민중의 정치참여 개방, 독립적 언론, 사법 독립, 관료 재산 공개, 집권당 내부의 선거제도 확대, 인민대표대회의 견제 기능 강화, 경제영역에서 민간기업 역할 강화 등을 중국모델이 가야할 길로 제시했다. 그렇다면 공산당 일당 집권 체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공산당 일당 집권체제가 유지되더라도 지금보다는 훨씬 개선된 형태로 갈 수 있다. 베트남도 일당 체제이지만 훨씬 개방돼 있고, 중국도 1980년대에 일당체제를 유지하면서도 많은 진전을 이뤘다. 일당체제가 최선의 체제는 아니고 다당제를 희망하지만, 일단의 시기 동안 중국이 거기까지 나아갈 수 없거나 위험이 너무 크다면 일당체제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동안 일당 체제 하에서 다양한 파벌이 존재하며서, 일본처럼 파벌이 공개적으로 당의 헌장이 보장하는 안에서 공개적으로 공평하게 경쟁하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중국 공산당처럼 제약이 많고 항상 초조해하고 긴장하는 정당이 어디 있는가? 매번 중국에 돌아가 강의를 할 때마다 관리들에게 당신들이 적지 않게 좋은 일을 했는데 왜 국가와 인민에게 자신감을 갖지 못하느냐고 말한다. 중국 정부는 점점 더 무거운 부담을 느끼고 있다. 오랫 동안 많은 문제들이 감춰져 있었지만,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시기가 오고 있다. 폭발하려는 문제들을 줄일 수 있는 더 나은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1989년과 마찬가지로 문제가 생기면 우선 덮고보자는 식이다. 중국에 인터넷이 생긴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전에 완전히 은폐할 수 있었던 내용도 이제는 은폐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중국이 진보하려면 이런 점이 매우 필요하다. ” -서구식 자본주의 위기 이후 ‘중국모델’ 또는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다. 2008년 이후 ‘워싱턴 컨센서스’의 대안으로서 베이징 컨센서스가 유행했다. 하지만, 당신은 ‘중국모델’의 한계를 지적한다. 중국이 개혁을 통해 서구식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중국정부 고위층 스스로도 ‘중국모델’이 세계에 확산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다. 원자바오는 중국모델이란 말을 꺼내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했다. 후진타오도 중국모델이란 말을 한 적이 없다. 예를 들면 농민의 토지를 값싸게 가져다가 20배, 100배의 가격에 부동산 개발회사에 파는 것이 중국모델의 기본이다. 세계 어느나라도 이런 것은 원치 않는다. 중국 지도자들도 이런 모델의 부담이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국제무대에서 ‘베이징 컨센서스’ ‘중국모델’을 확대하려는 사람들은 중국모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1989년 이후 중국은 3단계를 거쳤다. 1989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가 1단계, 1990년대 중반부터 2004년까지 2단계, 이후 2004년 이후부터 현재까지다. 제1단계에선 생존에 초점이 맞춰졌다. 2단계에는 필사적으로 발전하려는 시기였다. 그 두 시기의 발전이 매우 큰 불균형 문제를 일으켰고, 후진타오, 원자바오는 취임 뒤 이를 해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는 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일부에선 퇴보하기도 했다. 특히 최근 몇년 동안 소위 ‘국진민퇴’(국유기업의 약진과 민영기업의 후퇴)가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시진핑이 올해 말 취임 뒤 빠르게 경제 재조정(rebalancing)을 해낸다면 비교적 훌륭한 중국 발전 모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도록 하는 것, 둘째는 재정 투명화다. 중국 정부는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만, 그토록 많은 세금을 거둬 어떻게 분배하는지 누가 아는가? 정부 재정이 투명하지 않으면 어떤 집단이 얼마나 돈을 많이 가져갔는지 알 수 없고, 중요한 분야에 돈이 얼마나 부족한지도 알 수 없다. 세번째로 인민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하고, 창조력을 발휘하게 해야 한다. 중국 인터넷을 보면 사람들은 매우 총명하지만 관영언론에서는 창조력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 제제가 적은 곳에서 중국인의 창조력이 발휘된다.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않으면 첨단 과학기술은 나올 수 없고 짝퉁만 나오게 된다. 중국인들에게 자유를 주면 그들은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다. 시진핑 시대에 이런 재조정이 이뤄지길 희망한다. 반드시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 마오쩌둥의 방법으로 갈 수는 없다.” 딩쉐량 홍콩과학기술대학 교수는 중국 안후이성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중국사회과학원 연구원을 거쳐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989년 천안문 시위 유혈진압 이후 중국이 정권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면서, 레닌주의 정치체제, 철저한 사회통제, 국가가 통제하는 시장경제가 결합된 중국모델을 만들어냈지만 이는 지속불가능한 상황에 와 있다고 본다. 부가 일부에 집중되는 중국의 특권자본주의를 대중자본주의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의 저서 <중국모델:찬성과 반대>는 대만과 홍콩, 중국 대륙에서 모두 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국에선 최근 <중국모델의 혁신: 대중시장경제를 향하여> (성균관대 출판부)로 번역·출판됐다. 홍콩/글·사진 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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