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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 영화제작자 이태원(오른쪽) 태흥영화사 대표와 이지승 영화 프로듀서 겸 감독이 지난달 23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태흥영화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감독은 이 대표의 3남1녀 중 막내이다. 막내아들과 사진을 찍으며 이 대표는 “막내가 내 얼굴과 가장 많이 닮았다”며 웃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인터뷰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아들은 태흥영화사 영화 ‘베스트 3’으로 <기쁜 우리 젊은 날> <개그맨> <장군의 아들>을, 이태원 대표는 <서편제> <장군의 아들> <뽕>을 꼽았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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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짝]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이지승 감독
서편제 등 36편 제작 ‘흥행 승부사’그 아들은 저예산 영화 새실험 나서 “요즘 밥값만 해도 얼마인데….” 타박처럼 들려도, 아버지는 ‘이놈, 거 참’이란 속뜻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는 1990년대 초반, 정부가 불온소설이라며 영화화를 막아 제작이 3년여 표류했던 <태백산맥>의 원작료로 1억원이나 쓰고, 남들은 “돈 벌지 못할 텐데 제정신이냐”고 했던 판소리 영화 <서편제>에 6억원 제작비를 들인 ‘통 큰 손’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5000만원 제작비로 장편영화 연출 데뷔작 <공정사회>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하다가, “나 원, 어처구니가 없어서”라며 ‘허!’ 하고 그만 웃음을 지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공정사회>는 경찰의 부실수사를 믿지 못한 엄마(장영남)가 어린 딸의 성폭행범을 직접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최근 코스타리카 필름 페스티벌 최우수작품상을 타는 등 국제영화제들의 초청을 받고 있다. “쉽지 않은 소재인데, 생각보다 잘 만들었더라고요. 영화가 10분만 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예산이 적어 상영시간이 74분인 것이 아버지는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영화계 ‘큰손’ 아버지 이태원
5천만원으로 ‘공정사회’ 만든 아들
쉽잖은 소재로 생각보다 잘 연출…
난 예술가가 아니고 영화 장사꾼
내 시대는 지나…제작 더는 안해 아들은 일흔여섯살인 아버지와 영화를 놓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제 영화가 시간을 넘나드는 구조이고, (화면이 전환되는) 컷 수도 많고 속도감이 있는데, 아버지가 요즘 영화들도 어려워하지 않고 보실 수 있다는 것이 놀랍죠.” 그를 어떤 평가의 시각으로 바라보든, ‘흥행 승부사’였던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를 빼고 1980~200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영화사를 거론하는 건 어렵다. “그런 아버지 그늘 밑에서 부담과 비애도 느꼈다”는 아들은 1988년에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시점으로 기억을 돌렸다. “신입생 소개 시간에 ‘아버지는 뭐 하시냐’고 물어서, 누구의 아들이라고 말하기 겸연쩍어 ‘작은 영화사를 한다’고 했어요. 그게 태흥영화사라는 걸 알고 다들 놀랐죠. 당시 태흥은 지금의 씨제이(CJ)처럼 영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사였으니까요. 학과의 분위기는 ‘넌 대충 해도 감독 되겠다’는 사람들과, ‘전형적인 상업영화를 만드는 영화사 아들’이라며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로 갈렸죠.” 건설회사 겸 미군 군납업체를 하며 돈을 벌어 1983년 태흥영화사를 차려 36편을 만든 이 대표는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어우동> <뽕> 등 성인 관객들이 좋아할 영화를 제작했다. 이후 첫사랑 영화의 교본 같은 <기쁜 우리 젊은 날>, 이규형 감독을 발굴한 <청춘 스케치>, 신인을 대거 발탁한 <장군의 아들> 등 젊은 관객층을 아우른 흥행작도 배출했다. 이 대표는 “<장군의 아들> 오디션을 보러 온 800여명 중 김두한 역(박상민)을 지망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지금의 신현준(당시 하야시 역)이었다. 서울의 한 호텔 ‘설악룸’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실제 설악산으로 갔던 지망생도 있었다. 그 열정을 높이 사 캐스팅했다”고 떠올렸다. 태흥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경마장 가는 길> <서편제> <화엄경> <태백산맥> <춘향뎐> <취화선> 등 도전적인 소재도 마다하지 않았다. 3남1녀의 막내아들인 이지승(43) 프로듀서 겸 감독은 “그런 아버직 덕에 영화가 자연스럽게 내 몸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우리 집에 이장호·배창호·이두용 감독님, 배우 안성기 선배님, (강)수연이 누나가 찾아와 집이 늘 북적북적했죠. 아버지가 극장도 운영해서 어려서부터 장르와 연령등급에 관계없이 영화도 많이 봤고요.” 아들이 영화를 전공한다고 하자 아버지는 반대했다. “배우 뒤꽁무니도 쫓아다녀야 하고, 힘든 일”이란 걸 알아서다. “거기 합격해도 (아버지 덕에) 학교 뒷문으로 들어왔다고 오해받을 것”이라 걱정했지만, 이 대표는 “아들이 과 차석으로 합격해 뒷문으로 들어온 놈은 아니란 걸 스스로 보여줬다”며 기특해했다. 미국 뉴욕대에서 영화이론을 더 공부한 아들은 프로듀서로서 영화현장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이를 두고 “이론 전공으로 교단에 선다던 아들이 결국 본색을 드러냈다”며 웃었다. 아버지가 80~90년대 한국 영화 도약기를 이끌었다면, 이제 아들은 ‘1년 1억명 관객 시대’를 연 한국 영화의 재도약기를 끌어갈 영화인으로 컸다. 1000만 관객을 넘긴 <해운대>와 <색즉시공> <통증> 등의 프로듀서를 했던 아들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총괄 책임교수로 차세대 영화인도 키운다. 지난해 독립영화 화제작 <파수꾼>의 윤성현, 700만명 돌파를 앞둔 <늑대소년>의 조성희 등 유망한 젊은 감독들이 영화아카데미에서 그에게 배웠다. ‘프로듀서 겸 연출자’ 아들 이지승
아버지 명성 먹칠할까 늘 긴장…
힘든 영화 전공한다고 반대하셨죠
극장개봉 저예산 영화 계속 도전
창작자들 갈수록 위축돼 아쉬워 아시아와 미국의 국제영화제에 <공정사회> 출품을 온라인으로 직접 신청해 초청장을 받아내고 있는 아들은 ‘저예산 영화 제작·연출-영화제 출품-극장개봉’의 3단계 과정을 시도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도전하는 모습과, 영화의 다양성을 위해 저예산 영화도 국제영화제를 거쳐 개봉에 이르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공정사회>는 내년 3월 개봉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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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서편제>, <장군의 아들>, <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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