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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료·관리비 80여만원이 체납돼 20여년 동안 살아온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쫓겨날 처지에 몰린 한지영(가명·오른쪽)씨가 지역 사회복지사와 상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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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 소통이 나눔이다
⑫ 임대아파트 퇴거 위기 지영씨네
술에 빠진 남편·암투병 시아버지혼자 일해 월 96만원 벌어 ‘풀칠’
임대료·관리비 6개월째 밀려
“우등생 딸 국제중 안갔으면…” 신혼 살림은 서울 변두리의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시작됐다. 이후 20여년 동안 한지영(가명·42)씨는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18평(59㎡)짜리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했다. 남편(48)은 번듯한 돈벌이를 한 적이 없다. 술로 날을 지새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사흘에 하루 꼴이었다. 장사를 한 적도 있으나 생활비라며 한씨에게 쥐어주는 돈은 적었고 그나마도 불규칙했다. 결혼과 동시에 살림도, 돈벌이도 모두 한씨 몫이 됐다. 식당 일부터 노점상까지, 배운 것이 많지 않은 처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씨는 해왔다. 그런 사정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남편이 사고만 안 치면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14일 만난 한씨는 회고했다. 한씨를 제외하면, 가족 가운데 돈을 벌어올 이는 시아버지(74)뿐이었다. 만성신부전증을 앓는 시아버지는 건물 청소를 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한달 꼬박 일해 번 200여만원이 초등학생인 두 딸을 비롯한 다섯 식구의 한달 생활비였다. 빠듯해도 알뜰하게 살았지만, 살림이 망가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난해 7월, 시아버지가 식도암 3기 판정을 받았다. “한번 막다른 길에 몰리기 시작하니까 계속 몰리더라”고 한씨는 말했다. 병에 몰린 시아버지는 일을 그만뒀다. 시아버지 간병 때문에 한씨도 일을 할 수 없었다. 그 여름, 다섯 식구를 위한 돈벌이가 완전히 끊겼다. 지역 복지관의 도움으로 시아버지의 병원비를 우선 막았다. 먹고 입는 돈은 이웃에게 빚을 냈다. 시아버지가 집중적인 항암치료를 일단 마치자, 한씨는 다시 일자리를 구했다. 생활용품 판매점에서 주 6일 일해 월 96만원을 벌었다. 그 돈으로 다섯 식구가 사는 것은 그야말로 “목구멍에 풀칠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여기저기서 빌린 돈을 갚으라는 독촉도 시작됐다. 목구멍에 풀칠하기에도 아쉬운 월급을 헐어 푼푼이 갚아도 빚은 400만원 가까이 남아 있다. 그 사이 임대아파트 임대료와 관리비도 차곡차곡 쌓여 빚이 됐다. 6개월치 관리비 41만원과 임대료 42만원이 체납되자 관리사무소에서 서류를 보냈다. ‘체납비를 내지 않으면 재계약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증명이었다. 이달 20일까지 82만원의 임대료·관리비를 내지 못하면, 한씨 가족은 절차에 따라 강제퇴거 당할 것이다. 실제로 쫓겨나는 이웃을 종종 봤다. 아파트 앞에 내쳐진 세간살이를 넋놓고 바라보던 그들을 한씨는 기억한다. “이젠 제가 그들처럼 나앉게 됐으니 처지가 우습다”고 한씨는 말했다. 체납비를 독촉하고 퇴거를 압박하는 서류를 받은 뒤부터 한씨는 쉽사리 잠들지 못한다. 재계약 날짜는 성큼 다가왔는데 돈 구할 곳은 보이지 않는다. 병든 시아버지와 직업이 없는 남편, 그리고 두 딸 은서(가명·12)와 현서(가명·10)를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하나 생각하면 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큰 딸 은서는 공부 욕심이 많다. 욕심만큼 총명하다. 학원 한번 보내본 적 없지만 1등을 놓친 일이 없다. “엄마,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 다니느라 좀 바빠봤으면 좋겠어.” 투정 없는 은서가 딱 한번 지나치듯 한 말이 한씨의 마음엔 돌처럼 내려 앉았다. 엄마는 영리한 딸에게 “넓은 세상 누비는 통역사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후 은서는 통역사가 되겠다는 꿈을 굳혔다. 그 첫 걸음으로 국제중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 은서의 담임 교사는 한씨에게 “일반 영어학원보다 수준높은 어학원에 보내 준비를 하셔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씨의 형편을 속속들이 알지 못해 한 말이었다. 많은 엄마들이 바라는 ‘우등생’ 딸을 두고도 한씨는 속이 타들어간다.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국제중에 입학한다 해도 돈 들어갈 일이 많다는 것을 한씨는 알고 있다. “국제중을 보낼지 말지 선택할 수 있어야 고민도 할 텐데…. 아이가 차라리 입시에서 떨어지길 바라는 엄마 가슴은 미어진다”고 한씨는 말했다. 누군가에겐 푼돈에 불과할 100만원이 없어 거리로 나앉게 생긴 한씨에겐 재능있는 딸의 미래를 틔워줄 여력이 없다. 강서구 가양동 가양5종합사회복지관의 박재훈 사회복지사는 “한씨 가정은 전형적인 빈곤 가정이지만, 부양의무자인 남편이 있어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시아버지에게 들어갈 병원비도 예측하기 어렵지만, 당장 아파트 관리비가 밀려 재계약이 안 되면 거리로 나가야 하는 상황인 만큼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끝> 글·사진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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