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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9.21 20:16 수정 : 2012.09.22 17:58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아버지 방장수(장용·왼쪽)와 아들 방귀남(유준상). <한국방송> 제공

허미경의 TV남녀

지난해 최고의 드라마로, 권력과 문자의 관계를 천착한 사극 <뿌리깊은 나무>를 꼽는 데 토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그렇다면, 올 최고의 드라마는? 좀 이른 감이 있지만, <넝쿨째 굴러온 당신>(넝쿨당)을 꼽고 싶다. 한국이라는 계급사회에서 제1권력은 대자본 재벌임을 다시금 환기시킨 <추적자>가 내 머릿속에서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합하고 있지만, 그래도 <넝쿨당>이다. 둘 다, 이 사회 팍팍한 현실에서 꺼낸 소재로 이야기를 밀어붙인 리얼리즘 드라마라 할 수 있겠는데, <추적자>는 시청률이 20% 안팎,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방영됐다. 최근 종영한 <넝쿨당>은 대중적 영향력이 크고 접촉면이 넓은 드라마였다. 여섯 달 남짓 동안, 초반엔 30%대, 중반부터는 45%를 넘나드는 인기를 누렸다. 한국인의 이중성을 천연덕스럽게 꼬집는 작가의 이야기 솜씨에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도 며느리와 시가의 관계를 탐색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몇 번 불편했던 적이 있다. 그 한 번은 주인공 차윤희(김남주)의 입에서 이런 대사가 나올 때였다.

“여자의 적은 여자야.”

드라마제작사에서 일하는 차윤희가 임신 탓에 직장에서 사직 압력을 받는 와중에, 여자 동료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상황 설정 속에서 나오는 대사다. 그런데 이 회사 직원은 거의 다 여자였다.

또 한 번은 <넝쿨당>의 아버지(장용)와 아들(유준상)이 각기 자신의 아내인 고부지간 엄청애(윤여정)와 차윤희의 신경전을 지켜보다 하는 대사다. “여자들은 왜 저러는 걸까.” 듣기에 따라 이 대사 역시 여성의 눈으로 곱씹어 보면 어폐가 있다. 이 불편함 탓에 포털 뉴스검색 창에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쳐보다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여자의 적’까지만 쳐도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문장이 검색어 자동완성 기능을 통해 완성된다. 그만큼 많은 누리꾼이 그 문장을 검색했다는 뜻이다. 반면 ‘남자의 적’을 치면 그 기능은 작동하지 않는다. 뉴스검색 창을 20쪽까지 뒤졌더니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쓴 기사가 26건이었다. ‘남자의 적은 남자’라는 말을 쓴 기사는 한 건도 찾지 못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남자는 그렇지 않은데 유독 여자들은 여자끼리 경쟁한다고 여기는 걸까.

여자의 적은 여자다? 맞다. 우리는 이성애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그리 보면 남자의 적 역시 남자다. 실제로는 일터와 가정에서 여자의 적은 때론 남자, 때론 여자다. 남자의 적 역시 그렇다. 그런데도 드라마나 현실에서 남자들 간의 경쟁은 그럴싸한 맞대결로 인식되는 데 반해, 여자들 간의 경쟁에는 ‘암투’라거나 ‘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말로 규정한다. 주류 남성의 시각으로 빚어낸 담론이다. 아직 이 사회에서 여성 집단은 약자인 탓이다. 가령 일제가 조선 합병 뒤 조선인은 분열이 본성이라면서 조선인의 적은 조선인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이치다. 주류의 행동거지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보는 반면, 소수자나 약자의 행동거지는 그 집단만의 특성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넝쿨당>에서 여자 대 여자가 갈등하는 것은 그 현장이 ‘시집’이기 때문이다. 시집은 여성 노동의 공간으로만 간주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 집이 ‘처가’라면, 가사노동도 남녀가 분담하는 곳이라면, 사위와 장인의 치열한 갈등 현장이 될 수도 있다.

하나의 낡은 관념이 폐기되는 데는 참 긴 시간이 걸린다. 분명한 건, 그렇게 되기까지 그 피해자들의 지난한 투쟁의 세월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허미경 대중문화팀장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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