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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1.30 20:10 수정 : 2012.11.30 20:10

영화 <26년>

[토요판] 허미경의 TV남녀

드라마 <보고 싶다>의 여주인공 윤은혜(이수연 역)는 어느 날, 어릴 적 자신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그놈’을 우연히 맞닥뜨리고는, 사지가 마비되는 듯한 공포에 빠진다. 얼굴 살갗이 부들부들 떨리고, 몸을 돌릴 수도, 팔다리를 움직일 수도 없다.

“그 일을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여버리고 싶어.”

‘그’를 보고 난 한참 뒤에 윤은혜는 비로소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리고 ‘그’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 윤은혜는 십수년 동안 몸과 영혼에 각인된 악몽에 직접 대면하기로 한다. 복수다. 윤은혜는 그의 집을 찾아가, 죽인다. ‘14년 전 여중생 성폭행범 자택에서 피살’이란 기사가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실린다. 이제 윤은혜의 얼굴은 조금은 편안해 보인다.

그 ‘죽임의 행동’은 윤은혜가 마음속에서 이미 수십차례 그려왔던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성폭력 소재를 정면으로 다룬 <보고 싶다>를 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빈번히 벌어지는 그 폭력의 피해자인 주인공의 고통을 시청자 역시 함께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윤은혜가 가해자를 직접 응징하는 장면은 간결하고도 통쾌했다. 초반 7~8%대였던 시청률을 12%대로 끌어올리며 <보고 싶다>는 시청자 공감을 넓히고 있다. 고통을 함께 감당하는 공감이기에 더 힘이 세다.

웃고 있어도 눈가엔 물기가 붉게 맺혀 있던, 허공을 맴도는 듯 불안하던 <보고 싶다>의 윤은혜의 눈망울은 피해자의 삶이란 것이 ‘살아 있어도 사는 게 아님’을 증언한다. 폭력의 피해자들은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한다. 그 고통은 초 단위로 분절되어 피해자의 몸에 각인된다. 복수란 피해자에게는 인간 존재로서 생존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법과 정치는 이들의 몸부림을 지나친다.

이 외면을 넘어, 저 1980년 5월에 벌어진 유혈 참극의 총지휘자를 향해 직접 단죄에 나서는 것이 영화 <26년>이다.

“탕~.”

‘그’를 겨눈 한혜진(심미진 역·사진)의 총이 그의 가슴을 향해 총알을 직진시키기를 나는 바랐다. 화면 속에서라도 말이다. 나만의 마음은 아니었을 거다. 생때같던 숱한 목숨을 잔혹하게 앗아간 ‘유혈’의 책임자다. 한혜진은 극중 고공 크레인에 올라 ‘탕’ 소리를 들었을 때 너무도 고독했다고 했다. 저 높이 크레인에 오른 그의 모습은 저 한진중공업 김진숙의 고투에도 겹쳐졌다.

보는 내내 눈물이 났는데,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아니, 모르지는 않았다. 초입부터였다. 진압군의 학살을 담은 비통한 애니메이션에 이어 그 ‘5·18’에 아버지를 잃은 아들 진배(진구)가 26년 동안 학살의 트라우마에 시달려온 어머니가 휘두른 칼로 말미암아 눈가에 칼자국이 아로새겨질 때였을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그’가 등장만 해도 착란에 빠지던 어머니는 군복을 입고 제대한 아들을 진압군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그 아들이 “우리 엄마, 고대로이구만 잉,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하는 순간, 칼자국에서 스며나온 핏물이 그 아들의 눈에서 흐른 눈물이 함께 섞여들던 순간부터였다.

드라마는 ‘행동한다’는 뜻의 고대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다. 복수극은 주인공이 복수를 위한 행동을 해야만 비로소 성립한다. <26년>은 ‘그를 향해 겨눈다’는 그 행동에 충실한 드라마이다. 그를 겨누는 그 행동만으로도 이렇게 눈물이 흐른다. 유족들은 오죽하겠는가. 중요한 건 그를 겨누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한 일을 ‘너’와 ‘내’가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를 우리 사회가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26년>의 흥행을 예감한다.

허미경 대중문화팀장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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