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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가족 / 왕따 남편
입맛이 쓰다. 일요일, 임병만(가명·48)씨가 홀로 식탁에 앉아 늦은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혀끝에 닿는 밥알이 까끌까끌하다. 물에 만 밥을 꾸역꾸역 입으로 밀어넣고 있자니 신세가 처량하다. 가족들은 이제 ‘같이 밥 먹자’고 임씨를 깨우지도 않는다. “당신이 언제 일어날 줄 알고 기다려. 당신이야 늘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하는 사람이잖아. 냉장고에 반찬 다 있으니까 이젠 당신이 알아서 좀 챙겨 먹어!” 아내가 ‘두번 밥상은 안 차리겠다’고 선언한 이후 임씨의 나홀로 밥상은 일상이 됐다. 어쩌다 때가 맞아 네 식구가 한 상에 둘러앉았을 때도 숟가락, 젓가락 부딪치는 소리뿐이다. 이미 자기들끼리 식사를 마친 아내와 아이들은 거실에서 티브이(TV)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임씨도 식탁을 대충 정리하고 소파 한켠에 앉는다. 무슨 비밀모의라도 했던 건가. 임씨가 들어서자 가족들은 약속이나 한 듯, 대화를 중단해버린다. 어색한 침묵. 거실에선 티브이만 혼자 떠든다.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임씨가 밖에서 들은 얘기를 화제로 아들에게 말을 붙여본다. “됐어요. 아빠가 뭘 안다고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들의 냉랭한 반응에 머쓱해져 할 말이 없다. ‘괘씸한 녀석, 아빠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알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제 엄마가 만날 아빠에 대해 안 좋은 얘기만 하니까 아이들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아내까지 괘씸하다. 임씨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티브이만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내 방으로 들어가 누워버린다. 집에 있으면 편해야 하는데 이건 뭐, 집에 있는 게 더 가시방석이다. ‘다음주엔 골프 약속이라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밖에선 끊겼던 대화가 다시 시작된 듯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밖에 나가면 유능한 사업가고, 호탕한 사나이란 소리도 듣지만 집에서 나는 그냥 왕따일 뿐이다. 돈 벌어오는 기계일 뿐이다.” 착잡해진다. 나 잠든 새 가족들은 밥 먹고나 밥 먹는 새 가족들은 대화중
집에선 그저 돈버는 기계일 뿐
괘씸하다, 차라리 나가자! 남편은 아이들 잠들 때 들어와
아이들 눈뜨기 전 출근했다
쉬는 날엔 자거나 티브이만 봤다
신경 끊었다, 나가든 말든! ‘이제 와서 웬 아빠 노릇?’ 아내 유희정(가명·46)씨는 아들에게 말을 붙였다가 무안만 당한 남편이 “전혀” 측은하지 않다. ‘다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란 생각에 고소하기까지 하다. 유씨는 그동안 “자웅동체처럼” 살아왔다.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바쁘다”며 남편은 밖으로만 나돌았다. 바쁜 건 평일-주말을 따로 가리지 않았다. 집에는 두 아이와 유씨만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남편은 애들 잘 때 귀가했다가, 애들이 눈을 뜰 때면 이미 출근하고 집에 없기 일쑤였다. 어쩌다 쉬는 날에는 하루 종일 자거나 티브이만 봤다. “말이 좋아 가장이지 까다로운 하숙생하고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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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모습으로 잠시 쉬고 있는 아빠. 정용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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