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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5.27 19:53 수정 : 2016.05.29 11:54

필자의 어린 시절. 3형제 중 막내가 갓난아이일 때 찍은 사진이다. 뒤쪽 오른편이 필자다. 한창 젊으실 때의 부모님 모습이 벌써 아득히 먼 과거가 되었다. 임영훈 제공

[토요판] 인터뷰; 가족
‘사장님’ 아버지

▶ 10년째 한 회사에서 함께 일해온 부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와 아들이자, 사장님과 부하직원입니다. 입사 전 아들은 주변의 어떤 이들보다 아버지와 가까웠다고 자부합니다. 그의 부하직원이 돼 10년을 지내면서 관계가 멀어진 듯해 안타깝습니다. 중년이 돼가는 아들과, 아직 일 욕심이 만만치 않은 아버지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인터뷰; 가족’은 독자 여러분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실명과 익명 기고 모두 환영합니다. 보내실 곳 gajok@hani.co.kr. 200자 원고지 기준 20장 안팎.

아버지 네가 왜 ㄷ사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못 다니겠다는 말을 했는지, 왜 팀장과 갈등이 있었는지 이해를 못 했는데… 데리고 일해보니 알겠다.

당시 아버지가, 아니 사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벌써 10년이 지났으니. 혈기 넘치던 20대였던 내겐, 수십년을 같은 방식으로 일해온 ‘옛날’ 분들이 사사건건 옛 방식을 고집하는 분위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벌써 12년 전인 2004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에 들어갔다. 그때도 취업이 쉬운 시절은 아니었지만 운 좋게 바로 붙었다. 마지막 학기 시험이 끝나기도 전에 출근과 연수가 시작됐고, 그렇게 들어간 회사를 1년 반 만에 그만뒀다. 언론사 기자를 하겠다며 또 1년 남짓 시간을 보냈다. 백수 아들을 보며 늘어만 가는 어머니의 걱정을 보다 못한 아버지께서, 작아져만 가던 회사에 이제 새로운 일거리가 들어오기 시작한다며 불러들이셨다. ‘차라리 시민단체를 가겠다’며 부모님이 계신 회사엔 가지 않으려 했지만, 백수 아들이 아버지의 ‘삐짐’을 감당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과 어머니(회사의 이사님이시다)의 인고의 세월이 함께 녹아 있는 이 회사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사업 경력은 30여년, 고도성장한 한국의 산업화 시기와 맥을 같이하고 경력만큼 수완이 뛰어나시다. 그에 반해 나는 고지식하게 원리원칙만 고집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계약서대로 해야죠. 저희도 계약 조항 지키고 상대방도 당연히 그래야 하고. 멋대로 공급을 중단하거나 가격 가지고 장난치면 법적 조치를 취해야 하고요. 그렇게 정해진 대로 순리대로 풀어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임영훈이는(마음에 안 드실 때는 직함이 아닌 이름을 부르신다) 참 순진해, 보면.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은 못 들어본 거 같고. 법으로 해결한다고? 그 절차가 몇 년이 걸리는데? 그리고 계약 총액이 몇 억이나 된다고 변호사 비용 수천만원을 들인다는 거야. 그 소송에 있는 힘, 없는 힘 다 쓰고 나면 이 제품 판매 수명도 끝나버려.

이렇게 경험을 토대로 현실을 일깨우는 말씀을 하실 때면 그만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가장 젊은 직원조차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회사에서 사실 내 목소리는 설득력이 없다. 고작 1년 반 경험한 대기업 시스템을 직원 5명에 불과한 회사에 적용해보려는 내게 부모님이나 직원들이 응원을 해줄 리 없었다. “일을 가르치려고 데리고 왔더니, 오히려 나를 가르치려고 하고 있어.” 내가 회사에 입사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친구분과 사무실에서 통화하다 하신 말씀이다. 바로 옆자리였다. 안 들을 수 없는 거리다. 원래 통화할 때 목소리가 큰 편이시지만, 나 들으라고 하신 말씀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가 일군 중소기업이 일터
“일을 가르치려고 데려왔더니
오히려 날 가르치려 하고 있어”
나 들으라 하신 말씀이었을까

“입만 열면 안 된다는 얘기뿐이냐,
일을 되게 하기는 정말 힘들어”
집에선 말다툼으로 끝날 일도
회사에선 직원 생계가 달린 문제

이 일은 안 됩니다. 경쟁사가 이미 시장에 한두 군데 진출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팔아보라고 윽박지른다고 될 일도 아니에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지금까지의 투자도 제가 반대했지만, 그동안 들인 비용은 매몰비용으로 포기하고 지금이라도 손 털고 나오는 게 답입니다. 무엇이든 현재, 현시점에서 판단해야지 그간 들인 시간과 노력을, 그 비용을 계상해서 보상받으려 하면 답이 없어요.

학점도 좋지 않았던 부전공(경제학) 지식까지 동원해가며 버텨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 너는 왜 입만 열면 안 된다는 얘기만 하냐. 안 된다는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아. 안 된다는 이유는 누구든 그 자리에서 열 개도 넘게 들 수 있어. 그런 얘기는 하기 쉽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일을 되게 하기는 힘들지. 몇 배의 노력과 수고가 들어가.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많지도 않고. 그렇게 나랑 일하기 싫으면 이 일에서 아예 빠져라.

이런 식으로 나는 업무에서 서서히 배제되거나, 때로 대놓고 빠지게 됐다. 아들임에도 회사의 주요 업무에 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삼형제 중 맏이인지라 때로는 3남이 대권을 승계한 ㅅ그룹의 옛 비화를 떠올리기도 했다. 내 경우는 대권이 아니라 ‘초소권’이라 별걱정은 없었지만.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나는 가까웠다. 기억 속의 아버지와 내 관계는 그렇다. 가물가물하지만 몇 가지 단상은 남아 있다. 아버지는 매일 새벽 6시에 나와 동생을 깨워서, 아파트 단지 일대를 뛰게 하셨다. 중간부터는 못 따라오는 나와 동생을 뒤로 돌아보고 뛰시면서 우리가 거리를 좁힐 수 있게 하셨다. 3~4㎞ 정도로, 열살 전후의 어린이가 뛰기에 짧은 거리가 아니었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하루를 쉬게 되면 계속 쉬게 된다’는 아버지 지론에 따라 우리는 우비를 쓰고,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장갑을 끼고 새벽 운동을 나갔다. 어머니께 학교에 가면 졸린다며 불평을 하긴 했지만 일단 아버지가 깨우면 팔 할은 나가 뛰었다. 행여 아버지 혼자 나가시는 날엔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 혼자 뛰시면 얼마나 외로우실까’ 걱정이 되곤 했다. 새벽 운동은 그렇게 몇 년간 유지됐다. 하지만 주관이 강한 동생이 먼저, 이후 나 역시 점점 빠지게 됐다. 중학교를 올라갈 때쯤 새벽 운동은 점차 아버지 혼자 나가시게 됐다. 한창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고 다니셨을 때 동네 아저씨가 하셨던 말이 기억난다. “저렇게 아침마다 아들을 데리고 운동 나가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냐.”

아버지와 지내온 시간이 어느덧 30년이 훌쩍 넘었다. 젊고 의욕 넘치셨던 아버지는 이제 우리 나이로 일흔에 가까워졌다. 아직도 열정이 식지 않으셨다. 이 글을 쓰는 오늘도 아버지는 새벽에 집을 나서 미국 출장을 가셨다. 일로 바쁜 아버지들이 그렇듯, 젊으셨을 땐 많은 대화를 해보지 못했다. 내가 대학생일 때 아버지와 깊은 얘기를 나눈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된 얘기다. 다시금 아버지와 솔직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지만 쉽지 않다. 아버지와 함께 10년째 한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건 아닐까.

거래처인 다른 회사를 방문하면 아버지 연배의 임원이 있기 마련이다. 같은 세대가 많은 곳에서 아버지는 비로소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신다. 60대인 아버지 세대의 가치관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온다. “이번에 투표한 사람들, 아마 몇 달만 지나면 기표한 자기 손가락을 분질러버리고 싶을 겁니다.” 지난주 방문한 회사에서 아버지는 그 회사 사장님께 이렇게 말하셨다. 두 분은 만나기만 하면 시국 걱정에 여념이 없다. 그분들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30~40대인 나와 우리 부장님은 숨죽이고 밥만 먹는다. 부하직원이지만 ‘아들’이기도 한 내가 대화에 끼면 가끔 분위기는 경색된다. 속으로 ‘내가 어쩌자고 그런 의견을 냈나’ 하며 슬며시 꼬리를 감춘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거래처 사장님의 낯빛이라도 변한다면 보통 큰일이 아니다. 그 거래처는 우리보다 훨씬 큰 회사다. 아무래도 흔히 말하는 ‘갑’이다. 단지 직원일 뿐이었다면 내가 그렇게 대화에 끼지 못했을 것이다. ‘사장님’ 아버지와 한 회사에서 일하는 아들만이 겪게 되는 일이다. 집에선 아버지와 말다툼으로 끝날 일도 회사에선 직원 전체의 생계가 달린 일이 된다.

“집에서는 정치 얘기 하지 마라. 밥상머리에서 싸우고 싶지 않다.” 오래전부터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하신다. 내가 회사에 오기 전에는 달랐다. 나는 아버지와 민감하다는 정치, 종교 얘기를 할 만큼 가까웠다. 친구들과 비교해도 나는 남들보다 분명히 아버지와 가까웠다. 내 주변엔 성장기에도 아버지와의 대화가 전무했거나, 말이 안 통했다는 이들이 다수였다. 아버지와 함께 회사에서 일한 지도 10년이 지났다. 아버진 그새 부쩍 더 연로해지셨다. 나도 이젠 중년이 된 게 아닌가 싶어 서글프다. 철없는 중년이지만, 이제는 조금씩 아버지 세대의 가치관, 정치관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조만간 아버지께 이렇게 말해보고 싶다. 나와 동생을 뒤로 돌아보고 뛰시면서 우리와의 거리를 좁히셨던 아버지께….

아버지, 저도 상당히 보수적으로 바뀌었어요.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집권이나 행태를 비난하는 정도는 예전보다 줄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이해가 되기도 하고요. 그러니 아버지도 젊으셨을 때 야당을 지지했던 패기 있던 시절을 떠올리시며 차츰 이해의 간극을 서로 좁혀가보면 어떨까요. 서로 못 하는 대화와 토론이 없던 저의 20대, 아버지의 40~50대 중년 시절로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보면 유쾌한 일일 것 같습니다. 제가 어느덧 그 나이가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만년 임 과장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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