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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해도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장이 지난 15일 영도조선소 앞에서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고공농성을 벌였던 타워크레인이 서 있던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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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르포
한진중공업 노사합의 6개월 뒤
솔직히 무심했습니다. 2011년 11월10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309일의 고공농성을 끝내고 타워크레인에서 내려오던 그날, 다 해결됐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192일이 지난 지금 상황은 어떨까요? △정리해고자 1년 내 복귀 △생계비 2000만원 지급 △노사간 민형사상 고소·고발 취하 등 한진중공업 노사가 맺은 약속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지 불안합니다. 한진중공업 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스물아홉살부터 10년 넘게 몸담아온 회사 아입니껴. 하루아침에 부당 해고를 한다는데 어데 하소연할 곳도 없고, 그래서 길 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아입니껴. 불법집회라고 (경찰이) 방송했다는데, 내는 못 들었어예. 집회 신고된 줄로만 알았지예. 자식 둘 부양해는 가장이니 선처를 부탁드림더.”
지난 15일, 부산 거제동 부산지방법원 531호 법정. 180㎝를 훌쩍 넘는 큰 키의 사내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말을 이어갔다. 허석현(40)씨다. 허씨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노동자 94명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제5차 희망버스 행사 때 참석했다는 이유(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로 약식 기소돼 이날 피고인석에 섰다. 허씨의 진술을 끝까지 들은 판사는 “6월12일 오후 10시에 선고하겠다”며 재판을 끝냈다. 재판 시간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법정을 나선 허씨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오늘 벌금 때려불먼 되지 와 또 오라카노?” 재판 때문에 허씨는 이날 하루 일을 공쳤다. 또 하루를 쉬어야 한다니 짜증이 차오른다. 이달엔 가뜩이나 비바람이 잦아 공친 날이 많았다. 수입이 줄어드는 것도 걱정이지만 “함께 일하는 사수(기술자)에게 또 어떻게 양해를 구하냐 말이지.” 허씨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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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제5차 희망버스 행사에 참석했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기소된 허석현(맨 왼쪽)씨가 지난 15일 재판을 받고 나온 뒤 부산지방법원 앞에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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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직원들은
순환 휴직에 월급 반토막 이 핑계로 복직약속 어길까…
정리해고자들은 더 막막
"파업만 끝났지 변한 건 없어" 노조는 둘로 갈라져 무력화
사쪽, 불법파업 158억 끝장소송
조합원들엔 ‘희망버스 벌금’ 감옥처럼 높아진 담장…85호 크레인도 철거 허씨는 지난 2월부터 아파트 외벽 도장공사 ‘데모토’(보조)로 일하고 있다. 한진중 영도조선소 기관실 공사부에서 10년 넘게 시운전만 해온 그가 도장 일을 알 턱이 없다. 건강한 몸을 밑천 삼아, 도장공사를 하는 사수의 외줄을 잡아주는 단순노동을 하고 있다. 내려다보면 현기증이 이는 아찔한 25~30층 높이, 외줄에 대롱대롱 몸을 실은 사수의 목숨이 오롯이 허씨에게 달려 있다. 몸도 피곤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새벽 5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을 하고 돌아오면 녹초가 돼서 쓰러지기 일쑤다. 그렇게 해서 버는 돈이 대략 한달에 150만원. 손에 들어왔다 싶으면 부스러지듯 사라지기 일쑤다. 그렇다고 별수 있나. 마흔 나이, 게다가 한진중 정리해고자 딱지를 달고선 새 직장 찾기가 쉽지 않다. ‘1년 안에 복직시켜주겠다’던 회사는 여태 소식이 없다. 그는 회사가 순순히 약속을 지킬 거라곤 생각지 않는다. “쌍용차는 뭐 약속을 안 해서 노동자들이 복귀 못 하고 있는 건가예?” 허씨가 담배 한 대를 또 꺼내 물었다. 한진중 영도조선소로 가는 길, 택시기사 김형택(가명·53)씨는 말했다. “다 해결된 거 아잉껴? 작년에 정치인들 많이 오고 국회서 청문회도 하고 그래서 다 원만하게 해결됐다~.” 2011년 11월10일. 김씨의 기억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309일의 고공 농성을 마치고 85호 타워크레인에서 내려오던 그날에 멈춰 있었다. 한진중 정리해고 사태가 희망버스를 타고 온 시민들의 연대와 노사, 정치권의 타협으로 해결한 모범 사례로 꼽혀 왔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 하지만 당사자들은 한숨만 나온다. “심지어 내 친척들도 이제 다 해결된 거 아니냐 합니더. 속 모르는 소리지예. 파업이 끝났지, 해결된 건 하나도 없어예.” 차해도 전국금속노조 한진중 지회장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 한진중 사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영도조선소 앞 담장에도 불화의 흔적이 여전했다. 도시 미관을 고려해 부산시가 5억원을 들여 조성했다는 2.3m 높이의 테마 담장 위엔 지금 콘크리트 구조물이 덧대어졌다. 희망버스를 타고 온 시민들이 담장을 넘은 뒤로, 회사 쪽이 보안상의 이유 등을 들어 6m로 담을 높인 것이다. “흉물스러운 모양 때문에 출퇴근 때 직원들이 감옥에 들어간다, 나간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고 차 지회장이 말했다. 정문 오른편에 서 있던 타워크레인 85호는 지난해 파업이 끝나기 무섭게 철거됐다. 2003년 김주익 지회장이 129일 동안 버티다 목숨을 끊었고, 김진숙 지도위원이 309일을 버티다 생환한 이곳은 한진중 노조 투쟁의 상징 그 자체다. “120억원짜리 크레인을 5억원 받고 고물로 팔아 치웠다고 하대요.” 회사 쪽은 시설 현대화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차 지회장은 “지긋지긋한 노조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담장 너머로 보이는 25만㎡ 너비의 조선소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대형 크레인들은 작동을 멈춘 채 서 있고, 배가 있어야 할 도크(야외 작업장)도 텅텅 비었다. 회사 쪽은 “2011년 11월30일 배 두척을 인도한 뒤로는 일감이 끊겨 현장 작업 물량이 전혀 없다”고 설명했다. 유럽발 금융위기 등의 여파로 그리스·영국 등 큰손들의 상선 수요가 끊기면서, 한진중은 지난해 12월부터 순차적으로 6개월간 유급휴직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노조원은 전체 707명 중 150여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시설 보수와 방산(방위산업) 부문 쪽 소일을 하며 근근이 버티고 있다. 20~30% 선만 돌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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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호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투쟁위원회 대표가 지난 15일 부산역 광장 앞에 설치된 쌍용차 희생자 추모 분향소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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