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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2월16일 경기도 일산 탄현 에스비에스(SBS)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16대 대통령후보 초청 합동토론회(위)와 2007년 12월6일 서울 여의도 케이비에스(KBS) 스튜디오에서 열린 제17대 대통령 후보자 1차 합동토론회. 대선주자 티브이 토론회는 지지율을 출렁이게 할 정도의 영향력은커녕 갈수록 유권자들의 관심마저 잃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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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1
대선후보 TV토론의 실종
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텔레비전 토론이 실종됐다. 방송사와 관훈토론 등 ‘전통적’인 토론마저 열릴 기미가 없다. 유권자로서는 알 권리가 박탈되고 있다. 야권 후보단일화 토론회 한차례와 12월에 예정된 법정토론회 세차례 정도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경직된 형식으로 인해 선거의 역동성을 살리기에는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과 달리 왜 대선 토론이 ‘실패’하고 있는가.
1997년 첫 도입땐 ‘난립 수준’선거 결과에도 큰 영향력
2002년·2007년엔 ‘통과 의례’
지지율 높은 후보 참석 꺼리고
발언 시간 등 공정성 강화로
깊이와 재미 놓치는 역효과도 올핸 주요 토론 대부분 무산
박근혜쪽 “사고칠까봐”
안철수쪽 “준비가 덜 됐다”
지지율 뒤진 문재인만 적극적 대접전 끝에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지만, 올해 미국 대선 과정은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였다. 백미는 세차례의 티브이 토론회였다. 토론회 승패에 따라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 진영과 밋 롬니 공화당 후보 진영은 울고 웃었다. 10월3일 1차 토론회 전까지 롬니 후보는 오바마 후보에게 많게는 8%포인트 정도 지지율에서 뒤졌다. 공화당 진영은 롬니를 거의 포기하는 분위기였다. “전체 유권자의 47%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바마를 지지한다. 그들은 모두 정부에 기대 살고 있다”며 저소득층을 폄하하는 롬니의 발언(롬니가 지난 5월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한 주택에서 열린 비공개 모금행사에 한 연설 내용)이 9월 중순에 폭로된 게 결정적이었다. 미국에선 당락 결정하는 주요한 변수 하지만 1차 티브이 토론회로 오바마 대세론이 꺾이고 롬니가 상승세를 탔다. 평소 말 잘하는 오바마는 1차 토론에서 날카로움이나 설득력을 잃은 채 맥빠진 모습을 보인 데 비해 롬니는 상대를 정확하고 끈질기게 공격하면서 토론을 주도했다. 두 후보의 이런 모습은 곧바로 지지율에 반영됐다. 10월16일 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롬니가 51%의 지지율로 오바마(45%)를 오히려 상당한 폭으로 앞서기 시작했다. 풀이 죽어 있었던 공화당 진영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오바마는 2차 토론(10.16)에 승부를 걸었고, 그의 ‘싸움닭’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2차 토론 이후 오바마와 롬니의 지지율이 비슷해졌다. 3차(10.22) 토론에서도 승리한 오바마는 근소한 차이로 롬니를 앞서기 시작했다. 여기에 막판의 허리케인 샌디 피해 때 리더십을 발휘하면서 승기를 굳혔다. 역대 미국 대선에서는 이번처럼 티브이 토론 결과가 선거전을 좌우했던 사례가 적지 않다. 첫 티브이 토론인 1960년 존 F. 케네디 민주당 후보와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의 토론(케네디 승리)을 비롯해 1980년 도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와 지미 카터 민주당 후보의 토론(레이건 승리), 1992년 빌 클린턴 민주당 후보와 조지 부시 공화당 후보의 토론(클린턴 승리)이 대표적이다. 미국 대선에서도 토론이 후보간 차별성을 그다지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은 유력 후보들이 오랜 정치경험을 통해 자질이 대부분 검증된데다 그들의 토론 기술이 상향 평준화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티브이 토론회는 이미지 정치에 치중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여전히 당선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한 변수다. 토론 결과에 따라 각 캠프의 선거운동 분위기가 달아오르거나 가라앉는 계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대선후보 티브이 토론회가 도입된 것은 1997년 15대 대선 때부터다. 14대(1992년) 대선 때도 티브이 토론회가 이뤄졌다. 중견기자들의 모임인 관훈클럽에서 김영삼(민자당), 김대중(민주당), 정주영(국민당) 후보를 차례로 불러 토론회를 열었으며,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이 이를 녹화로 중계방송했다. 대선주자들에 대한 첫 티브이 토론이어서 유권자들의 관심이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이는 토론회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엄밀하게 보면 2명 이상의 후보자들끼리 하는 ‘토론’이 아니라 개별 후보에 대한 초청 대담이었다. 1997년 대선부터 도입된 티브이 토론회는 고비용 저효율의 선거문화를 크게 바꿨다. 과거 대선 때는 여의도광장에 100만 인파를 서로 모아 세 과시를 하는 등 동원정치에 매달렸던 데 비해 티브이 토론회로 인해 후보들은 이제 말로 하는 ‘안방정치’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됐다. 그러나 티브이 토론회가 미국처럼 대선의 주요 변수로 자리잡았다고 하기는 아직 힘들다. 15대 대선 때만 어느 정도 토론회가 선거전에 영향을 끼쳤다. 오랫동안 ‘과격’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던 김대중 민주당 후보가 토론회에서 활약하면서 ‘준비된 후보’로 부각했던 것이다. 티브이 토론이 김대중 후보 당선에 결정적인 변수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도층이나 무당파의 표심을 끌어들이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됐다고 할 수 있다. 15대 때는 토론회도 풍성했다. 이회창(한나라당), 김대중(새정치국민회의), 이인제(국민신당) 후보가 세차례의 법정토론회뿐 아니라 언론사와 시민단체 등에서 주관하는 각종 대담(1인 대상)과 토론(2인 이상 대상)에 앞다퉈 참석했다. 토론회가 너무 많다고 아우성이 나올 정도였다. 선관위 집계를 보면, 방송사가 주최해서 중계한 토론회만도 30회가 넘었다. 또 신문사들도 세 후보를 초청해서 합동토론회를 열었으며, 이를 지상파 티브이로 중계하기도 했다. 이회창·이명박의 ‘김대중 학습효과’ 반면에 2002년 16대 대선과 2007년 17대 대선에서의 티브이 토론회는 통과 의례의 성격이 짙었을 뿐 각 후보의 자질과 능력을 드러내는 데는 실패했다. 16대 대선 재도전에 나선 이회창 후보는 15대 때의 학습 결과였는지 다자 토론을 철저하게 기피했다. 에스비에스에서 그해 9월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세 후보를 대상으로 일대일 양자토론을 제안했지만, 이 후보의 거부로 무산됐다. 이 때문에 1인 초청 대담은 많았지만, 합동토론은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가 주관하는 법정토론회 3차례에 그쳤다. 법정토론회 3차례도 선거전을 출렁이게 할 정도의 역동성을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2007년 17대 대선 때는 토론 횟수가 더 줄었다. 방송사와 언론단체, 시민단체가 주관이 된 초청 대담과 토론(44회)이 16대(83회)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명박(한나라당) 후보가 부자 몸조심으로 일관한 탓이 크다. 초반부터 야당 후보들보다 멀찌감치 앞선 이 후보는 3자 토론은 말할 것도 없고 1인 초청의 토론도 가능하면 참석을 꺼렸다. 다자 토론은 3차례의 법정토론회가 전부였다. 티브이 토론회가 대선주자 지지율을 출렁이게 할 정도의 영향력은커녕 갈수록 유권자들의 관심을 잃고 있다. 법정토론회의 평균 시청률은 53.2%(15대)에서 34.2%(16대), 21.7%(17대)로 계속 추락했다. 오바마와 롬니의 3차 토론회 시청자가 약 6000만명에 달해, 풋볼과 야구 등 스포츠 빅게임 시청자보다 6배 이상이나 됐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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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22일 서울역 대합실에서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를 위한 티브이 토론회 중계를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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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문재인-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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