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뉴스분석 왜?
이집트와 시리아, 두 개의 길
‘아랍의 봄’이 몰고 온 이집트의 혼란과 시리아의 내전이 다시 한번 해를 넘겼다. 혁명 이후 이집트의 새로운 나라 꼴을 규정한 신헌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가르는 국민투표를 끝낸 이집트는 절차적으로나마 혁명을 완수해냈다. 그러나 4만5천명이 희생된 시리아 내전은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차이를 가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지난달 26일 고집스러운 표정에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한 남자가 연단에 올라섰다. 그의 오른편엔 빨강·하양·검정 3색 바탕에 금색 독수리가 새겨진 이집트 국기, 오른손엔 그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 통과시킨 이집트의 새 헌법이 들려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무함마드 무르시. 지난해 6월30일 취임 이후 아랍에서 가장 ‘뜨거운’ 인물로 부상한 이집트의 대통령이었다.
무르시 대통령은 이집트 전 지역에 생중계된 이날 연설에서 “이집트 국민들은 오늘 새로운 헌법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고 선언했다. “오늘은 이집트와 이집트인에게 매우 역사적인 날입니다. 우리가 가진 헌법은 왕이나 대통령 또는 압제자에 의해 주어진 게 아니라 이집트인들이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직접 선택한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해 한데 모여 협력해야 합니다.” 그의 표정에는 혁명으로 시작된 2년간의 정치적인 혼란을 하루빨리 수습하고 무너져 버린 경제를 되살리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녹아 있었다.
무바라크의 3주, 아사드의 22개월
돌이켜 보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 속의 2년이었다. 2011년 1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으로부터 촉발된 ‘아랍의 봄’의 불똥은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의 30년 철권통치가 이어지던 이집트로 옮겨붙었다. ‘민주주의’와 ‘더 나은 삶’을 갈망했던 이집트의 젊은이들은 이제는 혁명의 상징 공간이 된 카이로의 타흐리르(해방)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무바라크 정권을 떠받치던 군부가 ‘혁명 지지’ 쪽으로 태도를 결정하면서, 철옹성으로 여겨졌던 무바라크 정권이 3주 만에 무너진 것이다. 이집트는 무바라크 정권 때 임명된 보수적인 사법부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군부의 반혁명 시도 속에서도 6월16~17일 대선 결선투표를 치러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를 대통령으로 선출해 낸다. 무르시 대통령은 취임 두달 만인 8월13일 군부 최고 실세인 무함마드 후사인 탄타위 국방장관에게 은퇴를 명령하는 초강수를 뒀고, 다시 넉달 만에 새 이집트의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도박을 걸어 국민 64%의 동의를 얻어냈다. 무르시의 새 헌법에 대해 “지나치게 이슬람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야권의 매서운 비판이 여전하지만, 무르시와 그가 통과시킨 헌법이 이집트인 다수의 지지를 받아 확정된 것임을 부인할 순 없다.
무르시의 연설이 이뤄진 다음날 또다른 아랍인이 세계인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주인공은 22개월째에 이른 시리아 사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유엔과 아랍연맹의 공동 특사 라흐다르 브라히미였다.
이집트보다 두달 늦은 2011년 3월 시리아에 상륙한 혁명의 불길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몰고 오고 말았다. 아버지 하페즈의 뒤를 이어 시리아를 통치하고 있는 독재자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외침을 잔인하게 유혈진압했기 때문이다. 아사드의 강경 진압에 충격을 받은 이웃 나라 터키는 물론 평소 시리아를 눈엣가시처럼 여겨온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등 수니파 산유국들이 노골적으로 반군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아사드 가문이 속한 소수 종파인 알라위파 지배계급(전체 인구의 12%)과 시리아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수니파(74%) 사이의 종파 갈등까지 불거지면서, 시리아 내전은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살육하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1월 현재까지 시리아 내전으로 숨진 이들은 유엔 집계로 벌써 6만명이 넘고, 주변국들로 흩어진 난민의 수도 50만명에 달하고 있다. 보다 못한 브라히미 특사는 시리아, 러시아와 조정 작업을 벌인 끝에 시리아의 모든 세력이 참여한 (잠정) 정부를 만들어 (시리아를 대표할 수 있는 합법적인) 선거가 끝나는 시점까지 가동한다는 것을 뼈대로 한 중재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를 보는 주변국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의 제안에 ‘아사드의 거취’라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빠졌기 때문이다. 22개월에 걸친 살육을 벌인 뒤에도 아사드는 여전히 권좌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고, 시리아 반정부 세력의 연합체인 ‘시리아 국민연합’(SNCORF)은 아사드와의 화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맞서고 있다. 그러자 브라히미 특사는 지난달 30일 “시리아 문제에 대한 정치적인 해법을 찾지 못하면 2013년 시리아 사태로 인한 사망자는 10만명까지 늘어날 수 있고, 시리아는 중앙정부의 기능이 사실상 사라진 아프리카의 소말리아와 같이 변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내놨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나라들의 시리아 제재 결의안이 지난해 8월 러시아와 중국의 거부권에 막혀 세번째 좌절되면서 시리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도 사실상 마비된 상태다.
전쟁 명분으로 자유를 압살한 시리아
같은 혁명이 이집트에선 여러 부침을 겪으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데 견줘, 시리아에선 누구도 수습하기 곤란한 거대한 비극으로 변했다. 왜 그랬을까? 이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두 나라가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시점까지 시간을 돌려 봐야 한다.
1973년 7월 하순 시리아 북부의 라타키아 항구에서 남자 6명이 소련의 정기여객선을 타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이들은 무스타파 틀라스 시리아 국방장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시리아군 수뇌부였다. 이유는 4차 중동전쟁의 협의를 위해서였다.
1947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시작된 네 차례 중동전쟁의 무대는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한 이집트와 시리아 전선을 통해서였다. 그만큼 두 나라는 ‘이스라엘 타도’라는 아랍의 대의명분에 충실한 동맹국이었다. 이들은 범아랍주의를 내세운 이집트의 가말 나세르 대통령 시절인 1958~1961년엔 ‘아랍연방공화국’이라는 연방제 국가를 만들기도 했다. 이들이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는 간명했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한테 빼앗긴 시나이 반도(이집트)와 골란고원(시리아)을 회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시리아 대사를 지낸 일본인 구니에다 마사키는 그의 저서 <아사드 정권의 40년사>(2012)에서 이 전쟁에 대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하페즈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사이에는 근본적인 시각차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사다트는 세상 물정에 통달한 54살의 노회한 정치인이었고, 하페즈는 아직 혁명의 열정이 가슴에 남은 43살의 장년이었다. 사다트는 그 무렵 1~3차 중동전쟁 실패의 경험으로부터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스라엘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사다트의 목적은 ‘제한된 전쟁’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뒤 미국과 이스라엘을 협상장에 끌어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페즈의 목적은 전쟁 그 자체였다. 사다트의 예상대로 이집트와 시리아는 초기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스라엘의 총리가 되는 아리엘 샤론의 수에즈 운하 ‘역도하’ 작전 등에 허를 찔려 패전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후 시리아와 이집트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4차 중동전쟁 이후이스라엘 타도 외치던 두 나라
이집트는 평화협정을 맺고
미국의 군사원조국이 되었다
시리아는 전쟁을 지속하면서
소수 알라위파 세습정권이
내부를 장악한 체제로 굳어졌다 ‘아랍의 봄’ 이후
이집트는 무르시가 새 헌법 통해
언론·종교 자유를 명문화한 뒤
조금씩 평온을 찾아가고 있다
시리아 아사드는 ‘퇴진 불가’
반군은 ‘화해 불가’ 고수하며
끝모를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이집트가 택한 것은 평화였다. 1973년 4차 중동전쟁의 서전의 승리를 통해 미국과 이스라엘에 자신의 힘을 각인시킨 이집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에 나선다. 그동안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아랍 세력의 맹주를 자처했던 이집트는 1978년 3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맺고 전선에서 이탈했다. 그 대가로 이집트는 대화를 통해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로부터 찾아오는 데 성공했고 미국으로부터 매년 13억달러에 이르는 군사원조를 받고 있다. 사다트는 1981년 10월6일 이슬람 과격파 장교 칼리드 이슬람불리의 총에 암살되지만, 그가 세운 외교 노선은 이후 30년 넘게 계승되고 있다. 시리아가 택한 것은 명분이었다. 시리아는 이집트와 요르단(1993년)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뒤 이스라엘과 전쟁을 지속하고 있는 유일한 아랍 국가로 남았다. 시리아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명분으로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를 말살하고, 영장 없이 시민들을 체포할 수 있는 ‘비상사태법’(계엄령)을 통해 수십년 동안 내부를 통제해 왔다. 게다가 시리아의 소수파인 알라위파가 장악한 정권이다 보니, 수니파의 무장 소요에 극단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1982년 2월 시리아 중부 도시 하마에서 벌어진 대학살이다. 이 토벌전으로 하마의 옛 시가지는 대부분 파괴됐고, 희생자 수는 정확히 집계되진 않지만 2만~4만명 사이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시리아는 수니파 다수의 분노를 소수 알라위파가 비밀경찰까지 동원해 강력히 통제하고 감시하는 기형적인 사회로 발전해 간다. 명분은 늘 이스라엘과 벌이고 있는 전쟁이었다. 시리아에서 비상사태법과 바트당에 의한 일당독재의 악습이 폐지된 것은 시리아 혁명이 시작된 뒤 아사드 대통령이 시민들의 개혁 요구를 일정 부분 받아들이면서부터다. 물론 두 나라의 차이를 갈라놓은 가장 큰 이유는 시리아의 뿌리 깊은 종파 갈등과 그로 인해 생겨난 아사드 정권의 사병화된 군대에 있겠지만, 시리아가 평화를 선택했다면 아사드의 통치는 좀더 온건했을 것이고 ‘시리아 내전’도 지금보다 다루기 쉬웠을 것이다. 내전은 서서히 반군 쪽으로 기울지만… 앞으로 두 나라는 어떻게 될까? 이집트는 조금씩 평온을 되찾을 것이다. 새로 만들어진 이집트 헌법을 보면, 옛 독재자 무바라크의 정당인 국민민주당(NDP) 지도자들의 정치 활동은 10년 동안 금지된다. 또 무바라크 정권 시절 임명된 사법부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 현행 18명인 최고헌법재판소의 판사 수를 10명으로 줄였다. 군부도 군에 대한 범죄를 제외하고는 앞으로 민간인을 군사법정에 세울 수 없다. 야권의 비판대로 이슬람법에 의한 지배 원칙이 강화되고, 남녀평등의 원칙이 애매하게 규정되긴 했지만, 언론과 종교의 자유 등이 명문화됐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임기가 “6년 임기, 무제한 재선”에서 “4년, 중임”으로 정해졌다. 물론, 지금의 이집트가 2011년 1월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 피를 흘린 젊은이들이 원했던 이집트였는지에 대해선 여지가 많다. 이런 의견을 대변하는 야권의 연합체인 구국전선은 두달 안에 치러지는 총선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무르시를 견제하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시리아의 앞날은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조금씩 흘러나오는 외신을 모아 보면, 팽팽히 맞섰던 정부군과 반군의 세력 균형이 조금씩 반군 쪽으로 기우는 모양새다. 그동안 아사드 정권을 두둔해 온 러시아가 지난달 처음으로 아사드 정권이 패배할 수 있다고 말했고, <아에프페>(AFP) 통신은 30일 시리아에 머물고 있는 러시아인들을 구출해 내기 위한 러시아의 세번째 해군 함선이 타르투스항에 입항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그리고 아사드 대통령은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끝내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난해 11월8일 러시아 영어방송인 <러시아 투데이>(RT) 인터뷰에서 결연한 표정으로 “시리아에서 살다 죽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도 최근 “아사드가 공개적인 자리에서나 사적인 석상 모두에서 물러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했다. 저명한 중동 전문기자인 영국 <인디펜던트>의 로버트 피스크가 지난해 7월 지적한 것처럼 아사드가 외국으로 망명한다면 그를 태우고 공항으로 이동한 뒤, 뒤에 남겨지게 될 알라위파 장교가 그를 가만히 둘까? 아마도 그렇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시리아 내전을 진심으로 우려하며 지켜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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