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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3.22 20:48 수정 : 2013.03.23 17:25

[토요판] 뉴스분석 왜?/차베스 대통령 ‘죽음 미스터리’
암인가 독인가, 그것도 아니면 커피인가

▶ 지난 5일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을 잃은 베네수엘라 정부는 그의 죽음을 미국의 음모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조사팀을 꾸리고 있다. 미국과의 갈등, 혼돈스런 베네수엘라 국내 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음모론은 내우외환에 꼭 맞는 처방일지도 모른다. 억울한 죽음을 밝혀 수 있다면 주검을 또다시 들춰내는 것은, 망자에겐 가혹한 일이나 역사의 큰 줄기를 가르는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때에 따라선 유해발굴·재부검도 음모론의 싹을 잘라내지는 못한다.

암수술 합병증으로 사망 이후
베네수엘라 정부와 부통령은
미국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란 대통령도 한마디 거들었다
미국은 ‘대선용 음모론’이라며
차베스 진영에 역공을 펼쳤다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은
미국이 자신을 암살하려는
638번의 시도가 있었다고 주장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수반과
칠레 저항시인 네루다는
독살 의혹에 관 뚜껑이 열린다
이스라엘과 칠레 군부가 용의자다

음모 자체보다는 음모론이 더 생명력 있다. 의심의 싹을 자르고 부인하는 것은 음모론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 즉 암살설은 더욱 그러하다.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던 이들 사이의 적대적 에너지가 죽음을 이용하고자 하는 세력과 합쳐지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된다.

남미 좌파 지도자들은 왜 죄다 암에 걸렸나

다양한 암살 기법 중에서도 독살은 배신, 암투, 애증 등과 버무려져 음모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수법이다. 고대적 어둠과 중세적 상상력, 섬뜩한 미학이 묻어 있기도 하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독초로 키워져 온몸이 독 덩어리인 인도 아가씨와의 단 한번 입맞춤으로 절명했다고 하고, 중국 한나라 고조 유방의 부인은 애첩의 아이를 미워해 맹독을 지닌 ‘짐’이라는 새의 날개를 술로 담갔다. 헤라클레스는 사랑의 묘약인 줄 알고 히드라의 맹독을 속옷에 바른 아내 때문에 숨진다.(<독살의 세계사> 참조)

정적 살해에는 독살만한 것이 없다. 의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과거엔 질병으로 인한 사망으로 둔갑시키기가 용이했기 때문이고, 정치적 혼란기엔 상대적으로 ‘조용한 죽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암수술 이후 호흡기 감염 합병증으로 지난 5일 숨진 베네수엘라 대통령 우고 차베스도 음모론의 세계에선 살아남았다. 차베스 대통령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부통령은 차베스 사망 직후부터 줄곧 미국의 개입을 의심하며 “차베스 대통령을 제거하길 원했던 어둠의 세력들이 그를 독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차베스와 반미 전선에 나란히 섰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도 차베스가 “의심스런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언급했다.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로 조사위원회를 꾸려 차베스 대통령의 독살 여부를 밝혀내겠다고 밝혔다. 물론 미국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태도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차베스가 하루에 커피를 40잔씩 마셔댔던 것을 가리키며 ‘베네수엘라산 카페인’에 의해 독살된 거라고 빈정댄다.

사실, 음모론은 차베스 측근들이 먼저 빌미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차베스는 지난해 12월 쿠바로 네번째 수술을 받으러 떠난 뒤부터 세상을 뜨기까지 정확한 건강 상태를 외부에 공개한 적이 없다. 네번째 취임식이 예정돼 있던 1월10일까지 차베스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일부 남미권 언론에선 이미 사망했다는 추측 보도까지 나왔다. 이후 병상에 누워 딸들과 함께 웃는 장면이 공개됐을 때도, 그의 트위터 계정에서 메시지가 떴을 때도 의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의 주검이 어떤 상태인지도 베일에 싸여 있다. 그는 사후 관에 담겨 군사학교에서 조문객을 맞았지만 얼굴 등 일부만 공개되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공식 애도기간이 끝난 13일, 애초 차베스의 주검을 방부처리해 호찌민이나 마오쩌둥처럼 영구보존해 전시하려던 계획을 접었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방부처리를 할 시기를 놓쳤다는 전문가들의 판단에 따랐다고만 했다. 하지만 차베스가 급사한 것도 아니고 두달 넘게 위독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장례 계획 등을 미리 정하지 않은 것도 의아스럽다. 이 때문에 차베스 반대 진영에선 4월14일 실시될 대선을 앞두고 차베스에 대한 연민과 반대파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기 위해 마두로가 독살설을 일부러 퍼뜨리고 있다는 비판이 터져나온다.

그러나 차베스 쪽에서 보자면 ‘미국의 음모’는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주제다. 차베스는 2년 전 텔레비전방송에 출연해 페르난도 루고 파라과이 대통령(림프암),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갑상선암), 브라질의 전·현직 대통령인 룰라(인후암)와 지우마 호세프(림프암) 등 남미의 여러 좌파 지도자들이 암에 걸린 것을 놓고 “미국이 아무도 모르게 암을 퍼뜨리는 기술을 개발했다면 정말 이상한 일일까?”라고 반문했다.

아라파트 독살 확인 땐 중동정세 요동

차베스가 평생 멘토로 모셨던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으로부터 미국이 어떻게 암살 음모를 꾸미는지 자세히 들었다면 음모론은 확신을 넘어 신념으로 변했을 법하다. 미국은 1960년대부터 중앙정보국(CIA)을 중심으로 이른바 ‘몽구스 작전’이라는 카스트로 암살 활동을 전개했다. 피델이 좋아하는 쿠바산 시가에 독극물 삽입, 스쿠버다이빙을 하는 장소에 바닷조개로 위장한 폭탄 설치, 위험한 세균이 잔뜩 묻은 수영복 선물 등을 비롯해 옛 애인 마리타 로렌츠를 매수해 독약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독극물을 묻힌 손수건과 만년필, 결핵균이 발라진 스쿠버다이빙 기구, 세균을 넣은 차·커피·아이스크림 등 다양한 소재가 동원됐다. 심지어는 카스트로의 대중적 매력을 줄이기 위해 머리털·눈썹이 빠지도록 제모제로 쓰이는 탈륨을 신발에 집어넣기도 했다. <위키피디아>는 카스트로 쪽의 말을 빌려 암살 시도 횟수가 638차례라고 전하고 있다. 1975년 미국의 조직범죄를 조사하기 위해 꾸려진 미 상원 처치위원회에서도 카스트로의 암살작전은 최소한 8번 이상이었다고 밝혀졌다.

현재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암살을 둘러싼 진상규명 작업은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자치정부 수반과 칠레의 저항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사인에 대한 것이다. 2004년 74살이었던 아라파트는 체중 감소와 설사로 고생하다 프랑스 파리의 병원으로 옮겨진 뒤 뇌출혈로 숨졌다. 그러나 아라파트 사망 1년여 전부터 이스라엘에선 아라파트를 암살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공작을 펼쳤을 거라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해 7월 스위스 로잔대학 방사선연구소가 아라파트의 부인으로부터 제공받은 혈액과 머리카락에서 일반인보다 6~7배에 이르는 폴로늄이 검출됐다는 사실을 밝히며 논란이 증폭됐다. 폴로늄은 2006년 전직 러시아연방보안청(FSB) 요원 출신인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암살에 쓰인 강력한 방사성물질이다. 팔레스타인자치정부는 아라파트의 유해 발굴을 허가했고, 지난해 12월 스위스·러시아·프랑스의 전문가들이 무덤을 열고 유해에서 표본을 채취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몇달이 걸릴 예정인데, 만약 아라파트가 독살당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두 나라를 넘어 전체 중동 정세가 요동칠 가능성이 있다.

1973년 숨진 네루다의 관도 다음달 40년 만에 열린다. 칠레 정부는 지난해 네루다의 운전기사이자 비서였던 마누엘 아라야의 증언에 따라 네루다의 유해 발굴을 결정했다. 공산당원이자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을 열렬히 지지했던 네루다는 쿠데타로 아옌데 정권이 전복된 지 2주 뒤 사망했다. 앓고 있던 전립선암 때문이라는 게 공식 발표였다. 그러나 네루다가 숨진 직후 비밀경찰에 체포됐던 아라야는 40년간 침묵하다 지난해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는 당시 네루다가 병원에 입원한 직후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자고 있는데 의사가 와서 뭔가를 주입했다. 그이후 열이 심하게 나고 몸이 너무 좋지 않다”며 병원에 빨리 와줄 것을 부탁했다고 증언했다. 네루다는 이 전화를 건 지 몇시간 뒤 숨졌다. 네루다가 숨진 병원은 군부에 저항했던, 또 한명의 전 칠레 대통령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가 1982년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그의 사인은 위수술 뒤 패혈성 쇼크였으나 2009년 가족들의 요청으로 재부검을 한 결과 군부에 의한 독극물 암살 사실이 밝혀졌다. 네루다의 유해는 습기찬 바닷가에 묻혀 있어 많이 훼손됐을 가능성도 크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관들이 펴낸 <타살의 흔적>(시공사)은 시간이 많이 지나면 부패, 백골화, 미라화가 진행돼 유해 발굴과 부검으로 충분한 정보를 얻기 힘들지만 토양·수분 등 보존 상태에 따라 필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중금속은 매장 뒤 몇년 지나서도 검출될 수 있고, 골절 여부는 백골화돼도 밝힐 수 있다.

테일러 대통령은 사망 141년 만에 ‘장염 탓’

앞서 언급된 러시아 요원 리트비넨코 사건은 여전히 조사가 진행중이다. 리트비넨코는 푸틴이 러시아 연방보안청(FSB) 수장을 맡고 있던 1998년에 연방보안청의 부패와 범죄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어 푸틴의 미움을 샀다. 그는 이후 영국으로 망명하고 나서도 푸틴이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체첸 반군의 공격을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폭로하는 등 푸틴 저격수 역할을 계속했다. 리트비넨코는 2006년 11월1일 런던의 한 식당에서 전직 동료였던 안드레이 루고보이 등과 만난 이후 몸이 좋지 않아 이틀 뒤 병원에 입원했다가 3주 뒤 숨졌다. 리트비넨코가 죽기 한달 전, 푸틴의 비판자이자 언론인, 인권운동가인 안나 폴릿콥스카야가 의문의 총살을 당했던 터라 그의 죽음엔 러시아 정부가 관련됐다는 주장이 유력하게 대두됐다. 부검 결과 그의 몸에선 폴로늄 210이라는 물질이 발견됐다. 암세포보다도 훨씬 파괴력이 강한 이 폴로늄을 생산하기 위해선 대규모 원자력 설비가 필요한데다 워낙 위험하고 희소해 정부 차원에서만 관리 가능한 물질이다. 폴로늄이 암살에 쓰인 물증으로 나온 것도 리트비넨코 사건이 처음이었다. 영국 경찰은 런던 식당에서 리트비넨코와 함께 차를 마셨던 루고보이를 살인 혐의자로 고발했으나 러시아는 그의 신병 인도를 거부해왔다. 루고보이는 현재 러시아에서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국과 러시아의 외교·정치적 이해관계 충돌로 리트비넨코의 억울함은 가려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본래 리트비넨코의 사인 심의회는 오는 5월 열릴 예정이었으나 다시 10월로 연기됐다. 이는 영국과 러시아 양쪽 모두 그에 관한 자료를 내놓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영국은 루고보이를 감싸는 러시아를 비판하면서도, 리트비넨코가 죽기 전에 영국 해외정보국(MI6)과 접촉했는지에 대해선 비밀에 부치고 있다.

비소 독살설이 난무했던 미국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1784~1850)의 경우엔 사망 141년 만인 1991년 무덤을 발굴해 재부검을 한 결과 독살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로써 테일러 대통령은 1850년 독립기념일 축제 때 장시간 뜨거운 햇볕에서 체리와 찬 우유를 많이 마셔 장염에 걸려 사망했다는 것이 ‘정설’이 됐지만 음모론은 죽지 않는다. 남부 켄터키 출신이자 노예를 소유했던 테일러 대통령은, 노예제에 대해 좀더 확실하게 자기들 편을 들어주길 기대한 남부인들을 배신해 화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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