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3.29 20:40 수정 : 2013.03.29 20:40

[토요판] 뉴스분석 왜?/ 키프로스 은행 잔혹사

▶ 2008년 유럽 경제위기 이후 구제금융과 긴축재정, 구조조정은 유럽 뉴스에서 가장 익숙한 단어가 됐다. 그런데 지중해의 작은 섬나라 키프로스는 여기에 은행예금 부과금, 자본통제 같은 생소한 단어들을 더 추가했다. ‘긴축과 구조조정이 마지노선이려니’ 했던 유럽에도 파문이 일었다. 유럽연합(EU)은 왜 이 약소국을 상대로 이런 논쟁적인 구제금융 실험을 강행한 것일까.

‘대지의 여신’ 가이아는 아들을 시켜 ‘하늘의 신’인 남편의 성기를 거세했다. 크로노스가 자른 우라노스의 성기는 그렇게 바다에 버려져 하얀 포말이 되었는데, 이 포말에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 헤시오도스가 전하는 이 잔혹하고도 낭만적인 그리스 신화의 배경이 된 나라가 바로 키프로스다.

은행예금 떼일 수 있는 아프로디테의 고향…

지난 2주간 아프로디테의 고향 키프로스가 신화 시대 이래 아마도 처음으로 국제뉴스의 ‘중심’에 섰다. 인구 110만명의 지중해 섬나라에 이제 낭만은 사라지고 ‘은행 잔혹사’가 시작됐다. 오랜 기간 변방에 머물렀던 탓에 ‘Cyprus’는 영어식 사이프러스인지, 그리스어식 키프로스인지도 아리송하다. 하지만 키프로스 뉴스가 전세계 언론을 도배하고 있는 지금, 국제사회의 뇌리에 한가지는 확실해졌다. “키프로스 은행에 예금하면 원금도 떼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경찰이 새벽 6시에 집에 들이닥친 격이다.” 영국 <비비시>(BBC) 방송 ‘뉴스나이트’의 경제 에디터 폴 메이슨은 최근 키프로스의 구제금융 조건 협상안을 이렇게 빗댔다. 여기서 ‘경찰’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중앙은행(ECB),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등 ‘트로이카’와 그 뒤에 버티고 서 있는 독일로 보면 된다. ‘새벽 6시’는 취임한 지 한달밖에 안 된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디스 키프로스 대통령의 무방비 상태를 뜻한다.

유로존과 국제통화기금은 금융위기를 겪고 있는 키프로스에 100억유로(14조4000억원)의 구제금융을 지원할 테니 58억유로를 자체 조달하라고 압박했다. 전세계가 충격을 받은 조달 방식은 ‘은행예금 부과금’이었다. 언론마다 ‘헤어컷’(손실) ‘세금’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지만 본질은 같다. 은행이 어려워졌으니, 예금주들이 상당부분 손실을 떠안으라는 것이다. 유럽중앙은행은 25일(현지시각)까지 유로존·국제통화기금과 합의하지 않으면 키프로스 경제에 인공호흡기 노릇을 하던 긴급 유동성 지원 프로그램(ELA)을 끊겠다고 통보했다. 트로이카가 협공해 한 약소국을 디폴트(채무불이행)와 유로존 퇴출의 벼랑 끝에 몰아세웠다.

키프로스는 결국 마감시한에 임박해 구제금융 조건을 받아들였다. 비율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뱅크오브키프로스와 라이키은행 등 최대 은행 두곳에 10만유로(1억4400만원) 이상을 예치한 예금주들은 원금의 40% 정도를 잃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은행 지분’을 준다지만 “돈 가져가고 휴짓조각 주는 거냐”는 반발이 거세다. 그런데 왜 ‘유럽의 여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트로이카’를 몰고 아프로디테의 고향을 급습해 은행예금마저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은 것일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그리스, 포르투갈, 아일랜드, 스페인 등이 한발 앞서 구제금융에 의지했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긴축재정으로 국민들이 고통을 받았고 주주와 채권소유주들도 큰 손실을 봤지만, 은행예금에는 손대지 않았다. 키프로스만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적은 돈을 빌리면서도 은행예금 부과금이라는 더 혹독한 채찍을 맞았다.

키프로스의 2012년 국내총생산(GDP)은 약 179억유로다. 유로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2%다. 유럽 강경파들이 ‘유로존 퇴출’까지 들먹이며 키프로스를 압박할 수 있던 것은 일단 ‘키프렉시트’(키프로스+엑시트)의 파급력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구제금융 사태의 특수성을 이해하려면 경제적인 배경 이외에도 키프로스 지도와 근현대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키프로스는 한국처럼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역사적 질곡’을 감내해온 나라다. ‘분단 국가’라는 공통점도 있다.

키프로스가 구제금융 선택한 건
러시아 떠나 유럽에 서겠다는 뜻
시리아 대신 지중해 상설기지로
키프로스 염두에 둔 러시아는
유럽의 은행예금 부과금 조처로
군사전략에 제동이 걸렸다

독일 총선이란 악재 탓도 크다
독일 유권자들은 다른 나라에
구제금융 퍼주는 데 지쳤다
9월에 3선 노리는 메르켈에게
러시아 검은돈을 지켜줬다는
비판은 치명적일 수 있다

지중해의 요충지라는 특수성, 독이 되다

키프로스는 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가 만나는 지중해 동부에 위치해 있다.(지도) 이 때문에 이집트,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비잔틴, 오스만튀르크, 대영제국 등의 지배를 두루 거쳤다. 1960년 8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1974년 터키 침공으로 남북으로 분단됐다. 키프로스(공화국)는 그리스계가 살고 있는 남쪽 60% 영토를 말한다. 국제사회가 합법적으로 승인한 나라이면서, 2004년 유럽연합에도 가입했다. 북쪽에는 미승인 국가인 소수 터키계 주민들이 ‘모국’ 터키에 의지해 살고 있다.

키프로스는 이런 지정학적, 정치적 특수성 때문에 그리스와 터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또 영국이나 러시아처럼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를 활용하고자 하는 큰 나라들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며 살고 있다. 영국은 1950년대 이래 키프로스에 해군기지 두곳을 유지하고 있고, 영국군 2000명이 주둔하고 있다. 러시아 역시 정치·군사·경제적으로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번 구제금융 사태의 배경에는 특히 키프로스와 러시아의 이런 ‘특수 관계’가 있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지중해를 유럽 진출의 관문으로 중시했다. 미국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추진하고 있는 미사일방어체제(MD)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곳이다. 러시아는 시리아의 지중해 항구도시 타르투스에 있는 해군기지를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해 왔는데, 최근 2년간 이곳의 지속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맺어오던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정권이 내전으로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시리아 상황이 악화되면서, 러시아에서는 타르투스로 가는 중간 경유지였던 키프로스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빅토르 치르코프 러시아 해군사령관은 최근 “지중해 상설 기지에 5~6척의 군함 배치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키프로스를 염두에 둔 말이다.

러시아와 키프로스의 우호관계를 증명하듯, 키프로스에는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4만명이나 된다. 또 전체 은행예금이 680억유로 가운데 러시아계 자금이 200억~300억유로다. 독일을 중심으로 핀란드, 네덜란드 등 유럽 부자 나라들이 은행예금 부과금을 고집한 것은 이 러시아 자금을 겨냥한 것이다. 런던의 국제전략연구소 니컬러스 레드먼은 “은행예금 부과금 조처로 러시아 자금주들은 키프로스가 더이상 편리한 조세도피처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결국 키-러 관계 약화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럽 강대국들이 키프로스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해 보려는 러시아의 전략에 제동을 걸기 위해 은행예금을 우회공략한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26일 “키프로스와 유럽연합의 구제금융 합의는 유럽과 러시아의 싸움이었고, 러시아가 패배했다”고 분석했다. 키프로스는 유럽연합과 협상을 벌이면서 물밑으로 러시아와도 교섭을 진행했다. 유럽연합 당국자가 “유럽과 키프로스의 협상 과정을 러시아가 실시간으로 알고 있었다”고 분통을 터뜨렸을 정도다. 지난 19일 키프로스 의회가 10만유로 이하 소액 예금까지 부과금을 강제하는 협상안을 ‘찬성 0표’로 거부한 것도 러시아 차관에 대한 기대가 일부 있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키프로스 재무장관이 모스크바까지 날아갔는데도 자금지원 확답을 미뤘고, 결국 키프로스는 유럽의 구제금융 조건을 수용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키프로스가 러시아를 떠나 유럽에 서겠다는 뜻”을 밝힌 거라고 분석했다.

키프로스 경제가 건전했더라면, 메르켈 총리 같은 유럽의 강경파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중해의 역외 조세도피처’로서 호시절을 구가하던 키프로스 경제는 그리스의 경제위기 여파로 사실상 붕괴 직전이었다. 키프로스의 금융부문 규모는 국내총생산의 7~8배에 이를 만큼 비대하다. 저율의 세금과 고율의 이자로 국외 자금을 대거 끌어들인 탓이다. 이 중 러시아 자금의 상당수는 돈세탁을 노린 신흥재벌 올리가르히와 마피아의 ‘검은돈’으로 추정된다. 키프로스 은행들은 국내총생산의 160%에 이르는 자금을 그리스에 투자했다. 하지만 지난해 그리스 구제금융 과정에서 헤어컷으로 75%를 사실상 날렸다. 2009년까지만 해도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장기간의 고성장률, 낮은 실업률, 견실한 공공재정”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키프로스 경제의 거품은 그렇게 꺼졌다.

유럽 강경파들은 바로 이 틈을 파고든 것이다. 독일 등은 러시아 견제와 함께 키프로스를 본보기 삼아 유럽에 새로운 구제금융 원칙을 세우려 했다. 부실은행 주주든 채권자든 예금주든 ‘채무자의 손실’이 없는 구제금융은 더이상 없다는 것이다. 또 구제금융을 받으려면, 전체 유럽 경제를 취약하게 만드는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금융산업 모델을 포기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눈에 띈다.

물론 시련은 늘 불운을 동반한다. 키프로스가 갑작스럽게 새로운 구제금융의 ‘첫 타작’을 당한 것은 독일 총선이라는 악재 탓도 있다. 독일은 9월 총선을 실시하는데, 독일 납세자들의 돈으로 유럽위기의 소방수 구실을 해온 메르켈 총리도 3선을 마냥 안심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독일 유권자들은 다른 나라에 구제금융을 ‘퍼주는 데’ 인내력을 잃었다. 특히 키프로스 구제금융으로 러시아 검은돈의 손실을 막아줬다는 비판은 선거국면에서 상당히 치명적일 수 있다.

폴 크루그먼 “키프로스는 유로존 떠나라”

키프로스 구제금융 조건은 일단 독일과 유럽이 원했던 대로 타결됐다. 하지만 새로운 원칙이 ‘예상했던 결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은행예금 부과금과 부실 라이키은행 청산, 뱅크런을 막기 위한 자본통제를 담은 합의안이 유럽연합과 키프로스 모두한테 ‘썩은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크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뉴욕 타임스> 기고를 통해 “키프로스가 유로존을 당장 떠나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키프로스를 향해 유럽연합이 강요하는 긴축 때문에 경기침체와 실업률 급등을 겪지 말고 차라리 유로화를 포기하라고 조언했다. 더욱이 키프로스 은행에 대한 신뢰도는 구제금융 과정에서 회복이 힘들 정도로 하락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때문에 올해 키프로스 국내총생산이 10% 줄 것으로 전망했다.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이 23% 감소할 거란 전망도 있다. 크루그먼 같은 전문가들은 키프로스가 자국 화폐로 복귀해 통화 가치가 절하되면, 차라리 관광과 농업 등 수출분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내놓는다.

27일 발표된 키프로스 자본통제 방안도 기대보다는 우려가 많다. 키프로스는 뱅크런을 막기 위해 무역대금 결제를 제외한 모든 국외 송금을 금지시켰다. 외국여행 때 가지고 나가는 현금(1회 3000유로)과 유학생 인출 한도(분기별 1만유로), 해외 신용카드 한도(한달 5000유로)도 제한했다. 국내에서는 하루 300유로 이상 인출할 수 없다. 외신은 향후 4~7일 정도 자본통제를 예상했지만, 전문가들은 훨씬 더 길어질 거라고 전망한다. <블룸버그>는 “금융산업이 ‘과도’했던 아일랜드 역시 2008년 은행이 붕괴한 이후 지금도 자본을 통제하고 있다”며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또 키프로스를 보고 놀란 예금주들이 이탈리아와 스페인처럼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큰 나라’에서 뱅크런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뉴스분석, 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