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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키프로스 은행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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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떠나 유럽에 서겠다는 뜻
시리아 대신 지중해 상설기지로
키프로스 염두에 둔 러시아는
유럽의 은행예금 부과금 조처로
군사전략에 제동이 걸렸다 독일 총선이란 악재 탓도 크다
독일 유권자들은 다른 나라에
구제금융 퍼주는 데 지쳤다
9월에 3선 노리는 메르켈에게
러시아 검은돈을 지켜줬다는
비판은 치명적일 수 있다 지중해의 요충지라는 특수성, 독이 되다 키프로스는 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가 만나는 지중해 동부에 위치해 있다.(지도) 이 때문에 이집트, 페르시아, 마케도니아, 로마, 비잔틴, 오스만튀르크, 대영제국 등의 지배를 두루 거쳤다. 1960년 8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1974년 터키 침공으로 남북으로 분단됐다. 키프로스(공화국)는 그리스계가 살고 있는 남쪽 60% 영토를 말한다. 국제사회가 합법적으로 승인한 나라이면서, 2004년 유럽연합에도 가입했다. 북쪽에는 미승인 국가인 소수 터키계 주민들이 ‘모국’ 터키에 의지해 살고 있다. 키프로스는 이런 지정학적, 정치적 특수성 때문에 그리스와 터키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또 영국이나 러시아처럼 지중해의 전략적 요충지를 활용하고자 하는 큰 나라들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며 살고 있다. 영국은 1950년대 이래 키프로스에 해군기지 두곳을 유지하고 있고, 영국군 2000명이 주둔하고 있다. 러시아 역시 정치·군사·경제적으로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번 구제금융 사태의 배경에는 특히 키프로스와 러시아의 이런 ‘특수 관계’가 있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지중해를 유럽 진출의 관문으로 중시했다. 미국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추진하고 있는 미사일방어체제(MD)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곳이다. 러시아는 시리아의 지중해 항구도시 타르투스에 있는 해군기지를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해 왔는데, 최근 2년간 이곳의 지속가능성이 불투명해졌다. 러시아와 우호관계를 맺어오던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정권이 내전으로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시리아 상황이 악화되면서, 러시아에서는 타르투스로 가는 중간 경유지였던 키프로스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빅토르 치르코프 러시아 해군사령관은 최근 “지중해 상설 기지에 5~6척의 군함 배치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키프로스를 염두에 둔 말이다. 러시아와 키프로스의 우호관계를 증명하듯, 키프로스에는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4만명이나 된다. 또 전체 은행예금이 680억유로 가운데 러시아계 자금이 200억~300억유로다. 독일을 중심으로 핀란드, 네덜란드 등 유럽 부자 나라들이 은행예금 부과금을 고집한 것은 이 러시아 자금을 겨냥한 것이다. 런던의 국제전략연구소 니컬러스 레드먼은 “은행예금 부과금 조처로 러시아 자금주들은 키프로스가 더이상 편리한 조세도피처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것이다. 결국 키-러 관계 약화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럽 강대국들이 키프로스에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해 보려는 러시아의 전략에 제동을 걸기 위해 은행예금을 우회공략한 측면이 있다는 뜻이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는 26일 “키프로스와 유럽연합의 구제금융 합의는 유럽과 러시아의 싸움이었고, 러시아가 패배했다”고 분석했다. 키프로스는 유럽연합과 협상을 벌이면서 물밑으로 러시아와도 교섭을 진행했다. 유럽연합 당국자가 “유럽과 키프로스의 협상 과정을 러시아가 실시간으로 알고 있었다”고 분통을 터뜨렸을 정도다. 지난 19일 키프로스 의회가 10만유로 이하 소액 예금까지 부과금을 강제하는 협상안을 ‘찬성 0표’로 거부한 것도 러시아 차관에 대한 기대가 일부 있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키프로스 재무장관이 모스크바까지 날아갔는데도 자금지원 확답을 미뤘고, 결국 키프로스는 유럽의 구제금융 조건을 수용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키프로스가 러시아를 떠나 유럽에 서겠다는 뜻”을 밝힌 거라고 분석했다. 키프로스 경제가 건전했더라면, 메르켈 총리 같은 유럽의 강경파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중해의 역외 조세도피처’로서 호시절을 구가하던 키프로스 경제는 그리스의 경제위기 여파로 사실상 붕괴 직전이었다. 키프로스의 금융부문 규모는 국내총생산의 7~8배에 이를 만큼 비대하다. 저율의 세금과 고율의 이자로 국외 자금을 대거 끌어들인 탓이다. 이 중 러시아 자금의 상당수는 돈세탁을 노린 신흥재벌 올리가르히와 마피아의 ‘검은돈’으로 추정된다. 키프로스 은행들은 국내총생산의 160%에 이르는 자금을 그리스에 투자했다. 하지만 지난해 그리스 구제금융 과정에서 헤어컷으로 75%를 사실상 날렸다. 2009년까지만 해도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장기간의 고성장률, 낮은 실업률, 견실한 공공재정”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키프로스 경제의 거품은 그렇게 꺼졌다. 유럽 강경파들은 바로 이 틈을 파고든 것이다. 독일 등은 러시아 견제와 함께 키프로스를 본보기 삼아 유럽에 새로운 구제금융 원칙을 세우려 했다. 부실은행 주주든 채권자든 예금주든 ‘채무자의 손실’이 없는 구제금융은 더이상 없다는 것이다. 또 구제금융을 받으려면, 전체 유럽 경제를 취약하게 만드는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금융산업 모델을 포기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눈에 띈다. 물론 시련은 늘 불운을 동반한다. 키프로스가 갑작스럽게 새로운 구제금융의 ‘첫 타작’을 당한 것은 독일 총선이라는 악재 탓도 있다. 독일은 9월 총선을 실시하는데, 독일 납세자들의 돈으로 유럽위기의 소방수 구실을 해온 메르켈 총리도 3선을 마냥 안심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독일 유권자들은 다른 나라에 구제금융을 ‘퍼주는 데’ 인내력을 잃었다. 특히 키프로스 구제금융으로 러시아 검은돈의 손실을 막아줬다는 비판은 선거국면에서 상당히 치명적일 수 있다. 폴 크루그먼 “키프로스는 유로존 떠나라” 키프로스 구제금융 조건은 일단 독일과 유럽이 원했던 대로 타결됐다. 하지만 새로운 원칙이 ‘예상했던 결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은행예금 부과금과 부실 라이키은행 청산, 뱅크런을 막기 위한 자본통제를 담은 합의안이 유럽연합과 키프로스 모두한테 ‘썩은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크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뉴욕 타임스> 기고를 통해 “키프로스가 유로존을 당장 떠나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키프로스를 향해 유럽연합이 강요하는 긴축 때문에 경기침체와 실업률 급등을 겪지 말고 차라리 유로화를 포기하라고 조언했다. 더욱이 키프로스 은행에 대한 신뢰도는 구제금융 과정에서 회복이 힘들 정도로 하락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때문에 올해 키프로스 국내총생산이 10% 줄 것으로 전망했다. 연간 실질 국내총생산이 23% 감소할 거란 전망도 있다. 크루그먼 같은 전문가들은 키프로스가 자국 화폐로 복귀해 통화 가치가 절하되면, 차라리 관광과 농업 등 수출분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내놓는다. 27일 발표된 키프로스 자본통제 방안도 기대보다는 우려가 많다. 키프로스는 뱅크런을 막기 위해 무역대금 결제를 제외한 모든 국외 송금을 금지시켰다. 외국여행 때 가지고 나가는 현금(1회 3000유로)과 유학생 인출 한도(분기별 1만유로), 해외 신용카드 한도(한달 5000유로)도 제한했다. 국내에서는 하루 300유로 이상 인출할 수 없다. 외신은 향후 4~7일 정도 자본통제를 예상했지만, 전문가들은 훨씬 더 길어질 거라고 전망한다. <블룸버그>는 “금융산업이 ‘과도’했던 아일랜드 역시 2008년 은행이 붕괴한 이후 지금도 자본을 통제하고 있다”며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또 키프로스를 보고 놀란 예금주들이 이탈리아와 스페인처럼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큰 나라’에서 뱅크런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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