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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12조 7항은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에 의하여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될 때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규정한다. 헌법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사진은 수사기관에서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하는 탈북자 홍아무개. 연합뉴스, 강재훈 선임기자,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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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탈북자들의 허위자백
▶ ‘직파간첩 홍아무개씨’가 무죄 선고를 받자 한 유력 보수언론은 11일 ‘스무차례 간첩혐의 인정하던 직파간첩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 만난 뒤 진술을 뒤집었다’고 보도했습니다. 홍씨를 만난 변호인은 ‘왕재산 사건‘과 ‘유우성 사건’도 맡았다고 소개했습니다. 잇단 간첩사건 무죄 선고의 본질은 민변일까요? 그러나 수사 연구가들은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신문 과정에 주목합니다. 왜 탈북자들이 허위자백을 하게 되는지 살펴봤습니다.
우리는 생각한다. ‘지금은 고문이 없는 시대이다. 수사 때 미란다 원칙(피의자 신문 전 수사관이 변호인 선임권과 진술 거부권 등 피의자의 권리를 알려야 하는 원칙)도 지켜진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자신이 범인이라고 허위 자백을 하는 일은 없을 거다.’
1989년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다. 한 여성이 미국 뉴욕의 센트럴파크 공원을 산책하다가 잔인하게 성폭행당했다. 뉴욕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이날 공원에서 난동을 부린 10대 소년들을 주목했다. 다섯명의 소년이 체포됐다. 경찰은 이들을 신문해 ‘피해 여성을 폭행하고 강간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재판 때 이 소년들은 경찰관이 신문 때 때리거나 모욕하고 자백을 해야만 구류상태에서 풀려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판사는 믿지 않았다. 경찰에서 한 자백은 증거로 채택됐다. 소년들은 각각 징역 5년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2002년 1월 ‘센트럴파크 성폭행 사건’의 실제 범인 마티어스 레이즈가 나타나 자신의 범행을 뒤늦게 자백했다. 레이즈의 디엔에이(DNA)가 피해 여성에게 묻어 있던 것과 일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2002년 12월19일 소년들은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자백에만 의존해 유죄로 단정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미국 사회는 성찰했다.
1990년대 이후 미국에서 진행된 여러 연구 결과들은, 허위 자백이 오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4~25%에 이른다고 설명했다. 1966년 ‘미란다 판결’로 수사기관에서 가혹행위가 사라지고 허위 자백은 사라졌을 것이라는 미국 사회의 통념은 뒤집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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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12조 7항은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에 의하여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될 때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규정한다. 헌법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사진은 수사기관에서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하는 탈북자 원정화. 연합뉴스, 강재훈 선임기자,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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덫에 가장 취약한 이들이다
고립감, 무력감, 굴욕감 속에서
수사관의 회유에 쉽게 넘어간다
장시간 조사받을수록 더 심하다 신문 전 과정 영상녹화하고
재판부가 이를 살펴보게 해야
2005년 7월 위스콘신주는
청소년 신문시 녹화 의무화
중범죄 연루 성인까지 확대 지난해 말부터 <한겨레>는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다고 주장하는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보도해왔다. 유가려(2013년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원정화(2008년 탈북 여간첩 사건), 이시은(2013년 간첩 자백), 홍아무개(2014년 직파간첩 사건), 탈북자 ㄱ씨(2013년 간첩 자백) 등이다. “수사관이 오빠를 징역 5년 보내버리겠다고 말해 겁을 먹었어요. 수사관이 김현희 이야기 꺼내면서 ‘죄를 반성하면 1년만 감옥 살게 하고 남한에서 오빠랑 살게 해주겠다’고 말했어요.”(유가려), “수사관이 ‘나쁜 판사 만나면 형을 길게 받을 수도 있지만 국정원이 도와줘서 대통령 특사 때 빠져나오게 할 것이다. 국정원에서 직업도 주고 아파트도 준다’고 말했습니다.” (직파간첩 사건 홍씨) 이들이 허위 자백을 하게 된 이유를 기자에게 설명한 내용의 일부다. 이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국정원 등의 수사기관에서 탈북자들에게 고도의 신문기술을 사용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미국에서 1974년 개발된 리드(Reid) 기법이라는 이름의 심리신문 기법이 있다. 피의자는 고립된 상태로 신문을 받는다. 범행을 부인하는 피의자를 수사관은 무시한다. 아무리 결백하다고 주장해도 소용이 없다. 피의자는 극도의 무력함에 빠진다. 이때 수사관은 ‘자비의 기술’을 꺼내든다. 범행을 시인하면 선처하겠다는 식으로 회유한다. 또는 피의자를 기망한다. ‘범행 목격자가 있다’고 거짓말하거나 거짓말 탐지기 결과를 사실과 다르게 제시한다. 피의자는 허위 자백 외에는 탈출구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검경 수사관 교육기관에서는 이 리드 기법을 일선 수사관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한겨레>가 접촉한 ‘간첩이라고 허위 자백한’ 탈북자들은 신문 과정에서 대체로 이들 연구논문이 소개한 것과 매우 유사한 과정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저항하고, 지칠 정도로 조사를 받고,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무력해지고, 자백하면 김현희처럼 살게 해준다고 회유당하고, 자백 안 하면 평생 갇혀 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고, 결국은 허위 자백에 이르게 된다는 게 이들의 공통적인 증언이다. 우리와 사법체계가 비슷한 일본에서 허위 자백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범죄심리학자 하마다 스미오의 저서 <자백의 연구>(2005)를 보면, “피의자가 허위 자백에 빠져드는 심적 상황을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한다. 전적으로 피의자 입장에서 바라봐야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인데 당해보기 전까지는 이들의 심리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스미오가 설명하는 피의자의 심리상태를 요약하면 이렇다. △신병의 구금으로 인한 심리적 안정감 상실 △수사관에 의해 범인으로 단정되어 정신적 굴욕감 △아무리 변명해도 무시당하는 무력감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때로 수사관의 온정에 이끌림. 합동신문센터에서 고문에 가까운 수사를 받고 간첩이라고 허위 자백한 탈북자들은 이와 비슷한 심리 발전단계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간첩 혐의를 받는 탈북자들은 대체로 장기간 독방에서 조사를 받는다. 유가려씨는 171일간, 홍씨는 135일간 갇혔다. 지난해 다섯달 동안 합신센터 독방에 갇혀 있었던 ㄱ씨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독방에 있으면 사람이 그리워진다. 나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보위부 정보원이라고 그냥 말해버리면 독방은 나갈 수 있을 줄 알고 허위 자백했다”고 말했다. 장시간 조사받는 고문도 가해진다. 유가려씨의 경우 “아침에 시작해 새벽까지 조사가 이뤄지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학 로스쿨 리처드 리오 교수의 연구(2004)를 보면, 리오 교수는 허위 자백 경험자 44명의 신문 시간을 확인했다. 12~24시간 사이의 신문을 받고 허위 자백한 비중이 39%, 6~12시간은 34%로 나타나 6~24시간 장시간 신문을 받고 자백한 비중이 73%에 달했다. 6시간 이하의 경우는 16%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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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12조 7항은 ‘피고인의 자백이 고문, 폭행, 협박, 신체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또는 기망에 의하여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될 때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규정한다. 헌법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사진은 수사기관에서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하는 탈북자 유가려. 연합뉴스, 강재훈 선임기자, 허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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