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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오후 국회에서 탈당 의사를 철회하고 당무 복귀를 선언하기 위해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서는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130석을 가진 거대 정당의 ‘저질 체력’도 박 원내대표가 실패한 주요 원인이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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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뉴스분석, 왜?
박영선 파동의 진실
▶ 화려하게 출발했던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원내대표에 오른 지 채 다섯달도 안 돼 탈당 카드라는 극단적 선택까지 발언할 정도로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첫 여성 원내대표(교섭단체상)로서, 첫 여성 대통령과 함께 짝을 지어 거론됐던 ‘양박 시대’도 함께 저물었다. 그는 왜 그랬을까? 그의 오류는 여성 정치인들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아무리 실기를 해도 철옹성 지지율을 보이는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모래성 리더십’의 차이는 무엇일까? ‘박영선 파동’의 뒷면을 짚어본다.
‘양박시대’가 열리면 나라가 시끄러워진다고 했던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지난 16일은 ‘양박시대’의 혼란이 극적으로 드러난 날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국에 대한 강경한 인식을 드러내며 청와대가 세월호 특별법 협상을 좌지우지하는 배후 조종자라는 사실을 자인했다. 한가닥 희망을 걸었던 세월호 유족들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또한 이날은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언론을 통해 탈당 뜻을 밝힌 뒤 칩거에 들어간 지 사흘이 되는 날이었다. 대표의 탈당이라는 초유의 위기에 직면한 새정치연합의 위신은 바닥까지 내려갔다. 과연, ‘양박시대’는 시끄러웠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박영선 파동’을 겪으며 새정치연합 내에서는 “이제 몇년 동안은 여성 원내대표가 등장하기 어렵게 됐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박 대통령에 대해선 그의 강력한 비판자들조차도 “여성이라서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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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는 동전의 양면
그것은 남을 승복시키지만
반감을 일으키게도 만든다
능력주의의 신화에 갇힌 걸까 박영선 파동은 복잡한 맥락
‘개인 여성’을 되새기게 하고
새정치의 허약함 직시하게 하며
한국 사회 물질주의와 짝 이룬
정치적 보수화 성찰하게 해 그의 낡은 명품이 생각난 이유 그는 지난달 7일 주변의 누구와도 상의 없이 세월호 특별법 협상에서 ‘사고’를 친 이후에도 말로는 “죄송하다”고 했지만 ‘인빅터스’인 듯했다. 비판에 굴하지 않고 다시 최선을 다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특별법 2차 협상 무산은 1차 협상 때의 실패 패턴과 똑같았다. 그는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합의했다”고 말했지만, ‘충분히’ 소통하지 못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를 비상대책위원장에 영입하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문재인 의원 등 당내 주요 인사와 중진들과 상의했다고 말했지만, 서로 말이 달랐다. 같은 말을 놓고도 해석이 다른 것은 ‘충분히’ 소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또한 왜 지금 중도보수 인사를 영입해야 하는지 당내에서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다. 역시 소통의 문제다. 그는 당내 반발에 부닥치자 진보적 인사인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를 공동비대위원장으로 긴급히 영입하려 했다. 박 원내대표를 향해 원내대표 사퇴를 주장했던 한 의원은 “이 교수가 우리 당과 정체성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게 우리 당에 집권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면 영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절차가 너무 틀렸다. 이젠 박 원내대표의 독주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가 저지른 실수 뒤엔 남성 중심적인 정치권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상의 오류가 섞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박영선의 실패를 여성 정치의 실패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박영선 파동이 여성들의 정치활동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진 예단할 수 없다. 어쩌면 한번의 사례로 끝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당분간 여성 정치의 미래에 악영향을 끼친다면, 이는 한 여성 개인의 잘못을 전체 여성의 문제로까지 확장시키려는 잘못된 틀짜기(프레이밍)에 이용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박영선을 여성 전체의 문제로 보려고 한다면, 이는 박 원내대표 개인의 책임을 비롯해 현재 새정치연합이 지닌 취약성과 한국 사회의 보수화, 민주주의의 퇴행에 대해 정확한 진단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일단, 박 원내대표 개인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자기를 비우거나 내려놓을 줄 모르는 정치인이라는 것이다. 박 원내대표를 오랫동안 지켜본 한 인사는 “박 원내대표의 옷은 명품이 많지만 대부분 다 오래된 것들이다. 그는 비싼 옷을 구입하는 대신 체형의 변화에 따라 옷을 줄이거나 늘여가면서 오래오래 입는다. 나는 이번에 박 원내대표가 중대한 실수를 한 뒤에도 비상대책위원장을 내려놓거나 아니면 원내대표에서 물러나지 않은 것을 보면서 그의 낡은 명품들이 생각났다. 그는 자신이 가진 값비싼 것들을 버릴 줄 모른다. 덧칠하고 수선하면서 계속 노력하면 모두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원내대표는 여성들 사이의 소통에도 실패했다. 그가 원내대표에 출마했을 때 많은 당내 여성 의원들이 그를 도왔다. 하지만 이번에 그를 가장 많이 비판하고 실망한 쪽도 여성들이었다. 이는 박 원내대표가 기대했던 만큼의 선명성을 보여주지 못한 탓도 있지만, 자신을 지지한 여성 의원들과 공감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 원내대표의 한 여성 측근조차 탈당설을 듣고 “이젠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다. 도무지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본처럼 보수정당 장기집권의 기로에 서다 130석을 지닌 거대 정당의 ‘저질체력’도 박 원내대표가 실패한 주요 원인이다. 박 원내대표가 지난 14일 밤 탈당 뜻을 밝혔을 때 일부 언론들은 박 원내대표의 탈당이 정계 개편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해프닝에 불과할 수 있는 사건을 놓고 이런 무리한 확대 보도가 가능한 것은, 국민들 일부는 ‘새정치연합은 현직 대표가 탈당도 할 수 있는 기율이 무너진 무능한 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표가 탈당한다면 이로 인해 의원들이 새정치연합에서 뛰쳐나가 새로운 중도 성향 당을 만들 수 있다는, 공상에 가까운 시나리오가 먹히는 것도 마찬가지다. 현재 새정치연합이 얼마나 구심력이 약한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박 원내대표가 아니라 누가 대표가 되더라도 당을 바로 세우기엔 역부족이었다고 보는 것도 같은 얘기다. 윤희웅 민컨설팅 여론분석센터장이 “디제이(DJ)가 돌아와도 바꾸기 어려운 당”이라고 말했다. 정희진씨는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보수정당이 장기집권하느냐, 못 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새정치연합이든 진보정당이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박영선의 실패, 새정치연합의 무능함은 한국 정치의 보수화라는 전체적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은 현재 여러가지 군소정당이 있지만 자민당 하나를 이겨내지 못한다. 정치인의 세습주의, 경제난 등 비판받을 만한 소지가 충분한데도, 자민당은 굳건하게 버티고 있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은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논란 등으로 정권의 정통성 시비에 휩싸였고, 세월호 참사 대응에서 총체적 무능함을 드러냈으나 꾸준히 지지율 40%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이처럼 ‘박영선 파동’은 복잡한 맥락에 놓여 있다. 이 사건은 정치인 박영선에게 담긴 ‘개인 여성’을 되새기게 만들고, 리더십도 팔로십도 없는 새정치연합의 허약함을 직시하게 하며, 한국 사회의 물질주의와 짝을 이루는 정치적 보수화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또한 이번 사건은 어느 누구도 메시아적인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줬다. 새정치연합은 박영선을 잔 다르크처럼 치켜세웠지만 기대감의 봉우리가 높을수록, 실패에 대한 절망의 골짝은 그만큼 깊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박 대통령의 강공 선회, 그 내막은? [정치토크 돌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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